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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초기 정몽주에 대한 인식

          김보정(Kim, Boe-Jeong) 포은학회 2012 포은학연구 Vol.9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본고는 15세기 초반에 편찬된 史書 『고려사』ㆍ『고려사절요』를 중심으로 하여 정몽주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 것이다. 태조ㆍ정종대와 달리 태종대에 이르러 정몽주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게 된다. 그 배경에는 태종의 새로운 인재정책으로 인해서 정치세력의 변화가 주요한 요인이다. 그리고 세종대 집현전학사를 중심으로 경연에서 史書를 진강한 점도 한 요인이다. 『자치통감』과 『자치통감강목』등의 사서진강을 통하여 『고려사』의 롤모델을 찾는 과정에서 忠臣의 사례를 배우고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삼강행실도』를 편찬할 때 정몽주가 「충신도」에 그려진다든가, 재야에서 『포은집』을 편찬할 때 「행장」에서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등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태종대 편찬된 『태조실록』과 세종대 편찬된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몽주를 여전히 亂臣으로 인식하고 있다. 태종이나, 세종 모두 조선 제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몽주는 조선건국을 반대한 역적이자 난신이었던 것이다. 즉, 조선 초기 정몽주에 대한 인식은 이중적 구도라 할 수 있다. '난신'과 '충신'의 인식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완결이 『고려사』의 諸臣傳 입전이다. 특히, 반역전도 충의전도 아닌 諸臣傳의 입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이중적 인식은 『고려사』열전에 그대로 반영되어, 반역 죄인으로 효수된 사실과 충신으로 인정하고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사실을 모두 함께 서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This paper was investigated about the perception of Jeong Mong Ju focusing on GoryeosaㆍGoryeosajeolyo published in the early 15th century. In the reign of King Taejong unlike King Taejo and Jungjong, it became to change the perception of Jeong Mong Ju. In the background, there was a major factor of political power change by new human resources policy of King Taejong. Another factor was giving a lecture of history in the Royal presence around the Jiphyeonjeon Scolarship in the reign of King Sejong. In the process of finding role models of Goryeosa, through Saseojingang such as Jachitonggam and Jachitonggamgangmok, the case of loyalists were studied and perceived. We could confirm these perceptions that Jeong Mong Ju was painted in Chungsindo when Samganghaengsildo was published, and his achievements were acclaimed in Haejang when Poeunjip was published. However, at Taejosillok published in the reign of King Taejong and Yongbieocheonga published in the reign of King Sejong, Jeong Mong Ju was still perceived as a traitorous servant. He was a traitorous servant and traitor opposed the founding of the Chosun from the overview of Chosun's King such as Taejong and Sejong. Therefore, the perception of Jeong Mong Ju in the begining of Chosun was seen the dual composition coexisting the position of the Lord (traitor) and the position of servants (loyalist). And this completion was the introduction into the biographies of Goryeosa. Because of this dual perception, the biographies of Goryeosa and Goryeosajulyo were subsequently described as a traitor of Chosun and a loyalist of Korea. Also it was described his personality and achievements at the same time.

        • 공공도서관 건물의 피난계단 배치현황과 이격 거리를 고려한 배치기준 개선에 관한 연구

          김보정(Kim, Bo-Jung),전규엽(Jeon, Gyu-Yeob) 대한건축학회 2017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Vol.37 No.1

          If the building has large space or numbers of occupants, location of exit stairs on the floor has great influences on egress time. However, a standard for walking distance to exits is only considered to relate to placement of the exits. This study analyzes a way to place egress stairs and an improvement of evacuation, targeting buildings which comparatively have large floor area. In this study, exits separation is considered regarding to placement of escape stairs to reduce evacuation time. As a result, evacuation time is reduced from a max 16% to min 4.4% when the exit stairs separation rule is considered. However, when stairs are placed in the middle of the floor, the application of exit separation rules increases egress time to max 28%. It will be continued to study on standards in relation to the number of exits and kinds of floor plans.

        • KCI등재

          선조ㆍ광해군대 정몽주 인식

          김보정(Kim, Boe-Jeong)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한국민족문화 Vol.61 No.-

          본고는 조선 전기 성리학 이해를 살펴보기 위한 일환으로써 윤두수의 『성인록』과 오운의 『동사찬요』를 통하여 선조·광해군대 사림의 정몽주 인식을 살펴본 연구이다. 중종대 정몽주의 문묘종사는 정몽주를 충신에서 성현의 반열로 올려놓고 있으나, 문묘종사에서 논란이 되었던 정몽주의 출처에 대해서는 여전히 분분하니, 명종대 이황은 程子의 말을 빌어서 그 진위의 논란을 잠재우고 있다. 선조대 이르러 서인의 영수인 윤두수는 『성인록』에서 정몽주를 송나라의 문천상과 나란히 살신성인한 인물로서, 이제는 충신을 뛰어넘어 ‘仁人’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정몽주의 문집인 『포은집』은 한 개인의 문집으로써 세종대에 이어서, 또 한 번 선조 18년(1585)에 간행되어 반포된다. 이때 좌의정 노수신에게 서문을 쓰게 하고, 유성룡에게는 기존의 신계본, 개성본, 관본을 모아서 교정을 보게 하고 발문을 쓰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대의명분을 저버린 정도전과의 교유 관련 내용은 모두 삭제된다. 임진왜란 이후 동인의 영수인 유성룡이 교정을 보아서 간행되었던 『포은집』 운각본을 바탕으로 잘못된 곳을 다시 한 번 개진하는 이가 유성룡의 벗인 죽유 오운이다. 오운은 세 차례에 걸쳐 『동사찬요』를 편찬한다. 그 과정에서 『고려사』에는 수록되지 못한, 고려 말 절의를 지킨 인물 길재, 김주, 이양중, 서견, 원천석 등을 추가 서술하는데, 이들은 선조대 이르러 세인의 이목을 받던 인물들이다. 여기에는 선조대 정몽주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한 몫을 하고 있다. 광해군대 이르러 오운은 『동사찬요』의 정몽주 열전에서 이성계와의 관련 내용을 삭제하고, 그 대신에 공민왕 16년 기사, 즉 이색이 정몽주를 동방 이학의 비조라고 칭송한 기사를 서술하고 있다. 이는 중종 12년 정몽주가 문묘에 종사된 이후 조선 이학의 도통의 연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단초가 되는 기사로써, 이를 강조하고자 함인 것이다. 이를 반증하듯 공양왕대 기사 가운데 공양왕의 옹립, 정몽주의 죽음을 제외한 모든 기사를 삭제하여, 도리어 정몽주의 죽음을 살신성인으로 강조하게 되니 성현의 반열에서 ‘인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하여 보면 선조·광해군대 정몽주에 대한 인식은 당파를 초월하여 임진왜란을 극복하였듯이 소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조대 윤두수는 중종대 성현의 반열에 올려진 정몽주의 인식을 ‘인인’ 단계로 구체화시키며, 광해군대 오운은 이를 『동사찬요』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This article is investigated about the recognition of Jeong Mong-Ju in Sarim of Seonjo and Kwanghaegun through Sunginrok of Yoon Du-Su and Dongsachanyo of Oh Un in order to investigate the understanding of Neo-Confucianism in Chosun Dynasty. Jeong Mong-Ju was moved up to the rank to the saint from the loyalist by Moonmyojongsa of Jeong Mong-Ju in Jungjong’s period, however, his source was continuously controversial. Lee Hwang in Myongjong’s period obliterated the authenticity controversy by quotation of Jungja words. In Seonjo’s period, Yoon Du-Su, who was the leader of Seoin, recognized Jeong Mong-Ju as the saint in Sunginrok. He called that Jeong Mong-Ju was a martyr like Moon Cheon-Sang in Song Country. Through this recognition, Pounjib of Jeong Mong-Ju was again spreaded and published in 18 years of Seonjo’s period. The introduction was written by Noh Su-Shin, who was the first vice-premier. and the epilogue was written by Ryu Seong-Ryong. In the process, the information relating to Jeong Do-jeon has been deleted. After Imjin War, Ryu Seong-Ryong, who was the leader of Dongin, published Pounjib and Oh Un, who was a friend of Ryu Seong-Ryong, was again published after the correction. Oh Un published Dongsachanyo third edition. In this process, Gil Jae, Kim Ju, Lee Yang-Jung, Seo Kyeon, and Won Cheon-Seok were described additionally, they received the attention of the public in Seonjo’s period. It played an important role that the change of the recognition of Jeong Mong-Ju in Seonjo’s period. Additionally, the story of Jeong Mong-Ju in 16 years Gongmin King period in Dongsachanyo was included in the achievements of Jeong Mong-Ju. This story was showed that Jeong Mong-Ju in 12 years Jungjong’s period was the origin of Chosun Confucianism, and it was emphasized in this story. As disprove it, all stories except the enthroning of Gongyang King and the death of Jeong Mong-Ju were deleted, rather, the death of Jeong Mong-Ju was emphasized as the martyr and was showed the aspect as the saint. Through this article, we could know that the recognition of Jeong Mong-Ju in Sarim of Seonjo and Kwanghaegun was communicated as the overcome of the Imjin War transcending the partisans. Yoon Du-Su in Seonjo’s period embodied the recognition of Jeong Mong-Ju moved up to the rank to the saint in Jungjong’s period, Oh Un in Kwanghaegun’s period reflected in Dongsachanyo.

        • KCI등재

          율정 박서생의 생애와 사상

          김보정 ( Kim Boe-jeong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6 嶺南學 Vol.0 No.31

          본고는 박서생(1371~?)이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길재의 문인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고, 그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본 연구이다. 박서생은 스승 길재의 사후, 길재의 행장인 「야은길선생행장」을 직접 서술한 제자로서, 길재의 문인답게 당시 두문동 72현의 자손들과 거의 동일한 삶을 산 인물이다. 박서생에 관한 자료는 비록 소략하나, 광해군 8년(1615) 그의 6대손인 박준이 서술한 박서생의 行蹟으로 인해 그의 생애를 좀 더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 고려 공양왕 2년(1390) 약관의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나 관직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 무렵 당시 선산으로 낙향해 있던 길재의 문하로 들어간다. 이후 길재의 출사 권유로 인해 태종 원년(1401) 문과 급제하고, 태종 7년(1407) 성균 학정으로 문과 중시에 을과 1등을 하여 우정언으로 제수된다. 이후, 태종대 병조 좌랑, 우헌납, 응교, 서연관 필선 등을 역임하고, 세종 원년(1419) 사헌부 집의가 된다. 세종 3년(1421) 본향인 비안을 상주목의 속현에서 벗어나 안동대도호부 소속의 비안현으로 승격시킨 공이 있으며, 세종 10년(1428) 이후 성균관 대사성, 우군 첨총제, 집현전 부제학, 공조 참의, 병조 참의, 판안동대도호부사 등을 역임한다. 이러한 관직 생활을 통하여 지공거인 하륜, 집현전 부제학 당시 집현전 동료였던 정인지, 권채 등과의 교유도 보인다. 박서생은 스승 길재를 모시고 있는 동안 길재의 모친상, 장남 길사문의 상을 직접 주관하는 등 「야은길선생행장」을 보면 『주자가례』에 의거한 상례와 제례에 대한 인식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스승 길재의 절의를 칭송하는 시에서 『시경』의 `鶴鳴于九皐聲` 구절을 인용하여 스승 길재의 지기인 남재와도 대등하게 시를 수작하는 모습에서 그의 성리학 이해 정도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세종 10년(1428) 이후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일본 사행,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공법 논의, 공조 참의로서 수차 제작 등 관직 생활에서 실천하는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사행에서 돌아와서 보고한 일본의 정세와 왜적의 동태는 이후 조선이 일본에 대한 정책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특히,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공법 시행을 찬성하는 것은 집현전 학자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이라서 의미가 있다. 더구나 집현전 내의 권근문하의 제자들이 포진해 있는 가운데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길재의 문인 박서생이 집현전의 행수인 부제학으로서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공조 참의로서 일본 사행에서 가져온 수차 모형을 바탕으로 직접 수차 제작에 참여하며 관개의 이로움을 도모하고자 한데서 성리학 이념을 실천하고자 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이렇듯 박서생은 조선 초기 절의파 사대부이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길재의 문인으로서 그 배운 바를 몸소 실천하며, 세종대 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This article is investigated about the life and iIdeology of Yuljeong Park Seo Saeng (1371~?) who was a disciple of Gil Jae of Dumundong 72 Hyun. Yuljeong is Park Seo Saeng`s pen name. He wrote the lifetime of Gil Jae, his teacher. He lived the same life as Dumundong 72 Hyun`s descendants. There was a lack of data about Park Seo Saeng, however, we could show his lifetime through Park Seo Saeng`s life which written by Park Jun, his six grandchildren. Park Seo Sae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at 20 years old, but didn`t go to the government. He was gone to hometown and entered as a disciple of Gil Jae. After Gil Jae`s advice,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at 1401 years, At 1407 years he entered into the government as Ujeongeon. He served consecutively as his public office at 1419 years. At 1421 years he made public achievement that Biahn (his hometown) was promoted to Biahn Hyun. After 1428 years, he also served consecutively as his public office. Through his public office life, he made an exchange with his friends, Ha Ryun, Jeong In Ji, and Gwon Chae. Park Seo Saeng organized the funerals of Gil Jae`s mother and son during supporting his teacher. Through Gil Jae`s life which written Park Seo Saeng, we could know that it is considerable for the recognition of the funerals. Also we could find out his understanding of Confucianism from the writing level of the poetry. After 1428 years, we could find his practice what he was in his office life through the royal envoy to Japan as a Sungkyunkwan Metabolism, the discussion of tax system as a Jibhyunjeon Bujehak, the fabrication of water turbine as a Gongjochamuei. In the report after royal envoy to Japan, it wast the significance that the policies of Chosun was changed against Japan from information about the situation of Japan and the movements of the Japanese troops. In particular, the agreement to tax system as a Jibhyunjeon Bujehak replace Jibhyunjeon scholar`s opinions. Moreover, this is a significant meaning that Park Seo Saeng, who was a student of Gil Jae of Dumundong 72 Hyun, was the Bujehak which was the leader in Jibhyunjeon. And, he participated in the water wheel fabrication based on the water wheel model through the royal envoy to Japan, moreover, he enhanced advantages of irrigation facility, therefore, we could find out his the ideology of Confucianism. Park Seo Saeng was a disciple of Gil Jae of Dumundong 72 Hyun in early Chosun. And he was the representative person succeeded Gil Jae`s academic study in Era of King Sejong.

        • KCI등재

          오메가-3섭취와 유산소운동이 이상지질혈증군의 지질관련 혈액성분과 혈관나이에 미치는 영향

          김보정(Bo-Jeong, Kim),서영환(Young-Hwan Seo) 한국발육발달학회 2021 한국발육발달학회지 Vol.29 No.3

          This study was conducted for the purpose of examining the effect on lipid-related blood components and vascular age improvement according to the intake of health functional food omega-3 during aerobic exercise in this direct dyslipidemia group. The study subjects were 20 men and women aged 30-49 years who had at least one abnormal finding among the diagnostic criteria for dyslipidemia and 10 people in the intake group T.G (take group) who combined omega-3 intake and aerobic exercise and 10 people in the non-take group N.G (not take group) who only perform aerobic exercise were selected. As a result of the study, both groups were pre and post lipid-related blood components TG (p<.01<SUP>**</SUP>, p<.001<SUP>***</SUP>), LDL-C (p<.01<SUP>**</SUP>, p<.05<SUP>*</SUP><SUP></SUP>), HDL -C (p<.05<SUP>*</SUP>) showed a significant difference, and the vascular age APG also showed a significant difference (p<.001<SUP>***</SUP>, p<.01<SUP>**</SUP>). There was no significant difference in the effect of lipid-related blood components and vascular age in the improvement effect difference between the two groups (p>.05). Overall, T.G showed positive results on average than N.G, but there was no statistically significant difference in effect. Therefore, when the dyslipidemia group performed aerobic exercise, it was concluded that the concurrent intake of omega-3 could help improve lipid-related blood components and vascular age, but there was no statistically significant difference in effect compared with non-consum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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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 · 성종대 정몽주 인식

          김보정(Kim, Boe-Jeong) 역사실학회 2015 역사와실학 Vol.57 No.-

          본고는 조선 전기 성리학 이해과정을 살펴보려는 일환으로써 세조 · 성종대의 정몽주 인식을 살펴본 연구이다. 사서는 당대의 인식을 보여주는 척도이며, 그 시대 편찬자의 사관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세조 · 성종대 편찬된 관찬사서인 『국조보감』과 『동국통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세조대 『국조보감』의 편찬자, 즉 신숙주 등 8인의 정몽주 인식은 실록에 비해 상당히 많은 부분이 배제되어 그들의 정치성향과 무관하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성종대 『동국통감』의 편찬자는 서거정 중심의 훈척과 표연말?최부 등 사림으로서, 이들의 정몽주 인식은 사뭇 달랐다. 세조대 공신이자 훈척인 서거정은 『필원잡기』에서 농(弄)을 빌어서 정몽주를 폄하하고 있는데 비해, 김종직의 문인인 표연말 · 최부 등은 신편 『동국통감』에서 정몽주의 절의를 칭송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사서(史書) 진강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세종대 경연과 달리 성종대 경연에서는 새로이 『고려사』를 진강한다. 『고려사』에 수록된 정몽주의 칭송기사를 발췌하여 신편 『동국통감『에 수록한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성종대 사림은 정몽주를 ‘절의지사’ 라고 칭한다. 그러므로 세조 · 성종대의 정몽주 인식은 세종대 『삼강행실도』의 ‘충신’에서 중종대 문묘종사의 ‘성현’으로 숭배되는 과정에 있으며, 성종대 사림의 정몽주 인식은 ‘절의지사’ 라고 정의할 수 있다. This paper was investigated the recognition for Jeong Mong-Ju in Sejo?Seongjong Dynasty through the compilers of Kukjobogam and Dongguktonggam. Through the eight compilers of Kukjobogam such as Sin Suk-Ju, it had proved the fact that the recognition for Jeong Mong-Ju in Sejo Dynasty were excluded in Kukjobogam unlike the Annals of the Chosun Dynasty. Because Kukjobogam was written by focused in achievements and good words of the Kings, the articles for Jeong Mong-Ju were also partially omitted. This was found out being related to political opinions of eight persons such as Sin Suk-Ju. As the results about the recognition for Jeong Mong-Ju in Seongjong Dynasty through the compilers of Dongguktonggam, there were distinctions between the recognition of the King’s relatives and the recognition of Sarim such as Pyo Yeon-Mal and Choi Bu. Seo Keo-Jeong who the King’s relatives in Sejo Dynasty have banteringly denigrated Jeong Mong-Ju through Pilwonjabki. It was a look that reflects from the regency by the queen mother in the initial Seongjong Dynasty and the political affairs by Chancellors. However the government styles were changed through the reorganization systems by Chancellors, the recognition for Jeong Mong-Ju were gradually changed by appointed Sarim from the management the affairs of state in Seongjong 7th Dynasty. During the lecture, only Jeong Mong-Ju and Gil Je were mentioned as ‘Jeoleuijisa’, and the recognition about ‘Jeoleuijisa’ was changed as severely remonstrated persons in usual not urgent crisis. In the basis of this perception change, the lecture of history books was played an important role. Unlike Sejong Dynasty, Goryeosa was lectured twice, and Hanseo was lectured before and after the compilement of Dongguktonggam. As a result, Dongguktonggam in the Seongjong 16th Dynasty have been compiled by attaching 204 pieces of Shinsaron. Dongguktonggam was included the contents to honor the achievements of Jeong Mong-Ju in Goryeosa by Choi Bu and Pyo Yeon-Mal. Although Dongguktonggam in the Seongjong 16th Dynasty have coexisted the recognition of Hunchuk and Salim, the recognition for Jeong Mong-Ju have been represented as the ‘Jeoleuijisa’ recognition of Salim. Therefore, the recognition for Jeong Mong-Ju in Sejo? Seongjong Dynasty was in the process of being worshiped as ‘Saint’ for Jeong Mong-Ju in discussions of Confucian shrine in Jungjong Dynasty from the recognition as ‘Loyalty’ for Jeong Mong-Ju in Samkanghaengsildo of Sejong Dynasty, and the recognition for Jeong Mong-Ju of Salim in Seongjong Dynasty could be defined as ‘Jeoleuiji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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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도덕교육에서 덕교육에 관한 고찰 -「프로타고라스」와 「메논」을 중심으로-

          김보정 ( Bo Jeong Kim ) 한국초등도덕교육학회 2013 초등도덕교육 Vol.0 No.43

          “덕은 무엇인가?, 덕은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도덕교육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러한 덕의 본질에 관한 질문의 뿌리는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프로타고라스』와 『메논』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으로 소크라테스의 덕의 본성과 교육가능성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덕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프로타고라스와의 대화에서 덕의 본성에 관해 논의한다. 소크라테스는 덕은 하나라는 덕의 단일성을 주장한다. 하나의 덕은 사람으로서의 훌륭함(덕), 즉 성품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덕 중 가장 중요한 덕을 지혜로 삼으며 지혜로 말미암아 옳은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메논』에서 덕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덕이 지식(앎)이라면 가르칠 수 있다고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는 훌륭함(덕)과 지혜의 단일성을 언급하며 덕교육의 가능성에 대해 모호하나 그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초등도덕교육에서는 덕의 본성에 따라 교육의 목표, 방법 등이 변화한다. 현재 초등도덕과에서는 덕을 교육 내용으로 정하여 가르치고 있다. 이미 덕은 가르칠 수 있다는 신념을 전제하고 있다. 교육내용으로 선정된 여러 덕들은 결국 하나이며 지혜를 통해 상황에 맞는 덕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덕교육은 덕을 지닌 인간, 즉 훌륭한 성품을 지닌 인간으로의 성장을 목적으로 한다. “What is virtue? Can virtue be taught?” are the most fundamental questions in moral education. We can find these questions asked for the first time in the dialogues of Plato. In 「Protagoras」 and 「Menon」 Socrates inquires into the nature of virtue and the capability of virtue being taught. Socrates discusses the nature of virtue with Protagoras In 「Protagoras」, He argues that virtue is one whole that appears as different names and phronesis is the most important virtue by help of which right actions can be done. Socrates answers that virtue is capable of being taught if virtue is phronesis in 「Menon」. Here. he. even though ambiguous. says that virtue can be taught. The goal and method of the moral education in elementary school changes according to how we define the nature of virtue. As of now virtue is being taught as a part of the content of the moral education. which demonstrates that virtue can be taught. Virtues suggested in the curriculum are one whole which appears as the right one by help of phronesis in each situation. Therefore. the goal of virtue education is that we. teachers. help students come to have virtue as one whole.

        • 관공서 건물의 비상전원설비 중요도에 관한 연구

          김보정(Kim Bo-Jung),남경목(Nam Kyung-Mok),전규엽(Jeon Gyu-Yeob),홍원화(Hong Won-Hwa) 한국건축친환경설비학회 2011 한국건축친환경설비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Vol.2011 No.3

          Today, as our industries and businesses are almost dependent on electric apparatus or on-line system, management system of electric facilities is necessary to be considered as the part of the maintenance of the building. Also, facilities of power supplies can't always provide stable power service because of various situations of blackout caused by natural disaster, construction of extension building or remodeling building. And sometimes the lack of emergency power supplies can be the reason of life and property loss. So a study of emergency power system is required. Therefore, we will research the current situation of emergency power equipment of Buildings, and analyze the importance of emergency power equipment depends on case.

        • KCI등재

          선조대 『포은집』 운각본(芸閣本)의 간행과 의의

          김보정(Kim, Boe-Jeong) 포은학회 2017 포은학연구 Vol.19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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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은집 은 고려 말 정몽주의 문집이다. 조선시대 가장 많은 판본을 갖고 있으며 아울러 가장 많이 간행된 문집이기도 하다. 특히, 세종 21년(1439)과 선조 18년(1585) 두 차례에 걸쳐 왕명에 의해 교서관에서 간행된 점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고는 정몽주의 문집인 포은집 판본 가운데 선조 18년(1585)에 간행 된 포은집 운각본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선조 18년(1585)에 간행된 포은집 판본은 다양한 명칭을 갖고 있지만, 여기서는 운각본이라 칭하고자 한다. 포은집 운각본의 특징은 선조의 명에 의해 유성룡이 기존의 포 은집 을 바탕으로 하여 교정을 보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산물이 주자의 「한문고이」를 본받아서 서술한 유성룡의 「연보고이」이다. 「연보고이」는 조선 전기 포은집 판본인 신계본, 개성본, 교서관본 등 세 본에 실려 있는 정몽주의 연보를 바탕으로 하여, 유성룡이 주자의 「한문 고이」의 예에 따라서 새롭게 정리한 것이다. 유성룡은 조선 당대 최고의 주자성리학자인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그러므로 선조 18년(1585)에 간행된 포은집 운각본은 주자성리학의 대의명분에 바탕을 둔 판본으로서 그 내 용면에서 「연보고이」의 수록과 함께 기존의 포은집 에 수록되어 있는 정 도전의 글을 모두 삭제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일 것이다. 포은집 운각본은 조선 후기 포은집 판본인 영천본, 봉화본, 숭양본 등의 저본이 된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특히, 조선시대 선조대는 포은집 의 간행이 가장 많은 시기이다. 그 저변에는 정몽주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찾을 수 있다. 중종대 정몽주는 문묘에 종사됨에도 불구하고, 재야에 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정몽주의 출처문제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명종대 이황이 주자의 말을 빌어서 정몽주의 출처문제를 잠재웠으며, 선조대 이황의 문인인 유성룡은 주자의 「한문고이」를 빌어서 「연보고이」 를 서술하여 글로서 정몽주의 출처문제를 완전히 정리하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 정몽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현종대 송시열이 정몽주를 절의의 차원에서 그 위상을 찾기보다는 조선 성리학의 이학의 비 조로 인식하고, 여기에서 정몽주의 위상을 찾고자 한 점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조대 포은집 운각본은 조선시대 정몽주 문집의 간행에서 조선 전기의 포은집 과 조선 후기의 포은집 을 구분하는 한 획을 긋고 있다. Poeunjib is the collected writings of Jeong Mong-Ju at the end of Korea dynasty. This book had the most edition and the most published book in Chosun dynasty. Especially, it has the meaning of being published in Kyoseokwan because of the command of king twice(21th year of King Sejong and 18th year of King Seonjo). This article is about one of those anthology’s edition, Poeunjib Ungakbon which was published in 18th year of King Seonjo. Althiough this edition had lots of names, we’ll call it ‘Ungakbon’ in this article. One of its feature was that Ryu Seong-Ryong corrected the original Poeunjib because of the order of King Seonjo. The result was shown by Ryu Seong-Ryong’s Yonbokoyi(年譜攷異) which emulated Zhuxi’s Hanmunkoyi(韓文攷異). Yonbokoyi was summarized by Ryu Seong-Ryong through the example of Hanmunkoyi, based on Jeong Mong-Ju’s chronology in three books which Poeunjib Shinkyebon, Poeunjib Kaesungbon, and Poeunjib Kyoseokwanbon. These books were the edition of Poeunjib in early Chosun dynasty. Ryu Seong-Ryong was one of Lee Hwang’s disciple who was the greatest Neo-Confucianism scholar in Chosun dynasty. Poeunjib Ungakbon was the edition based on Neo-Confucianism in 18th year of King Seonjo. Therefore, all articles of Jeong Do-Jeon in the contents of Poeunjib were deleted. Poeunjib Ungakbon had a signification that were the base of Poeunjib edition (Youngchunbon, Bonghwabon, Sungyangbon) in the late of Chosun dynasty. The King Sunjo of Chosun is the most popular period of publishing Poeunjib. On the other hand, we could find a change of recognition about Jeong Mong–Ju. Despite the fact that Jeong Mong-Ju is engaged in the temple in King Jungjong, the problem of Jeong Mong-Ju s source, which is constantly raised in the field, still remained. About these, Lee Hwang in King Myongjong tried to solve the problem of Jeong Mong-Ju s source by asking Zhuxi. Ryu Sung-Ryong, who was a disciple of Lee Hwang in King Seonjo, summarized the source of Jeong Mong-Ju s works by describing Yonbokoyi. This had lead to a shift in the recognition of Jeong Mong–Ju in the late Chosun Dynasty. Song Si-Yeol in King Hyunjong recognized as a juxtaposition of Chosun Neo-Confucianism rather than a term of Jeong Mong-Ju’s fidelity. Here, it have reflected the desire to find Jeong Mong-Ju s po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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