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 좁혀본 항목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 주제분류
        • 발행연도
        • 작성언어
        • 저자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 KCI등재
      • KCI등재

        종가문화의 전승기반과 변화양상

        김미영(金美榮) 한국국학진흥원 2017 국학연구 Vol.0 No.33

        이 논문에서는 종가문화의 전승기반인 고택과 사당, 그리고 종손과 종부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우선 경북지역 182종가 가운데 고택을 보유하고 있는 사례는 90종가로, 전체 49%이다. 나머지 51%는 한옥과 양옥, 아파트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고택은 종가의 위상을 드러내는 대표적 상징물이다. 따라서 고택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의 문중 행사가 종가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종가의 접빈문화가 자연스럽게 창출되면서 독자적인 가통으로 자리잡아 가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당의 경우 전체 182곳 중에서 161종가에서 사당을 구비하고 있으며, 비율로는 88%이다. 문중 시조의 신주를 모신 사당인 만큼 보존과 관리가 매우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고택과 사당이 아무리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더라도 이를 활용하는 주체자가 없으면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다. 즉, 종손과 종부가 종가에 거주함으로써 고택과 사당에 생명력이 부여되면서 다양한 종가문화가 창출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경북지역 182종가 가운데 종손과 종부가 거주하고 있는 경우는 84곳으로, 전체 46%이다. 나머지 98종가(54%)는 종손과 종부가 외지에 거주하면서 불천위 제사나 집안의 대소사 등에만 종가로 돌아오는 경우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종손과 종부가 종가에 거주하고 있더라도, 종가문화를 이어받을 차세대 종손과 종부가 외지에 진출해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경북지역 182종가 가운데 현재 종손과 차종손이 함께 거주하고 있는 경우는 7사례로, 전체 4%에 불과하다. 또 같은 지역 내에서 따로 살고 있는 경우는 3사례이고, 비교적 근거리에 거주하고 있는 경우는 3사례이다. 이들 전체를 합하더라도 13사례로, 7%를 넘지 않는다. 이로써는 종가문화의 안정적인 계승을 기대하기 힘들뿐만 아니라 그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혈족(후손) 중심의 법인을 설립하여 종가에 부여된 이른바 ‘조상제사권'을 양도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는 곳도 있다. 어차피 종손과 종부가 거주하지 않는 종가에는 시조를 위한 제례문화만이 남아있는 까닭에, 그 역할을 법인 단체가 담당하더라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이를 통해 오히려 안정적인 계승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그야말로 차세대 종손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종가문화가 출현할 날이 멀지않은 듯하다.

      • KCI등재후보

        공과대학생의 온라인 학습에서 자기조절 학습 능력 및 학습 양식과 학습참여도와의 관계

        김미영,최완식 대한공업교육학회 2006 대한공업교육학회지 Vol.31 No.1

        The Relationship among Self-regulated Learning Ability and Learning Style and Degree of Learning Participation in On-line Learning of Engineering University Student 이 연구의 목적은 4년제 공과대학 학생들의 자기조절학습능력과 학습유형을 조사하고, 자기조절학습능력과 학습유형간의 관계를 분석하며, 이들이 온라인 학습환경에서 학습자들의 참여도, 만족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연구의 대상으로 4년제 대학교 정규과정 1개반을 선정하여 온라인 학습 환경을 설계한 후 한학기 동안 운영하고 학습참여도를 확인하기 위해 시스템 로그 파일과 게시판 게시횟수를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로서 자기 주도 학습 능력과 학습 참여도간에는 정적인 상관관계가 나타나고 학습양식과 학습참여도간에는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다. 또한 자기조절학습 능력과 학습양식 사이에는 통계적으로 유의미 하지 않았다. 학습양식은 연구자가 기대한 수렴자와는 달리 분산자가 63.4%로 높게 나타났다.

      • KCI등재후보

        Phenylalanine Ammonia Lyase and Cinnamic Acid 4-HydroxylaseActivities of Rice and Pepper in response to UV and Wounding

        김미영 한국생명과학회 2002 생명과학회지 Vol.12 No.3

        The metabolites related to phenylpropanoid pathway play an important role in the self-defense of plants and induced by environmental stress like wounding, pathogen attack, UV-irradiation and so on. The mRNA level of rice phenylalanine ammonia lyase (PAL) was increased at 12 h to 48 h, however it was gradually decreased 48 h to 60 h after UV irradiation. The PAL enzyme activities in rice were peaked at the time of 24 h after UV irradiation, on the other hand, it was not affected by wounding. The PAL enzyme activities in pepper were raised high at 24 h and 10 h by UV irradiation and wounding respectively. The cinnamic acid 4-hydroxylase (C4H) activities were increased by wounding treatment and were detected from 12 h to end time point of experiment, while UV-irradiation didn't affect the C4H activity in rice and pepper. These results were assumed that the action of isoflavonid has an alternative effect on the defenses which include wounding and UV irradiation and on the diverse roles in rice and hot pepper.Key words - cinnamic acid 4-hydroxylase (C4H), pepper, phenylalanine ammonia lyase (PAL), rice 고추에서 UV와 상처가 PAL 및 C4H 효소 활성에 미치는 영향김미영·윤용휘·이정훈·김학윤1·신동현*·이인중·김달웅·김길웅(경북대학교 농대 농학과, 1계명대학교 환경학부)Phenylpropanoid pathway 생성물질은 식물의 self-defense에 관계하며 이러한 물질들은 UV뿐 아니라 wounding, pathogen과 같은 environmental stress에 의해 생성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벼에서 PAL mRNA 는 UV 조사 후 12시간에서 48시간까지는 증가하였으나 48시간부터 60시간까지는 점점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PAL의 활성은 UV 조사 후 24시간에서 가장 높았지만 상처에 의해서는 PAL의 활성이 벼에서는 증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추에서는 UV조사와 상처를 준 후 24시간과 10시간에서 각각 높은 활성을 나타내었다. 벼와 고추 모두 cinnamic acid 4-hydroxylase의 활성은 상처를 준 후 12시간에서 증가하였지만 UV 조사는 C4H 활성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로 볼 때 벼와 고추에서는 UV 조사와 상처가 모두 PAL, C4H 효소활성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 KCI등재후보
      • KCI등재

        植民地朝鮮の券番の研究 - 日本の券番との比較を中心に

        김미영(金美英) 한국문화융합학회 2018 문화와 융합 Vol.40 No.2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Studies on Kisaeng and the Kwonbeon of patents in Korea have been extensively studied in many fields. However,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 study of the Kwonbeon of the issue presupposes that the Korean Kwonbeon is established by modeling the Japanese Kwonbeon by colonization, but there is no research or comparative study based on Japanese literature.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reveal the reality and characteristics of the issue of the colonial Joseon dynasty. It is a system created in 1779 in the Japanese Edo Period in the Yoshihara Prostitution place, and introduced into the Chosun society through colonies. Therefore, in order to study the issue of the colonial Chosun dynasty, it is necessary to compare it with the Kwonbeon of Japan. The difference between the Kwonbeon of Japan and the Kwonbeon of the colonial Chosun can be explained in the structure and employment contract of Japan Hanamachi. 韓国における妓生と券番に対する研究は、幅広く研究が進められている。しかし、朝鮮の券番が日本の券番をモデルに設立されたということを前提にしているものの、日本の資料に用いた文献資料調査及び比較研究については管見のかぎりあまり研究されていなかった。そこで、本稿の目的は、植民地朝鮮の券番の有り様と特徴を明らかにすることである。 最初の券番は日本の江戸時代(1779年)に吉原遊郭で設立された制度で、植民地化によって朝鮮社会に導入された。したがって、植民地朝鮮の券番と日本の券番との比較研究が必要である。まず、先行研究を検討し、妓生と芸者の法令と当時の新聞、そして妓生の自伝とインタビュー資料などを用いて比較研究を進めた。 その結果、江戸時代の券番の役割は、吉原遊郭の宴会を担当していた芸人を券番に登録し、管理監督した。そして吉原遊郭の全般的な役割と税金などの事務的な役割、また芸者の生活と疾病などをサポートする役割を果たしていた。明治時代(1868年)が開始され、政界·財界の社交場で東京に芸者の花町が形成された。花町は券番が総括して三業組合の置屋、料亭、待合(=茶屋)で構成されていた。 料亭、待合(=茶屋)は、芸者の派遣場所である。派遣の場所で券番を通じて置屋に連絡を取り、芸者が派遣場所に行く三業組合システムで運営されていた。券番は三業組合を総括して管理し、全般的な事務業務の一体を担当した。券番の役割は芸者の花代を集計する業務と税金の徴収業務を行った。また、芸者を券番に登録し、警察署に営業申告と廃業申告の業務を代行した。そして券番が主催になって三業組合の経営が円滑に運営できるように各種行事やイベントの準備と企画を担当する役割を果たした。このように植民地朝鮮の券番の役割は、日本の券番と共通点を持っていた。しかし、両者の相違点は植民地朝鮮の券番が教育機関としての役割を持っている点と朔会である。日本の券番と植民地朝鮮の券番の共通な役割は、妓生と料理店の仲介役、入学金と授業料の徴収業務、警察署での妓生認可証の手続き業務、税金と妓生の花代徴収業務、温習会と大小の公演会の企画業務などを担当していた。基本的に日本の券番と同様な役割であるが、相違点として入学金と授業料の徴収業務と朔会は、植民地朝鮮券番のみに見られる特徴である。童妓として入学して芸能教育を受け、妓生に成長し活動をするまでの課程全般を管理した植民地朝鮮の券番は、演芸事業の始まりであり、芸能プロダクションのような性格を持っていたと考えられる。そして、朔会は、券番に所属していた妓生は全員参加する妓生の重要な集まりであり、妓生の内外部の芸能活動や社会的な活動を総括する重要な会であった。朔会を通して妓生の主体性が確認できる。芸者は花街で主体的な立場ではなく、年季奉公で身が縛られていた。花街はサービス産業の企業であり、三業組合の経営者たちはサビース産業の経営者であり、芸者はサービス産業に従事する従業員のような立場であった。このように日本の券番と植民地朝鮮の券番の相違点は、日本花街の構造と年期 한국에서 기생과 권번에 대한 연구는 많은 분야에서 폭넓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 다. 그러나 20세기 초기의 권번에 대한 연구는 한국 권번이 식민지화에 의해 일본권번을 모델로 설립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논을 서술하고 있지만, 일본의 자료에 의거한 문헌조사를 통한 연구 및 비교연구에 대해서는 전무하다. 따라서 본 본고의 목적은 식민지 조선의 권번의 실체와 특징을 밝히는 것이다. 권번은 일본 에도시대(江戸時代) 1779년에 요시와라 유곽(吉原遊郭)에서 만들어진 제도로 식민지를 통해 조선사회에 도입된 제도이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의 권번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권번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선행연구를 검토하여 기생과 게이샤의 법령과 당시의 신문 그리고 기생의 자서전(自伝)과 인터뷰 자료 등을 이용하여 비교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권번은 일본 에도시대 (江戸時代) 1779년에 요시와라 유곽(吉原遊郭)에서 만들어진 제도로 식민지를 통해 조선사회에 도입된 제도이다. 에도시대 권번의 역할은 요시와라 유곽 연회공간에서 흥을 돋우는 전문예인들을 권번에 등록하게 하고 관리 감독하였다. 그리고 요시와라 유곽 내에서의 전반적인 역할과 세금 등의 사무적인 역할 그리고 게이샤의 생활과 질병 등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메이지시대(1868년)가 시작되면서 정계재계의 사교장으로 도쿄에 게이샤하나마 치가 형성되었다. 일본의 하나마치는 권번이 총괄하고 삼업조합(三業組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삼업조합 안에는 오키야, 요정, 마치아이(=오차야)로 구성되어있다. 요정과 마치아이와 오차야은 게이샤의 파견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파견장소에 서 권번을 통하여 오키야에 연락을 취해 게이샤가 파견장소로 가는 삼업조합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이 때 삼업조합을 총괄하여 관리하고 전반적인 사무 업무의 일체를 담당했던 곳이 권번이다. 권번의 역할은 게이샤의 하나다이를 집계하는 업무와 세금의 징수 업무를 했다. 그리고 게이샤를 권번에 등록시키고 영업을 위해 경찰서에 영업신고와 폐업신고를 대행하는 업무를 했다. 그리고 권번이 주최가 되어 삼업조합의 경영이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각종 행사와 공연의 준비와 기획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다. 식민지 조선 권번의 역할은 일본 권번의 역할과 동일하였다. 그러나 차이점으로 입학금과 수업료 징수 업무와 삭회는 식민지 조선 권번의 특징이다. 동기로 입학하여 예능 교육을 받고 기생이 되어 활동을 할 때까지의 과정 전반을 관리한 식민지 조선 권번은 오늘날의 연예 기획사와 흡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삭회는 권번에 소속되어 있던 기생은 전원 참가하는 기생의 중요한 모임 인 기생의 내외부의 예능활동이나 사회적 활동을 총괄하는 중요한 모임이었다. 삭회를 통해서 기생의 주체성이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에 게시야는 하나마치에서 주체적인 입장이 아니라 고용계약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하나마치는 서비스 산업의 기업이고, 삼업조합의 경영자들은 서비스 산업의 경영자이자 게이샤는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는 종업원 같은 입장이었다. 이처럼 일본의 권번과 식민지 조선 권번의 차이점은 일본 하나마치의 구조와 고용계약에서 설명할 수 있다.

      • KCI등재

        妓生および芸者の芸能教育の比較

        金美英(김미영) 한국문화융합학회 2016 문화와 융합 Vol.38 No.4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近代妓生を研究する上で券番は研究の範疇で必ず論議されるべき部分である。 近代妓生は券番に所属され、芸能教育と妓業ができる唯一の機関であったのである。券番は元々日本の芸者に対する制度で、日本植民地時代に妓生に導入された制度であった。 したがって、韓國の券番を研究するためには日本の券番制度と比較研究の必要性が ある。 従来、妓生と芸者の芸能教育の研究では芸能教育に対する内容が全体ではなく、一部分のみ研究されてきた。全般的な内容に各国の独自の特性や相互の影響について知るのには不十分であった。また、妓生と芸者の芸能教育を比較した研究はあまり見当たらない。 そして、朝鮮王朝時代の妓生の芸能教育は教坊で担当していたが、日本植民地化によって日本の券番制度が導入され、妓生の芸能教育は券番で担当するようになった。 芸能教育について比較することによって、帝国日本が植民地朝鮮に与えた影響及び、各国の独自の特性を明らかにすることが本稿の目的である。 妓生と芸者は社会的に最高の境地の芸の能力を要求されており、その目的で芸能学校が存在し、芸能的能力を向上させるため、毎日厳しい教育を受けた。 日本植民地時代の券番は、朝鮮王朝時代の妓生教育機関である教坊と日本の券番制度がミックスされた新しい性格を持った券番と言える。 근대기생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권번은 연구의 범주에서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다. 근대기생은 권번에 소속되어 예능교육과 기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권번은 원래 일본 게이샤에 대한 제도로써 일본 식민지시대에 한국기생에 도입된 제도이다. 따라서 한국권번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일본권번제도와 비교연구의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선행연구에서는 한국권번이 일본권번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전제하지만, 한국권번과 일본권번을 비교한 연구는 별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화의 한국권번이 일본권번의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특히 한국권번에서 이루어진 예능교육에 대해서 밝히고자 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기생의 예능교육과 게이샤의 예능교육을 비교 고찰하였다. 조선왕조시대의 기생은 조선왕조시대의 음악기관이었던 장악원에 소속된 관기로서 궁중의 여악을 담당하고 있었다. 고려의 전통을 이은 전악서 (典樂署), 아악서 (雅樂署), 관습도감 (慣習都監)과 조선초 설치된 악학(樂學)에서 담당하다가 1457년(세조 3) 전악서와 아악서를 장악서(掌樂署), 악학과 관습도감을 악학도감(樂學都監)으로 개편하여 1466년 장악서가 악학도감의 업무를흡수했고, 궁중음악 및 춤에 대한 행정 및 연주활동 등이 일원화되면서 1470년(성종 1) 이전에 장악원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시대 음악의 교육과 연주를 담당한 체아직(遞兒職) 녹관(祿官)으로 전악(典樂) 1명, 부전악(副典樂) 2명, 전율(典律) 2명, 부전율(副典律) 2명, 전음(典音) 2명, 부전음 4명, 전성(典聲) 10명, 부전성 23명을 두었다. 이중 체아직해당자는 악사(樂師) 2명, 악공(樂工) 26명, 악생(樂生) 14명, 관현맹(管絃盲) 4명 등이었다. 교방은 지방 관청에 부속되어 장악원과 같은 역할로 기생 교육을 담당했다. 교방의 조직은 도상-행수기생-기생-동기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도상과 행수기생으로부터 기생 예능교육까지 행해지고 있었다. 1905년 궁중의 여악이 폐지되고, 1908년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국가소속에서 민간인으로 전환되었다. 일본식민지시대의 기생교육은 조합과 권번으로 1909년의 조양구락부의 설립하여 기생 교육 부속기관으로 다동조합을 설립함으로써 한국 최초 조합이 생겨났고, 이후 평양, 경성 등의 각 지방에 권번들이 설립되었다. 당시의 권번조직은 크게 총무부분문과 교육부문으로 이루어져있었으며, 입학과 졸업제도가 있었고, 입학금과 수업료를 납입해야만 했다. 통학을 원칙으로 하고 졸업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졸업을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왕조시대의 기생은 궁중 춤만 추웠다면 일제시대 기생은 장악원 소속의 교사와 관기 출신의 교사와 민간에서 발달된 예술의 전문예인 교사까지 식민지화로 인해 게이샤의 필수과목인 샤미센과 일본창 일본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목을 체계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게이샤의 예능교육은 게이샤는 기원부터 민간에서 샤미센을 연주하는 예인으로 발달해왔으며, 에도시대에 유곽에서 샤미센을 연주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예능교육은 개인학습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게이샤학교가 생긴 것은 메이지시대에 들어서이다. 게이샤의 수입의 일정부분을 세금으로 부과하여 1872년(메이지5년)에 뇨코바를 설립하였다. 뇨코바에서 수업을 듣지 않으면 게이샤의 일을 할 수 없게 강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1881년에 강제적이었던 수업이 자발적 참가 형태로 변화했다. 일본 게이샤 사회의 기본구조는 권번-요리점-오키야로 되어있어 오키야에 소속되어 시코미-미나라이-게이샤 과정을 거치게된다. 게이샤의 예능에는 지역별로 류파가 존재하는데, 그 류파는 명류파의 최고권위자인 초대 이에모토로 부터 2대, 3대로 계승되어 내려온다. 그리고 그 류파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그 지역의 게이샤만이 자격을 갖는다. 예능과목 이외의 게이샤의 필수과목으로는 다도가 있다. 다도는 전문다도학교에 가서 배운다. 그리고 교토말과 하나마치의 단어를 익힌다. 게이샤는 고객을 대접하는 서비스업을 가진 직업여성으로서 고객을 대하는 기술, 대접하는 기술, 대화 기술등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생과 게이샤는 사회적으로 최고경지의 능력을 요구 받았으며, 그 목적으로 예능학교가 존재했고, 예능적 능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매일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일본식민지시대 권번은 조선왕조시대의 기생교육기관의 교방과 일본의 권번제도가 믹스된 새로운 성격을 가진 권번이라 할 수 있다.

      • KCI등재

        류건휴<SUP>柳健休</SUP>(1768~1834)의 중용관

        김미영(金美榮) 한국국학진흥원 2016 국학연구 Vol.0 No.29

        류건휴는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대산 이상정의 계보를 잇는 호파의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 19세기 재야 영남유생이다. 그는 18세부터 대산 이상정의 삼대 제자 중 한명이었던 동암 류장원(1724~1796)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의 학풍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의 초기 저술인 『동유사서해집평』은 퇴계 이황 이래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사서해석을 종합하여 평가한 저술이며,『계호학적』은 『근사록』편제에 따라 이황과 이상정의 글을 편집한 것으로 계호학의 도통을 논할 때 중시되는 저술이다. 그의 말년작인 『이학집변』은 선배학자들이 중요하게 여겼지만 당시까지 정리되지 않았던 이단비판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계호학의 학문적 정체성을 세우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다. 따라서 다른 저술에 비해 류건휴의 견해가 많이 기술되어 있다. 그 중 선불교 비판은 분량 상으로 가장 비중있게 기술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중용』의 도에 기반하여 이단비판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류건휴 및 당대 영남유생들은 도통을 강조하며 이단을 비판하면서 심성론 보다 유학적 ‘도'의 성립을 강조한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선불교 비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류건휴는 19세기 영남유학자들의 지향을 ‘도' 개념에 담아 이단을 비판하면서 도통론을 강조하였다. 그는 솔성率性의 도를 해석하면서 성性과 리理, 성과 도道를 분리해서 논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며 성과 리를 모두 도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따라서 『중용』의 대표적인 마음공부인 계신공구와 신독공부를 논할 때도 마음의 허령한 작용성을 해명하는 데초점을 두기 보다는 도의 실천 공간에 더 중점을 둔다. 이는 퇴계 이래 영남유학자들의 특징을 심학적 경향으로 설명하는 것과는 배치된다. 오히려 19세기 호학파 영남유학자들은 기호유학계에서 심성론을 중심으로 전개된 논쟁을 비판하며 일상생활에서 도를 실천하는 데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을 류건휴의 『이학집변』에 나타난 선불교 비판의 논의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위로 스크롤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