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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适의 난과 『호남모의록』

        김경숙 숭실사학회 2012 숭실사학 Vol.0 No.28

        李适의 난과 『호남모의록』金景淑 이 논문은 영조대 간행된 『호남모의록』을 중심으로 이괄의 난에 대응 한 호남 사림의 募義活動과 그 특성을 검토한 글이다. 이괄의 난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왕대비와 국왕이 직접 나서서 전국의 민인들에게 의병 봉기를 독려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전국적으로 義兵 및 義穀 모금 활동이 전개되었다. 호남 지역에서는 영광에서 모의 활동이 시작되어 도내 전체로 확대되 었다. 모의 활동은 영광의 都廳을 중심으로 도내 고을을 都會官 - 屬邑 체제로 편제하고 각 고을 간에는 향교를 매개로 소통하는 지역 연결망을 갖추어 체계적으로 추진되었다. 모곡 대상자는 모든 민인을 대상으로 하 였고, 모곡량은 신분에 따라 차등있게 배정하였다. 그 결과 도내에서 모금 한 의곡량이 3천여석에 달하였다. 모곡 활동은 서인계 인물들이 주도하였 고, 그 때문에 북인 계열은 모곡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이들은 이괄의 난 뿐만 아니라 그 전후에 있었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의병을 일으키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모의활동의 전말을 기록한 『호남모의록』은 향촌사회에서 붕당간의 대 립이 첨예했던 1760년(영조 36)에 모의 활동 주도층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간행되었다. 이는 『호남모의록』의 간행 배경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현상이 다. 17세기 이후 호남 사림의 학문적 성향은 철학적인 이기심성론보다는 의리명분론에 바탕하는 節義와 忠烈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 다. 『호남모의록』은 충절을 강조하는 호남 사림계의 성향 속에서 형상화 된 산물인 동시에 호남 사림의 충절 전통을 확립하고 더욱 강화시키는 역 할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인 노론 계열이 충절의 전통을 확립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Yi Gwal/李适's Insurrection and the 『Ho'nam Mo'eui-rok/湖南募義錄』 Kim, Kyeong Sook Examined in this article is a publication named 『Ho'nam Mo'eui-rok(“The Record of ‘Righteous Volunteers Recruitment' within the Ho'nam Region”)』, which was compiled and published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The reason for such examination is to clarify the role played by the Ho'nam Sa'rim figures, and determine their actions of recruiting ‘righteous volunteers(righteous militia members)' as their efforts to respond to the insurrection of Yi Gwal. When the insurrection broke out, the king had to leave the capital, and in order to overcome the dynastic crisis, recruitments of ‘righteous soldiers' and ‘righteous resources(“Eui'gok,” 義穀)' continued throughout the country. This act of “Mo'eui(募義)” began in the Yeong'gwang area, and spreaded to the entire province. The people who led the recruiting were the “Westerners” party members who supported King Injo's takeover of the government and also the New regime. They categorized the counties inside the province into ‘Large ones(“Dae'eub,” 大邑)' and ‘Sub-units(“Sog'eub,” 屬邑),' and then launched a systematic campaign of raising money. The entire sum of grain collected inside the province mounted to 3 thousand Seok units. In 1760(36th year of King Yeongjo's reign), the descendants of the leaders of the righteous militias also led the task of compiling and publishing 『Ho'nam Mo'eui-rok』, which was a record of recruiting ‘righteous volunteers' from the Ho'nam region. Since the 17th century, the academic trend of the Sa'rim figures in the Ho'nam region displayed a tendency of 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onor(節義)' and ‘Loyalty(忠烈),' based upon the discourse of loyalty and righteousness, instead of endeavoring in philosophical studies of ‘Yi' and ‘Gi' and the Human nature(理氣心性). 『Ho'nam Mo'eui-rok』 was a result of the trends inside the Ho'nam region's Sa'rim society, and reinforced the tradition of loyalty for the Ho'nam Sa'rim figures. And it was the Westerners(the No'ron faction to be exact) who led that trend and promoted it.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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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宰文學における女性像をめぐって

        金京淑(김경숙) 동아시아일본학회 2011 일본문화연구 Vol.40 No.-

        太宰治의 여성에 관한 표현들은 대부분의 경우 작가 자신의 성격에 결부되어 거론되거나 작가의 여성관으로서 간주되어 페미니즘의 비판의 표적이 되어 왔다. 그러나 본 논문은 太宰의 여성표상이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전략적으로 창출된 것이라고 보고, 작품에 담겨 있는 여성에 관한 표현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그 여성표상의 창출 배경과 유효성, 그리고 그 속에서 작가가 자신의 시대정신을 담기 위해 어떠한 표현전략을 구사했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일본의 대부부의 남성작가와 마찬가지로 太宰治도 처음에는 ?夢の女?를 추구하였고, 그것은 母性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 후 ??念の女?를 창출해 작가자신의 시대에 대한 비판정신을 반영하였으나 母性적인 여성像으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했다. 太宰의 여성표상에 큰 변화가 오는 것은 현실의 여성의 내면세계를 소재로 집필한 ?女生徒?라는 작품부터이다. 이 작품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不潔な女?라는 표상은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女らしい?여성像을 거부하는 여성들의 자기표현이었고, 철저한 배제와 금기 하에 있던 당시 여성에 대한 性의 구속을 파헤치는 역할을 하였다. 太宰는 賢母良妻像에 상반하는 이 ?不潔な女?像을 ?時下의 여성독백체 작품에 일관하여 등장시켜 과장과 강조에 의해 그것을 여성의 본질로 일반화시키고 있었다. 그 작업은 母性/賢母良妻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부터 부정하는 행위였고 바로 그 점에 당시의 太宰의 여성표상의 방향성을 찾아 볼 수가 있다. 太宰는 이러한 여성像을 통해 비로소 ?時下의 억압에 대한 저항을 표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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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전 직후의 일본의 사회문화상

        김경숙(金京淑) 한국일본문화학회 2018 日本文化學報 Vol.0 No.78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sociocultural state of Japan and Japanese people's consciousness after the lost war, using the literary works of Japanese representative writer Osamu Dazai. Dazai's works of the time describe a chaotic society, in which the new paradigm of western democracy, liberalism, and individualism was dependently formed by General Headquarters (GHQ). Against the new power of GHQ, Dazai tried to express the identity of Japan by supporting the Emperor as the essence and symbol of Japanese history. In addition, the characters appearing in Dazai's works tend to recognize their mistakes, have a moral sense of responsibility, and contribute to the whole of Japan without egoism, thereby obtaining “ethical freedom.” Dazai considered these characters to be cultured men who were appropriate for the new age, because he believed them to be capable of “realizing political freedom,” as pointed out by Masao Maruy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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