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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33년의 공공서비스 사업과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의 문화정치

          김경현 ( Kim Kyunghyun )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 구 한국서양고대사학회 ) 2013 서양고대사연구 Vol.34 No.-

          본 연구의 목적은 아그리파(Agrippa)가 기원전 33년에 추진했던 공공서비스 사업 및 선심성 선물공세에 드리워져 있던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의 문화정치를 분석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먼저 옥타비아누스가 아그리파를 대신 내세운 정치적 의도는 무엇인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가 기존의 건축사업과 성격이 다른 공공 토목 공사와 엄청난 규모의 선물공세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권력 기반으로 삼고 있는 안토니우스에 대적해서 이탈리아와 로마를 보호하고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 수도 로마의 위상을 고양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무계획적인 도시의 수준을 탈피하지 못한 로마에서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해결책을 문화정치에서 찾았다. 사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권력을 고양시키기 위해 자신과 아폴로 및 로물루스의 관련성을 계속 부각시켜왔다. 때문에 아폴로의 치유 및 정화의 능력 그리고 아버지 로물루스의 이미지가 바로 공공 서비스 사업과 선물공세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업의 청사진은 공익의 차원에서 로마의 물리적 환경을 개선시켜 시민의 호의를 얻겠다는 정치적 계산에서 제시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마지막까지 치밀함을 잃지 않았다. 공화정 부활의 약속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듯이 그 대규모 정책을 자신의 이름으로 주도하지 않고 아그리파를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결단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악티움 해전 발발 직전의 정치적 갈등과 긴장을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그것은 옥타비아누스가 귀족과 시민에게 보내는 정치적 메시지이기도 했다. 최측근이자 충실한 조력자인 아그리파를 내세워 공공서비스 사업을 추진하게 함으로써, 옥타비아누스는 동료 귀족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주의하면서도, 결국 사업의 최종결정권자는 자신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아그리파를 아이딜리스로 선출한 것도 그가 대리인이고 최종결정권은 자신에게 있음을 재차 강조하기 위함이다. 안토니우스와의 대립으로 나타났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정했던 기원전 33년의 공공 서비스사업과 선물공세 그리고 대리인을 통해 사업을 추진하는 방법은 이후 아우구스투스 정부에서 수행했던 사업들의 전례가 되었다. This study aims to analyze Octavian's cultural politics hidden behind the public service project and massive gifts promoted by Agrippa in 33 BC. For this purpose, this study will look into why Octavian used Agrippa instead of doing it himself. Then it will discuss why Octavian selected the above means, which was different from the former building projects. Octavian wanted to protect Italy and Rome and in the long run, lead a victory against Antony, whose power was rooted in Alexandria of Egypt. For this, he needed to uplift the status of Rome. However, as Rome was still a haphazard city, this seemed impossible. Octavian found the answer in cultural politics. As a matter of fact, Octavian highlighted his relation to Apollo and Romulus in order to exalt his power. The healing and purifying powers of Apollo, and the image of Romulus as a father was the blueprint of the public service project and the massive gifts. In other words, such a blueprint was not the result of a political move seeking to gain public popularity by enhancing the environment of Rome for public good. Also, Octavian was subtle to the last moment. So that it would show that he did not forget his promise to resurrect the Republic, he did not lead these blockbuster policies himself. Instead, he made Agrippa represent him. This shows us the political feud and tension before the breaking out of the Battle of Actium. In addition, it was a political message to the republican nobles and the citizens. By making Agrippa, a close attendant and a loyal assistant, take responsibility of the public service project, it can be said that Octavian took care not to arouse his fellow aristocrats but at the same time made it clear that he was in charge. Electing Agrippa as an aedile was an another way of showing that he was a proxy and that Octavian was in charge. Such means used by Octavian in 33 BC - the public service project and massive gifts and conducting these through a proxy - to solve the problems raised by the conflict against Antonius became a precedent for Augustan's government later on.

        • KCI등재

          로마 공화정 중기 평민의 민회 참여에 관하여

          김경현 ( Kim Kyunghyun )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 구 한국서양고대사학회 ) 2012 서양고대사연구 Vol.33 No.-

          본 논문의 목적은 로마 공화정 중기 평민들이 민회에서 수행했던 정치적 역할에 대해 새로운 논의를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세 가지 문제를 고찰했다. 첫째, 실제로 얼마나 많은 평민들이 민회에 참석했는가· 둘째, 민회에서 평민들이 합법적으로 할 수 있었던 활동은 무엇이었는가· 셋째, 평민들은 공식적인 민회 참여와 투표를 제외하고는 정치적 의사표시를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민회가 항상 로마에서만 개최되고 있었기 때문에 평민들이 로마로 가서 자신들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은 단순한 논리적 추론에 불과하다. 실제로 평민들은 국가적 이슈로 등장하는 사법, 선거 또는 입법과 관련하여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때론 자신들의 보호자들을 위해서 때론 다른 이유들로 인해 로마로의 발걸음을 재촉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합법적인 방법인 투표를 통해서 아니면 합법적인 형태의 소란 또는 비합법적인 형태의 폭력 등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표출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로마의 정치에서 평민들은 결코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필자가 로마에서 실질적인 주권이 평민들에게 귀속되어 있었다고 하는 밀러(Millar)의 강변까지 수용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호르텐시우스 법의 통과로 평민들만의 집회가 법적 효력을 쟁취하였다 할지라도, 귀족들이 지배하는 공화정의 정체에 급격한 변화가 초래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로마 평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제한할 수 있는 요인들도 여전히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제도적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평민의 참여가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전통적 견해들은 수정되어야 한다. 아울러 로마 공화정 중기의 정치에 관한 미래의 발전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이제 공화정 중기 평민회에서 누구의 권한이 더 우위에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실제로 그들 사이에 어떤 정치적 대화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었는지에 대한 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로마의 시스템은 대중과 정치적 계층 사이의 결코 일방적인 아닌 의사소통을 의미하고 있다”는 니꼴레(Nicolet)의 언급은 인용할 가치가 있다. The aim of this article is to discuss the political role which the people played in the popular assemblies in the Middle Roman Republic. For this, three questions are to be posed: 1) how many plebeians could attend the plebeian meetings and the popular assemblies? 2) What was legally permitted to the plebs in the popular assemblies? 3) How could the plebeians express their opinions in contio and comitia except by formal attendance and voting? In sum, the plebs could participate in political decision-making by exerting their own civil rights, although they were limited from a modern point of view. They could show their political opinions by attending popular meetings and assemblies from the whole Italy, or by casting a vote in the popular assemblies, or by expressing their opinions by means of shouting, mainly in the contiones. The plebeians were not a powerless and passive element in Roman politics. But I do not intend to accept Millar's strong suggestion that the Roman political system should be seen as a democracy rather than an oligarchy. The passage of the Hortensian legislation in 287 BC allowed the plebeian assemblies the legal force, but it did not cause the radical change in the Roman constitution. From a modern point of view, there were still elements to restrict the poplar participation in Roman politics. However the traditional opinions that plebeians' participation into assembly was structurally limited by overemphasizing the institutional aspects should be modified. We must seek a new way to address the Roman politics in the middle Republic so that future discussions about it can be a progressive one. In other words, instead of focusing on whose political powers were greater in the plebeian assemblies in the middle Roman Republic, we should rather focus on the network of political conversations between the parties. In this sense, Nicolet's statement “the Roman system implied a certain degree of communication, not all of it one-way, between the masses and the political class” is worth noting.

        • KCI등재

          터의 주인 되기: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

          김경현 ( Kim Kyunghyun ) 대한영어영문학회 2015 영어영문학연구 Vol.41 No.4

          Biocentric idea means that all living things are considered as equally important in a system. Nature can be regarded not only as the object of development or exploitation but as the place which has an interdependent symbiotic relationship with men, so we need to make an effort to maintain a harmonious relationship with nature. Lawrence has deplored the severance of the relation between human beings and nature with the process of life going against the order of life. He suggests ‘blood-intimacy' as replacing consciousness or will to get over the severance and bring the life force to itself, and describes the aspect of coexistence with human beings and nature keeping life order in his novels. And he puts an importance on the spirit of place and the native. He thinks there is a unique spirit in every place connected with the native's life directly and very closely. So it's the essential thing to understand the spirit of the place and be a real native. This paper is an attempt to find the native in Lady Chatterley's Lover and reconsider the spirit of our place. (Yeungnam University)

        • 자동차 DRL-Position 램프에 대한 요인별 수명 예측 분석 연구

          김경현(Kyunghyun Kim), 김찬중(Chanjoong Kim), 정재훈(Jaehoon Jeong) 한국자동차공학회 2020 한국자동차공학회 학술대회 및 전시회 Vol.2020 No.11

          Recently, the light sources of automobile lamps are used in two ways. With the development of a lot of LED, it seemed that the light sources of all lamps were replaced by LED, but since they have the strength of the bulb in terms of price, the bulb specification is still being used a lot. According to recent regulations, all cars must drive after turning on the DRL lamp during the day. Therefore, bulb with DRL and Position functions are often used in terms of cost. Due to the characteristic of this bulb, both light sources are turned on and used simultaneously, and accordingly, the life time of the bulb is different from that of single lighting. Therefore, in this study, it is intended to present the durability life and analysis methods of each factor, such as voltage, temperature, and dotting, for this bulb.

        • KCI등재

          로마 공화정 중기 평민회 시스템에 관한 고찰

          김경현 ( Kim Kyunghyun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16 사총 Vol.89 No.-

          로마 공화정 중기, 이론상의 주권자인 평민의 정치적 활동이 구조적으로 제약을 받았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검토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전통적 견해의 이론적 배경인 평민회의 세 가지 제도적 측면, 즉 평민회의 개최 빈도(frequency) 및 절차(procedure) 그리고 단위투표제(group voting)와 관련된 주장들을 고찰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런 제도적 장치들이 평민들의 정치 참여를 차단하기 위해 고안되었거나 실제로 방해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그것들은 평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제도적으로 유도하고 허용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제도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평민의 정치적 참여가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견해는 수정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평민의 정치적 활동이 구조적으로 제약을 받았는가에 관한 진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본고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로마 공화정중기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좀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새로운 연구 패러다임이 모색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공화정 중기 민회에서 권력의 소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지양되어야 한다. 대신 민회의 구성 요소인, 즉 민회를 소집하고 주관하는 정무관과 민회에 참석하여 투표를 하는 평민들 사이에 어떤 정치적 대화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로마의 시스템은 대중과 정치적 계층 사이의 결코 일방적이지 않은 의사소통을 함축하고 있다”는 니꼴레(Nicolet)의 언급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The aim of this article is to discuss the traditional view that the political role of the plebeians, the theoretical sovereignty in the plebeian assembly, was structurally hindered in Mid-Republican Rome. For this, I have reinvestigated into the frequency of assemblies, the assembly procedure, and the group voting, which are the theoretical basis of the traditional viewpoints. In conclusion, there is no evidence to verify that these institutional mechanisms were designed to limit the popular participation. Rather they may have encouraged and allowed the plebeians to participate into the assemblies. Therefore, the traditional views overemphasizing that the popular participation was structurally restricted by institutional mechanisms should be modified. However, my ultimate aim is not to determine whether plebeians' participation into assembly was structurally limited or not. We need to seek for a new paradigm to address the Roman politics in the Mid-Roman Republic, so that future discussions about it can be a progressive one. It is high time, in other words, that we should rather focus on the network of political conversations between the political elite and the masses rather than focus on whose political powers were greater in the plebeian assemblies. In this sense, it is worth noting Nicolet's statement “the Roman system implied a certain degree of communication, not all of it one-way, between the masses and the political 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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