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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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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nges in the Perception of Mt. Baekdusan during the Late period of Joseon

          권내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Vol.13 No.4

          The erection of the Baekdusan Boundary Stone that demarcated the border between the two countries was not based on any clear exchange of opinions between the two sides as to where Baekdusan belonged. While the southern part of Baekdusan fell within Joseon’s sphere of activity, the northern side was occupied by Qing. Despite this reality, the issue of who possessed sovereignty over Baekdusan was never clearly resolved. In Joseon, Baekdusan was traditionally perceived as the source of Korea’s mountains and rivers and identified as an object of worship. The symbolic significance granted to the mountain was further strengthened following the erection of the Boundary Stone. Shortly thereafter, Joseon began to once again hold ritual ceremonies for the mountain, which was now identified as the point of origin of the royal family. A similar phenomenon also emerged in Qing. Thus, the two kingdoms undertook the process of heightening the symbolism attached to this disputed space in a similar manner. Joseon intellectuals’ interest in Baekdusan was expanded to include the desire to gain firsthand knowledge and investigate the famed mountain. The actual location of the Boundary Stone and the issue of the territorial jurisdiction over Baekdusan were largely ignored in favor of a new approach in which the boundary between the two kingdoms was perceived as being located at the top of Baekdusan. Moreover, in some cases, Baekdusan was perceived as falling entirely within Joseon’s territory. This perception was further strengthened after the modern era, and linked to the upgrading of Baekdusan’s status and the expansion of its symbolism.

        • KCI등재

          조선 후기 호적, 호구의 성격과 새로운 쟁점

          권내현 한국사연구회 2006 한국사연구 Vol.135 No.-

          The Nature of Household Registers and Households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New Points of Contention

        • KCI등재
        • KCI등재후보

          ‘홍경래 난’ 연구의 쟁점

          권내현 (사)한국인물사연구회 2009 한국인물사연구 Vol.11 No.-

          조선후기 민중운동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이 전반적으로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홍경래 난에 관한 연구는 최근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삼남 지역에 비해 연구가 저조하였던 평안도 사회에 대한 분석이 본격화하고 홍경래 난에 대한 관심이 해외 학계로까지 확대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와 관련한 성과들은 평안도 사회와 홍경래 난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의 축적은 물론 연구 시야의 확대를 가능하게 하였다. 하지만 저항의 배경과 주체, 성격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과 쟁점이 남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19세기 조선사회의 일반적인 모순과 평안도의 지역적 특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또한 저항을 주도한 세력은 과연 누구이며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저항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홍경래 난은 사회구조와 변동을 해명하기 위한 이론적 틀에 초점을 맞추었다가 실증을 통한 사실의 재구성으로 논점이 옮겨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평안도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와 연관시켜 저항의 다양한 측면을 조망해 보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지역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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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동성촌락 구성원의 통혼 양상단성현 신등면 안동권씨 사례

          권내현 한국사연구회 2006 한국사연구 Vol.132 No.-

          Marriage Aspect of Members of the Single-Lineage Village in the Late Joseon DynastyAndong Kwons' Case of Sindeung Myeon, Danseong Hyeon

        • KCI등재

          조선후기 평민 동성촌락의 성장

          권내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0 民族文化硏究 Vol.52 No.-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동성촌락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1930년대의 조사에서도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촌락이 동성촌락으로 보고되었다. 조선후기 동성촌락을 반촌으로, 비동성촌락을 민촌으로 이해하는 시각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동성촌락은 양반들의 전유물은 아니어서 19세기 이후에는 비양반층에서도 부계중심의 친족 질서를 수용하고 동일 성관의 집거를 통해 촌락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민들은 집거 과정에서 양반들이 이미 탈피했던 동성동본혼을 억제하고 나름대로의 통혼권을 형성하였다. 다만 그들의 통혼권이나 생활권의 범위는 양반들보다 좁아 주로 동성촌락과 그 주변에 집중되었다. 그들은 동성촌락의 형성과 함께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촌락 구성원의 가장 앞선 세대는 평민이나 노비에서 출발하였지만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구성원들이 중간층으로 상승하고, 19세기 후반에는 절대 다수가 상층으로 성장하였다. 이 또한 강고한 부계 집단의 형성 위에서 이루어진 성과였다. 조선후기 평민들의 일부는 양반들이 구축한 가족 문화를 적극 수용하는 한편으로 특정 촌락에 집거하여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고자 하였다. 그러한 노력이 모든 집단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근대 시기 많은 촌락에서 동성 집거의 경향을 보인 것은 바로 이들의 오랜 노력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도 어렵다. Today traces of a single-lineage village remains in places in Korea, and an investigation in 1930s also revealed that villages corresponding to almost half the total were single-lineage villages. It is difficult to explain such a phenomenon from the viewpoint in the late Joseaon Dynasty that a single-lineage village is regarded as a nobility one and a non-single-lineage village is a commoners' village. A single-lineage village does not occur only among the nobility(Yangban), so that after the 19th century, there began to appear many cases even among non-nobility classes where they took the leadership of a village by accepting agnate order and through collective living of the single-lineage people. The common people, during their collective living, controlled a marriage of the same surname & family origin to which the nobility already adhered and formed their own circle to offer marriage. However, their circle to offer marriage or living is narrower than the nobility, mostly concentrated on a single-lineage village and its surrounding. They positively made efforts for increasing their social position in line with formation of their single-lineage villages. The earliest generation of the people who formed single-lineage villages consisted of commoners and servants, but after the middle 18th century, the village members increased in their position to the middle class, and almost to the upper class by the late 19th century, all of which resulted from formation of a strong paternal group. Some of the common people in the late Joseon Dynasty positively accepted family culture established by the nobility, while they attempted to advance their social position by collectively living in a certain village. All of such efforts did not give all the groups success. But, it is difficult to deny the fact that it resulted from the common people's continuous efforts for a long time that the tendency of the single-lineage people collectively living appeared in lots of villages in modern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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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은광 개발 억제의 배경과 실상

          권내현 한국사연구회 2019 한국사연구 Vol.- No.184

          The policy to suppress development of silver mines by Joseon dynasty was alleviated by the restructuring of foreign relations, trade growth and lack of national finance in the 17th century. A large amount of silver was brought in from Japan and silver distribution of Joseon dynasty had reached its peak until the early 18th century. However, during the era of King Yeongjo, the influx of silver from Japan was greatly reduced, resulting in reappearance of the policy to suppress development of silver mines which was even more reinforced during the era of King Jeongjo. King Yeongjo was concerned about the foreign threats prompted by development of silver mines and King Jeongjo justified the policy as a means to renovate the physiocracy atmosphere of the period. It was difficult for King Yeongjo to coordinate the interests between diverse stakeholders involved in silver distribution so he sought compromise by reinforcing the governmental management and control in silver mines. On the contrary, King Jeongjo attempted to tighten the internal control along with stabilization of long-term foreign relations and did not allow the development of silver mines. Although this policy aimed to stabilize public welfare by strengthened government control, it slowed down the growth of national wealth as well as technological innovation, which in turn impeded long-term development of the economy in Joseon dynasty. 조선 왕조의 전통적인 은광 개발 억제 정책은 17세기 대외 관계의 재편과 무역의 성장, 국가 재정 부족에 따라 완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일본 은도 대량으로 유입되어 18세기 초까지 조선의 은 유통은 절정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일본 은의 유입이 크게 감소했던 영조 대 은광 개발 억제 정책이 다시 대두되었고 정조 대에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영조는 은광 개발로 인한 대외적 위협을 우려하였고, 정조는 중농 분위기의 쇄신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은 유통에 참여하였던 여러 주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어려웠던 영조는 은광에 대한 국가의 관리와 통제를 강화하는 선에서 타협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정조는 장기적인 대외 관계의 안정 속에서 대내적인 통제를 강화하며 은광 개발 자체를 용인하지 않으려 했다. 이러한 정책은 국가의 통제 강화를 통해 민생 안정을 추구한 것이지만 국부의 증진과 기술상의 진보를 더디게 해 조선 경제의 장기적인 발전에 부담을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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