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 KCI등재후보

        고전문학 : 허엽(許曄)의 삶과 시(詩)

        권혁명 ( Hyok Myong Kwon ) 한성대학교 한성어문학회 2015 漢城語文學 Vol.34 No.-

        본고는 허엽의 삶과 시세계를 살펴보는데 목적을 두었다. 본고가 허엽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학문적, 문학적 성취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허엽이 당대 성리학자로서 갖는 위상, 성취도 높은 시작품을 남긴 시인으로서의 위상은 한문학사에 충분히 보고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본고는 2장에서 허엽의 생애를, 3장에서 시세계를 살펴보았다. 허엽의 생애에서 주목되는 점은 먼저 그의 사승관계를 꼽을 수 있다. 허엽은 당대의 석학이었던 나식, 이여, 서경덕에게 학문을 전수받았고 이를 통해 성리학자로서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허엽이 儒道를 현실에 실현시키기 위해 이황, 조식과 같은 석학들을 대우하고 그들에게 孝悌忠信의도를 가르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 팔도에 향약을 시행토록 주청한일,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서 김정국의 『警民』 편의 < 補君上 >을 수 천권 배포하여 백성들을 교화시킨 일 등은 허엽의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라 할 수있다. 또한 허엽은 위정자로서 바람직한 자세를 유지하였다. 허엽은 동부승지,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 삼척부사, 경상도 관찰사 등의 관직을 두루역임하였는데, 在任시 不義에 굴하지 않는 강직하고 절개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예로 윤춘년의 관직 청탁사건을 들 수 있다. 윤춘년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6촌 아우로서 당시 요직에 있으면서 李戡의 관직을 청탁하였는데, 허엽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3장에서는 허엽의 시를 友情, 風流, 哀悼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우정을 보여주는 시는 허엽이 석갈하기 전에 지은 < 重興寺, 題燈月軸 >이다. 이 시를 지을 당시 허엽은 삼각산 중흥사에서 절친했던 친구 沈守慶, 尹潔과 함께 과거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 시를 통해 미래에도 변치 않을 세 사람의 우정을 다짐하고 있다. 풍류를 보여주는 시는 < 箕城, 呈李東皐觀察 >과 < 高城海山亭 >이다. 전자는 평양 감사 이준경이 대동강 부벽루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자, 풍악에 맞춰 기생과 노니는 자신의 모습을 戱畵化해서 보여 주고 있다. 후자는 車軾이 고성현감으로 가서 海山亭이라는 정자를 짓자 그 소문을 듣고 정자에서 바라보이는 절경을 상상하고 그 속에서 노닐고 싶어 하는 풍류를 함축적으로 드러내었다. 哀悼의 측면은 14수의 만시 중에서 < 退溪挽詞 >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 시에서 허엽은 이황의 儒者다운 면모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즉, 산림에 거처하는 것이 체질인 이황이 함부로 현실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이황이 時務를 급하게 여길 줄 아는 治人의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허엽은 선조가 도산서원이라고 賜額한 사실을 통해 성리학자로서 이황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lluminate the life and poetry of heoyeop. In the second chapter to this first chapter reveals the life will reveal the contents of poetry. The important thing in the life of a teacher heoyeop. Heoyeop learned from the study at the time was a great mentor nasik, seogyeongdeok. This name was because it reminds as a Confucian scholar. There are three themes heoyeop the world of poetry. The first friendship. Vanity was sworn abiding friendship with Sim su yeong and Yyungyeo to <重興寺, 題燈月軸>. Heoyeop is <箕城, 呈李東皐觀察>, shows the appearance playing happily at <高城海山亭>. You can see the elegance. In front of poetry expresses the look is playing with the parasite in the Taedong River bubyeokru. The poetry behind the constant appearance playing in dissolution in Gangwon-do Goseong. Mourning is <退溪挽詞> appears on. The heoyeop refers to as the scholar Yi Hwang. It expresses the heart grieved party at the time of the famous Confucian saying.

      • KCI등재

        충재(盅齋) 최숙생(崔淑生)의 삶과 시세계(詩世界)

        권혁명 ( Kwon Hyok Myong ) 근역한문학회 2021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Vol.58 No.-

        본고는 충재 최숙생의 삶과 시세계를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최숙생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최숙생의 생애에서 주목되는 것은 뛰어난 文才와 ‘直道而行’의 삶의 태도이다. 최숙생의 관직이 삼사에 집중되어 있고, 사은표 작성의 일인자였으며, 能文人으로 주청사에 의망되었던 것, 당대나 후대의 문인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문학 등은 최숙생이 뛰어난 문재의 소유자였음을 의미한다. 최숙생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서 군주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直道而行’의 삶의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는 정치현실에서 강직하고 과감한 公道 수행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예컨대 기묘사림들의 개혁정치의 일환인 현량과 실시를 강력히 주장한 것, 대사헌 때 무녀와 승려들을 도성 밖으로 퇴출시키고 제도를 어긴 사대부의 집을 색출하여 간가를 철거한 것, 충청도 관찰사 때 청탁을 뿌리치고 청양부사 이세정을 파직시킨 것 등이 이에 해당된다. 3장에서는 최숙생의 시세계를 살펴보았는데 다음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節操를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의식이다. 최숙생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서 군주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삶의 태도가 절조를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의식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둘째, 聖代에의 기대감 표출이다. 최숙생은 갑자사화로 유배살이를 하던 중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홍문관 응교로 중앙관직에 복귀하게 된다. 이후부터 기묘사화 이전까지 삼사 중심의 관직을 역임하며 우찬성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종에 대한 기대감은 聖代에의 기대감으로 표출하게 된다. 셋째, 관직생활의 어려움 토로와 은거지향이다. 관직생활의 어려움은 주로 충청도 관찰사 시절에 지은 시들에서 보이는데 자료의 부족으로 구체적인 이유는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당대가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세력들이 주도하는 세상이었고 최숙생이 병으로 고생한 정황이 보인다. 이러한 복합적인 원인으로 최숙생은 관직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정치현실을 떠나 은거하고자 하는 지향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This paper aims to reveal the life and Poetry of Chungjae Choi Sook-saeng. To sum this up, it is as follows: Chapter 2 examines the life of Choi Sook-saeng. What draws attention in the life of Choi Sook-saeng is the outstanding literary talent and the attitude of life in 直道而行. Choi Sook-saeng’s outstanding literary talent is evidenced by his well-received literary achievements by critics. 直道而行 is to practice what you think is right. Based on this, Choi Sook-saeng fulfilled his duties as a public official by keeping his beliefs. Chapter 3 examines the Poetry world of Choi Sook-saeng. There are three main themes. First, I want to live by keeping my Integrity. This comes from the attitude of Choi Sook-saeng’s life to live up to his conviction. Second, he expressed his expectation that Taepyeongseongdae would come. This is because expectations for King Jungjong were turned on. Third, I tried to live in hiding after expressing the difficulties of living in government office. This was because it was a time when the Hun-gu faction took power, and Choi Sook-saeng also had a disease. These things worked in a combination, so Choi Sook-saeng expressed the difficulties of living in government offices and tried to live in hiding.

      • KCI등재후보

        聽松 成守琛 詩世界의 一考察

        권혁명(Kwon Hyok Myong) 동악어문학회 2008 동악어문학 Vol.51 No.-

        본고는 聽松 成守琛의 시세계를 고구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성수침은 평생동안 은거하고 출사하지 않았던 바, ‘逸民’과 ‘淸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逸民은 성수침 삶의 전반적인 행적에 주목한 것이고 淸節은 그러한 삶 속에 함축된 精神的 意味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고는 이러한 평가를 토대로 성수침의 삶과 의식을 시작품을 통하여 유기적으로 밝혀보고자 하였다. 2장에서는 성수침의 隱居의 契機로서 現實認識을 살폈고, 志向한 隱居의 性格은 어떤 것인지를 밝혔다. 성수침이 인식한 當代 현실은 기묘사화 후 권신들에 의해 농단되는 ‘不善’한 現實이었으며, 이는 성수침을 은거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성수침이 不善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모범으로 삼았던 隱居는 道가 행해지면 다시 出仕하는 유교적 차원의 은거가 아니라 세상을 완전히 등지는 楚狂 接輿의 그것이었다. 성수침이 白岳山에 은거했다가 재차 坡山으로 은거지를 옮긴 것도 ‘不善’한 세상에서 忠을 잃지 않으면서 義를 지키려고 했던 楚狂接輿의 楚逸의 隱居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坡山에서의 삶을 중심으로 高潔한 삶과 淸隱의 詩世界를 밝혔다. 성수침은 俗世와 絶緣된 공간인 坡山을 淸隱한 공간으로 인식하였고 그 곳에서 淡泊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갔다. 그러한 삶 속에 중심이 되었던 것은 ‘不善’한 현실과 결코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高潔함을 지키겠다는 ‘淸節’의 정신이다. 이는 現實과 동떨어진 곳에서 節操를 지키는 대나무의 意象, 개인적 高潔함을 극도로 추구하는 屈原의 <漁父辭> 意象을 통해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This is purposed on the study of the realm of poetry of Chung-Song Sung-Soo-Chim. Sung-Soo-Chim hid at his place without for the government all his life. He is known for Il-Min and Chung-Jul. This is based on the above, and figured out life o f Il-Min of Sung-Soo-Chim and the detail meaning of Chung-Jul. In order to do this, in this chapter, the present politics view of Sung-Soo-Chim nad the reason and the purpose that he hid at his place were triggered. Sung-Soo-Chim realized the present time as unrighteousness world due to losing virtue. He persued the noble and dull life of Jup-Yeo, the insane of Cho dynasty. Sung-Soo-Chim stayed at Back-Ak-San then moved to Par-San as his hidden place to not losing patriotic and keep integrity. That started at the hiding place named Cho-Il. In chapter 3, the realm of poetry was researched centering around the life in Par-San. Sung-Soo-Chim lived his life as free and frank which is far from the world he had. That could be called the realm of poetry of Chung-Eun. He lived with fidelity that did not compromised with the world. He expressed his fidelity though the chastity of bamboo and psalm of Gool-Won as a fisherman who was looking for extream noblity. Sung-Soo-Chim wanted to keep the fidelity in that world to the end.

      • KCI등재

        송강(松江) 시(詩)의 이미지 연구(硏究) -애상(哀傷)의 시(詩)를 중심으로-

        권혁명 ( Hyok Myong Kwon ) 한국한시학회 2011 韓國漢詩硏究 Vol.19 No.-

        본고는 송강 정철의 哀傷詩에 등장하는 주요 이미지를 분석하여 그것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밝히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먼저 송강 시가 애상성을 띠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송강의 시가 애상성을 띠는 이유는 집착에 가까운 연군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송강이 어린 시절 경험한 궁중체험과 을사사화라는 상반된 두 삶의 낙차가, 송강의 정치적 부침과 맞물리면서 조정을 천상, 낙척된 공간을 하계로 인식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하계에서 송강이 천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上帝의 知遇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임금을 그리워하고, 자신의 결백과 충절을 토로하며, 임금이 불러줄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송강은 집착에 가까운 연군지정을 보이게 되고 시는 애상적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다. 송강이 하계에서 유랑하는 삶의 모습은 외기러기와 고주의 이미지로 나타나게 된다. 외기러기는 송강이 본래 살았던 공간인 천상에서 떨어졌다는 것이 강조된 것이며, 孤舟는 일시적으로 추락한 하계에서 유랑하며 천상의 삶으로 회귀하기 위해 군주의 知遇를 기다리는 송강 자신을 이미지화 한 것이다. 그러나 송강은 정적들의 방해로 천상으로의 회귀가 어렵게 되었고, 이는 끊어진 길, 가로막힌 산 등 차단의 이미지로 나타나게 된다. 송강은 차단된 장애를 비상하여 천상으로 회귀를 꿈꾸는 바, 仙鶴의 이미지이다. 송강이 선학을 선택한 이유는 조정이 천상의 선계였기 때문에, 천상 세계의 구성물인 선학으로 자신이 변해 인간들이 만든 장애를 극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This paper aims to analyze the images of Songgang Chung Chul`s poem of sorrow. It also will help to study symbolic meanings of those images. For this purpose, I look into the reason why his poem shows the nature of sorrows. First of all, his grief came from respecting his sovereign. He experienced royal court when he was young and he also undergo the Ulsa(乙巳) massacre of scholars. These conflicting experiences made him obsessing about his sovereign. He regarded the royal court as the heaven while he regarded the exiled place as the actual world. It means that he wanted to go back to the heaven. And his vagarious life appears as the image of wild goose and lonely small boat. The Wild goose means that he was apart from the heaven. And the lonely small boat means himself that he was waiting for warm hospitality from the sovereign. On the contrary, he used the images of blocked road and blocked mountain to represent the disturbance of political opponents. Therefore he dreamed of soaring to the heaven, and he used crane to represent it. As the royal court symbolize the heaven, he wanted to overcome the obstacles.

      • KCI등재

        고송(孤松) 최찬(崔纘)의 생애(生涯)와 시세계(詩世界)

        권혁명 ( Kwon Hyok-myong ) 한국시가학회 2017 韓國 詩歌硏究 Vol.42 No.-

        본고는 고송 최찬의 생애와 시세계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본고가 최찬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최찬의 <애대군가>가 당대에 유행했을 뿐만 아니라 최찬의 삶과 문학이 우리 문학사에서 논의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2장에서는 최찬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최찬의 생애에서 주목되는 점은 최찬이 강직한 성품과 신념을 바탕으로 배운 바를 실천하는 절조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살해하자 최찬이 <애대군가>를 지어 영창대군의 죽음을 애도하고 奸黨들의 발호를 비판한 것은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최찬의 강직한 성품과 절조는 일시적인 사건으로 인해 포장된 것이 아니라, 나주 초동마을의 학문적 전통과 집안의 학풍, 부친인 최희열의 정치적 신념 등에서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었다. 3장에서는 최찬의 시세계를 살펴보았다. 최찬의 시세계를 논의하는데 초점으로 삼아야 할 것은 그의 현실인식이다. 최찬은 儒者지만 대부분 고향에서 은거하는 삶을 살았고, 영창대군이 죽자 <애대군가>를 지어 6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따라서 우여곡절이 많은 최찬의 삶으로 볼 때 그의 현실인식을 살펴보는 일은 최찬 시세계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본고가 도출한 최찬의 현실인식은 광해군대와 인조대가 뚜렷하게 나눠졌는데, 최찬은 광해군대를 桀紂의 시대로 인조대를 禹湯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amine Gosong Choechan`s life and poetry. Choechan`s “Ae Daejunjae” was famous in his time, and his life and work are worth discussing in Chinese literary history. Chapter 2 presents research on Choechan`s life. He was upstanding, had faith in what he believed to be right, and lived as he had been taught. As a simple example, when the Gwanghaegun killed Youngchang Daegun, Choechan criticized the prosperity of the gentiles by mourning Yeongchang Daegun`s death. His honorable personality and principles were engendered by the academic tradition of the village of Naju Chodong and that of his family, and were not just momentarily revealed by that accident. Choechan`s poetry is discussed in Chapter 3. His poetry focuses on his recognition of reality. Choechan was a Confucian, but for most of his life he secluded himself in his hometown. When Yongchang Daejun died, he wrote “Ae Daejunjae,” spent six years in prison, and was released when the king of Injo was deposed. Therefore, given Choechan`s life, his recognition of reality, which is the gist of his poetry, was differentiated by the time of Gwanghaegun and that of Injo. He considered the former to be the age of Geolju (桀紂) and the latter to be the age of age of Utang (禹湯).

      • KCI등재

        서울의 문화유적과 콘텐츠화 방안 -성북구 낙산지역을 중심으로-

        권혁명 ( Kwon Hyok Myong ) 근역한문학회 2018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Vol.51 No.-

        본고는 서울시 성북구 낙산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위상을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낙산지역의 콘테츠화 방안을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낙산지역의 문화콘텐츠화의 필요성으로서 낙산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위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조선시대 낙산지역은 도성의 동쪽을 방어하는 성곽으로서의 위상뿐만 아니라 뛰어난 경치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경치를 遊賞하던 문화적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장에서는 낙산지역의 주요 문화유적들을 점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콘텐츠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고 몇 가지 첨언을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복원하지 못한 역사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낙산지역의 문화유적들은 복원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석양루가 한 예가 될 것이다. 현재 석양루터는 이화동 주민들의 주거공간에 위치하여 복원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듯하다. 하지만 서울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잇는 복원사업의 맥락에서 생각해 볼 때, 문화재의 복원은 도시의 이미지와 가치를 제고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효종대 최고의 甲第이자 사대부들의 문화공간이었던 석양루를 복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판단된다. 둘째, 현재 복원된 문화유적들은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날 수 있도록 보완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庇雨堂과 淨業院터가 예가 될 것이다. 비우당의 경우, 비교적 복원이 잘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비우당의 구체적인 의미와 이수광의 삶과 학문을 좀더 적극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있다. 정업원터의 경우는 관람공간도 협소하고 해설이 소략하여 문화유적으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낙산지역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대부분 성곽을 돌고 이화동 벽화마을만 구경하고 돌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문화유적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이 담긴 표지석과 영상 안내실 등을 갖출 필요가 있다. 셋째, 낙산공원의 산책로를 비우당 정업원 청룡사 동망봉 삼군부 총무당으로까지 확장 할 필요가 있다. 현재 문화유적과 연결된 낙산공원의 산책로는 성곽 안쪽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어서 성곽 바깥쪽인 창신동 삼선동 숭인동의 문화유적들은 관람객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그 결과 비우당 정업원 청룡사 동망봉 삼군부 총무당 등은 있는지조차 모르는 관람객들이 많다. 따라서 낙산 정상에 있는 놀이광장에서부터 창신동 숭인동 삼선동을 연결하는 역사 문화 탐방코스로서의 산책로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넷째, 관람객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행사를 조직해야 한다. 2장에서 언급했던 ‘巡城놀이’는 현재 서울시에서 프로그램화하여 잘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낙산지역이 조선시대 저명인사들이 많이 거처하였고 별장을 중심으로 酬唱과 풍류 문화가 이루어졌던 공간임을 착안하여 주변 한성대학교와 연계하여 문학 관련 행사를 마련하거나 국악 관련 공연을 개최하면 좋을 듯하다. The paper was aimed at reviewing the historical and cultural status of the Naksan area in Seongbuk-gu, Seoul, and proposing a plan to turn the area into a cultural Content based on it. To resolve this, Chapter 2 examined the historical and cultural status of the Naksan area. Naksan Mountain in the Joseon Dynasty was a fortress that defends the east of the capital city, and it was a cultural space where people were watching the scenery at the time due to its outstanding scenery as well as its status. Chapter 3 included checking the major cultural assets of Naksan and pointing out the problems and presenting suggestions for contents. The conclusions extracted are as follows: First, it is necessary to restore the historical and cultural significance of the Naksan area that has not been restored. In this regard, SeokyangRoo is an example. Second, the currently restored cultural heritages need to be fully supplemented to have historical and cultural significance. In this regard, Biudang and Jeongeobwon-teo would be examples. Third, it is necessary to extend the Naksan Park's historical and cultural exploration route to the Biudang Jeongeobwon-teo, Cheonglyongsa Dongmangbong Samgunbuchongmudang. Currently, Naksan Park's historical and cultural trails are built around the inside of the fortress, making it difficult for visitors to access cultural relics outside the fortress. Fourth, they should organize events where visitors can participate. The '巡城' mentioned in Chapter 2 is currently well programmed in Seoul. However, it would be nice to organize literature-related events or hold a Korean traditional music concert in connection with nearby Hansung University, considering that Naksan area was a place where many famous people lived during the Joseon Dynasty and a cultural tradition. We hope that this paper will help improve the historical and cultural status of the Naksan area.

      • KCI등재후보
      • KCI등재

        송호(松湖) 백진남(白振南)의 시세계(詩世界) 연구(硏究)

        권혁명 ( Kwon Hyok Myong ) 근역한문학회 2020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Vol.55 No.-

        본고는 송호 백진남의 생애와 시세계를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먼저 2장에서 백진남의 생애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백진남의 생애에서 주목되는 것은 백진남이 부친 백광훈의 영향으로 글씨와 문장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즉, 글씨는 王羲之와 鍾繇의 바로 뒤에 위치할 만하고 시는 당풍을 띤다는 평가를 받았다. 백진남은 이러한 筆法과 文才를 바탕으로 이순신의 막하에서 명나라 장수 季金, 皮承德에게 글씨와 문장으로 인정 받았으며, 1606년 황태손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사신으로 온 正使 朱之蕃의 찬사를 받았다. 3장에서는 백진남의 시세계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주제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강호에서의 평온한 삶을 읊은 것이다. 이 시들은 백진남이 젊은 시절과 만년에 서울과 영암에 은거할 때 지은 것으로 唐詩的 경향을 보여준다. 둘째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드러내는 주제들이다. 백진남은 임진왜란을 직접 겪었고 成天祗, 李舜臣의 막하에서 종사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전란으로 인한 괴로움, 중국 장수에 대한 칭송, 문재의 자부 등 다양한 의식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셋째, 사행길의 어려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시화한 것이다. 백진남은 관직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柳根의 추천으로 원접사 일행으로 참여하게 되는데, 이 때 사행길의 어려움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This paper was aimed at taking a brief look at the life and poem of Song Ho Baek jinnam. In summary, this is as follows: One of the most prominent things in Baek Jin-nam’s life is that he has gained fame for calligraphy and poem since childhood under the influence of his father, Baek Kwanghoon. Baek Jinnam’s writing was right behind Wang Huiji and Jongyo, and the poem was praised for its strong tendency to Tang Dynasty poetry. Chapter 3 gives an overview of Baek jinnam’s poems. Theme of the poem by Baek Jin-nam suggests that it is a common theme in the poems of literati during the Joseon Dynasty. However, in Baek Jin-nam’s poem, there are three main topics that should be noted: First, it looks like living a peaceful life in Gangho. The poem is shown in Seoul and Yeongam when Baek Jin-nam was young and old. Second, they are poems that reveal consciousness in relation to the Imjin War. Baek Jinnam went through the Imjin War in person and worked in Sung cheonji and Yi Sunshin’s military. Therefore, it reveals various rituals related to the Imjin War, such as the suffering caused by the war, praise for the longevity of China, and pride of literature. Third, these poems reveal the difficulties of the road to the envoy and the longing for his hometown. Although Baek Jinnam did not serve as a government official, he was encouraged by Yoo Geun to join the envoy’s group. At this time, he describes difficulties on his way to an envoy his longing for his hometown in poetry.

      • KCI등재

        畸庵 鄭弘溟의 漢詩 硏究 - 黨錮의 삶과 詩世界-

        권혁명 ( Kwon¸ Hyok-myong )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21 인문학연구 Vol.- No.62

        본고는 정홍명의 시세계를 삶과 유기적으로 살펴보는데 목적을 두었다. 정홍명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은 정홍명에게 가해진 黨錮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부친 정철의 정치적 삶으로 인해 정홍명에게 가해진 정치적 금고상태인 黨錮가 그의 삶을 지배했고 정홍명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2장에서는 자신의 삶을 인식하는 정홍명의 시각을 살펴보았다. 정홍명에게 삶이란 애초부터 떠도는 것[浮生]이었고, 실제가 아닌 꿈속의 환상[夢幻]과 같은 것이었으며, 아예 실체가 없는 허깨비[幻] 같은 것이었다. 삶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정치적으로 정점에 올랐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부친 정철의 정치적 삶을 직접 목도하고 黨錮의 삶을 살았던 정홍명이 ‘인생은 결국 허무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2장을 바탕으로 정홍명이 견지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정홍명은 明哲保身의 삶의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는 정홍명이 정치현실을 위태로운 공간으로 인식했고 그런 공간에서의 삶은 결국 자신에게 재앙의 단서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홍명은 인조반정 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10여 년간 청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어느 순간 중앙관직을 기피하고 지방관을 자청하거나 미련 없이 귀거래 하였다. 이는 정홍명이 위태로운 중앙정치를 실감하고 명철보신의 삶의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Jung Hong-myeong’s poetic world organically with life. The key to understanding Jung Hong-myeong’s poetic world is Party Imprisonment[黨錮] inflicted on Jung Hong-myeong. Party Imprisonment[黨錮], a state of political confinement imposed on Jung Hong-myeong due to his father Jeong-cheol’s political life, dominated his life, and it was deeply ingrained in Jung Hong-myung’s consciousness. Therefore, this study organically examined the poetic world of Jung Hong-Myung relation to the life of Party Imprisonment[黨錮]. In Chapter 2, we looked at Jung Hong-myeong’s perspective on his own life. For Jung Hong-myeong, life was a wandering [浮生] from the beginning, it was like an illusion in a dream[夢幻], not reality, and it was like a ghost [幻] without reality. This view of life seems to be because Jung Hong-myeong, who had witnessed his father’s political life firsthand and lived a life of Party Imprisonment, came to the realization that 'life is ultimately futile'. In Chapter 3, based on Chapter 2, we looked at the attitude of life maintained by Jung Hong-myung. Jung Hong-myeong maintained the attitude of life of Myung-Chul-Bosin in the political realities. The reason he maintained the attitude of life in Myung-Chul-Bosin was that he recognized the political reality as a precarious space and judged that his political life was ultimately a clue to the disaster to come. Jung Hong-myung entered the political world after the Injo Banjeong, and served in various important positions in the central government for about 10 years. However, at some point, he gave up his central position and volunteered to be a regional officer or returned to his hometown without any regrets. This is because he adhered to the lifestyle of Myung-Chul-Bosin.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