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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취헌 박은의 「영후정자(營後亭子)」 시제(詩題)와 관련된 영보정 창건내력 검토

        김명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2020 한국학 Vol.43 No.3

        Yeongbogjeong is a pavilion located in Chungcheong Sooyeong Castle, Soseong‒ri, Ocheon‒myeon, Boryeong‒si, and Eubchwiheon Park Eun‒eun, the most respected poet of the Joseon Dynasty, wrote 5 poems in the “Yeonghujeongja” in 1503. As an Eubchwiheon’s representative work, the poem was honored as a role model of the poem in Yeongbojeong for the next four hundred years, with this poem’s popularity, Yeongbojeong became to join the ranks of nationwide famous pavilions while Chungcheong Sooyeong became the most popular destination in the world. As the poems of Yeongbojeong and “YeonghuJeongja” are inseparable like this, they are subjects of attention from that time to the present, but it was not discussed why the title of the poem was so decided. So, in this study, it is to be revealed that the reason why Park Eun was unable to proudly present the pavilion and he had to put on a falsehood, not a real one even though “Yeonghujeonja” was a poem about a pavilion, and the political factors at the time. In Joseon Dynasty society, the destruction of a family in a massacre of scholars or a serious crime of political strife and the brutal execution to death made people shudder at the bare thought of it by maximizing their fear, and it seemed that the case of Sahwa (damage caused by historical records) made the writers hold their brush when writing after carefully considering and thinking over and over. The answer to why he titled the poem “Yeonghujeongja” came from a paper on the establishment of Yeongbojeong by Kim Myung‒rae (2019) that ‘Yeongbojeong was not first built by Lee Ryang in 1504, but it was established by Kang Soon in 1468.’ When Park Eun wrote “Yeonghujeongja”, he knew that Yeongbojeongja was built by Kang Soon 36 years ago. The writers who later wrote poems about Yeongbojeon after Park Eun also knew this, but they didn’t mention anything, probably because it was the unwritten rule of the time. Kang Soon was a high‒treason criminal who was executed because he was related to Namyee’s conspiracy, then how they could write Yeongbojeong, which he established, as the title of a poem. So far, writers have doubts as to why the title of the poem “Yeonghujeongja” should be, but have not identified its cause‒and‒effect relationship and traced its reasons in studies related to Park Eun’s poems or Yeongbojeong. Therefore, it is considered that revealing inside story is an achievement of this study. 영보정(永保亭)은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충청수영성에 소재하는 정자이며, 읍취헌 박은(揖翠軒 朴誾)은 조선최고 시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로써 1503년에 「영후정자(營後亭子)」 5수를 이 영보정에서 지었다. 이 시는 읍취헌의 대표작으로써 이후 사백년 동안 영보정 제영시의 전범으로 존숭되었으며, 이 시의 유명세에 따라 영보정은 전국적인 명정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충청수영은 천하의 명승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영보정과 「영후정자」 시는 불가분의 관계로써 당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목대상이지만 그 시제(詩題)가 왜 그렇게 작정(酌定)되었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아니하였다. 이에 따라 박은은 어찌하여 「영후정자」 시가 어떤 정자의 제영시(題詠詩)임에도 그 정자를 당당하게 내세우지 못하고, 실체가 아닌 허상(虛像)을 내세워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와 당시에 정치적 요인에 대하여 밝혀보고자 한다. 조선 시대 사회에서 사화(士禍)나 정쟁의 옥사(獄事)에서의 멸문(滅門)과 참혹한 극형 집행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극대화시켜 주어 생각만 해도 치를 떨게 하였고, 사화(史禍)의 사례는 문인들에게 있어 글을 쓸 때에는 신중하게 앞뒤로 재보고 또 생각해 본 후에 붓을 잡도록 생활화되어 있었다고 본다. 왜 「영후정자(營後亭子)」라고 시제를 붙였을까 라는 과제는 ‘영보정은 1504년 이량(李良)이 처음 지은 것이 아니라, 1468년 강순(康純)이 창건했다’는 김명래(2019)의 영보정 강순 창건에 관한 주장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박은은 「영후정자」를 지을 때 영보정이 36년 전에 강순이 창건했던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박은 이후에 영보정 제영시를 지은 문인들도 이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그 시대의 불문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강순은 남이(南怡)의 옥사에 연류 되어 사형당한 대역 죄인인데, 그가 창건한 영보정을 시의 제목으로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문인들은 박은의 시에 관련된 연구나 영보정에 관련된 연구에서, 「영후정자」라는 시제가 왜 그래야 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겠지만, 그 인과 관계를 파악하고 그 원인을 추적하지는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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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 수군營鎭과 연해郡縣의 船所 연구

        김명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9 해양문화재 Vol.12 No.-

        船所는 조선시대 水軍의 軍港을 일컫는 海軍基地였다. 忠淸水營에서는 18개 邑鎭을 장악하였으며 본영을 포함하면 19개소나 되는 선소를 관할하였다. 忠淸水軍 本營과 屬鎭 중에서 4개소는현재까지 鎭城의 유구가 남아있고, 평신진과 마량진 진성은 멸실되었으나 위치만큼은 확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본영과 속진의 선소 위치는 진성 부근으로 가늠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13개 郡縣의 선소는 邑治에서 10리 거리에서부터 50리까지 떨어진 곳에 산재되어 있었다. 선소는 각 군현 소속 수군 함대의 母港이었지만, 조선의 水軍制가 폐지된 후에는 그 선소 시설은 매몰되거나 다른 용도로 전용되었다. 그러한 격변기를 거치며 선소라는 용어도 사어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水軍史에서도 충청수군의 경우에는 본영과 속진 위주의 鎭城 관련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최근에 들어서서 경상·전라지역에 대한 선소 연구가 있었으나, 현재까지 충청수군에 관한 선소 연구는 시도된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연구는 충청수군의 선소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며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충청도 沿海 지역에 설치되었던 19개선소의 위치를 확인해보고 그 입지조건을 분석해 보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 되겠다. 조선의 수군은 원래가 軍船에 승선하여 복무하는 舟師軍 체제였다. 成宗代부터 육상에 진성을축성하게 되자 성을 방어하는 鎭防卒 제도가 생기게 되었는데, 海防만을 전담하였던 수군이 鎭城 을 가지게 되어 진성방어까지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정의 관심이나 수군을 바라보는관점이 수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던 장소인 선소 중심에서, 진성위주의 關防으로 변천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다. 선소는 군선이 정박하는 부두와 출입수역을 비롯하여 육상의 지휘소·막사·급식소 등 관청 건물과, 창고시설 및 조선소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시설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이와 같이 선소는 역사적인 가치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근대화 과정에서 매립과 간척 등 대규모 개발사업으로 매몰되었고 당시의 지형을 유지한 곳은 남아있지 않았다는 판단된다. 따라서 충청도 연안의 선소위치와 입지분석은 문헌 고찰을 통해 이루어졌다. 해당 문헌은 「여지도」·「해동지도」·「1872년 지방지도」 등 고지도와 「조선오만분일 지형도」·수치지도·항공사진 등 현대 자료를 주로 이용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서 충청 水軍史에서 잊고 있었던 선소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충청수영 관할 19 개 선소의 위치를 파악하게 되었다. 또한 그 입지분석을 통해서 선소의 입지는 군선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유사시 신속한 출전에 대응했던 것 보다, 태풍이나 해일에 의한 피해에서 군선이 안전한 입지 즉, 대피 위주로 설정되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忠淸水營事例集인 『可考水營』에 기록된無浮日은 그 정의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으나, 충청수영 관할 18개 선소의 무부일이 최소 2일에서 최대 14일이나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조선시대 충청도 연안의 19개 선소는 충청수군의 군항이었지만 船所라는 말이 사라진 것처럼, 선소라는 해군기지 또한 소멸되어 거론되지 아니하였던 것을 다시 喚起하게 되었음을 이 연구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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