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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주의” 열강과 식민지 한국(1910~1945)

        구대열(Daeyeol Ku) 한국정치사상학회 2004 정치사상연구 Vol.10 No.2

        이 글은 20세기 전반기 국제정치에서 자유주의의 성격을 규정하고 이를 통해 일제시대 한국문제가 논의되는 대외적 환경을 검토하려는 것이다. 이 시기 국제사회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 등 새로운 요소들이 첨가되면서 과거 유럽 중심으로 전개된 국제관계는 이제 세계를 하나의 장으로 하는 국제관계로 변하게 된다. 이 같은 국제환경에서 “자유주의”는 19세기적 의미를 거의 상실하며 나치즘, 파시즘 혹은 사회주의/공산주의 등의 “억압적” 정치체제에 대한 안티테제(antitheses), 과거의 “비도덕적” 국제 관행을 타파하려는 이상주의와 식민지 문제에서 지배와 원주민의 복지증진이라는 “이중적 위임”(dual mandate)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미국과 영국 등 자유주의 열강들은 일본의 대륙진출에서 한반도의 역할, 경제적 이권문제 외에 일본 식민지 통치의 정당성과 지배방식의 공정성, 한국민의 독립/자체 능력 등의 관점에서 일본의 통치와 한국문제를 인식한다. 자유주의 열강들은 이같은 관점에서 일본의 동화주의적 통치방법을 비판하고 한국의 자치권 확대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1930년대 무단통치의 부활로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는 못한다. 이같은 배경에서 열강들은 2차 세계대전 중 한국의 “해방”과 “독립”을 별개의 사안으로 다루며 한국문제는 결국 “신탁통치”라는 방식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This paper deals with the external environment in which the "liberal" powers such as the United States and Great Britain discussed the Korean question during the colonial period of Korea (1910-1945). During this period "ingredients" in liberalism in international politics had been drastically changed from those of the 19th century to such ideas as the antitheses to Nazism, Fascism and socialism/communism, idealism/rationalism sponsored by U.S. President Woodrow Wilson, and the dual mandate by which colonial powers were allowed to exploit natural resources in their colonies while they should pay a more attention to the welfare of native peoples. In this vein, the liberal powers criticized Japanese colonial policies in Korea especially the assimilation of the Koreans to the Japanese and the monopoly of government offices to be detrimental to the welfare the Korean people. Instead, they suggested the enlargement of Koreans' participation in government by means of self-rule, an idea which had been implemented, albeit in a limited scale, from time to time during the 1920s and the early 1930s. When Korea was liberated at the end of World War IT, these powers gave "liberation" to the Koreans but did not allow "independence" under the pretext that the Koreans did not reach to the state of running a modem, independent and viable state.

      • KCI우수등재

        A Damocles Sword? - Korean Responses to the Russo-Japanese War

        Daeyeol Ku(구대열) 한국정치학회 2005 한국정치학회보 Vol.39 No.4

        이 글은 러일전쟁 직전과 직후의 국내외적 상황에 대한 한국 정부와 사회의 반응에 관한 것이다. 일본과 서방측 학자들은 한국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사이 10년간을 유용하게 이용했다면, 그리고 러일전쟁의 발발 가능성과 그 결과를 예견했다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글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이들 사태를 충분히 예견했으며, 그러나 대응정책의 미숙성과 국제정치의 구조적 요인 등에 의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또 개화파 중 일부의 대일인식이 일본의 한반도 점령정책의 변화에 따라 변하고 있음도 보여준다. This paper examines how the Koreans perceived, and reacted to, the international environment at the time of the Russo-Japanese War and the coming of the victorious Japan to the peninsula. The Western powers viewed that Korea was given a “decade” for revitalizing itself but being totally ignorant of the international development, was unable to move in the direction of reform. However, this paper will show that the Korean people and government alike were fully informed of the developments surrounding their country and did their best based on their world outlook and value system, although their prescriptions were not sufficient enough to prevent their country being absorbed by Japan. In addition, this paper describes how Korean attitude toward the Japanese was changing by Japan’s occupation policies.

      • KCI우수등재

        2차 대전 중 중국의 한국정책

        구대열(Ku Daeyeol) 한국정치학회 1995 한국정치학회보 Vol.28 No.2

        본 논문은 2차대전 중 중국의 한국정책을 통해 임정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거두는데 장애가 되는 국제정치의 구조적 문제점들을 검토한 것이다. 중경의 국민당 정부는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함께 전쟁의 부담을 미국에게 떠맞기고 종전 후 야기될 국내외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시작한다. 이것은 변방 지역에 대해 과거 중국이 누렸던 지위를 회복하려는 중화주의적 복귀정책으로 나타나며 미국의 전후 구상과 총돌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한국정책 및 임시정부에 대한 정책도 과거의 지위회복과 소련의 팽창주의 견제라는 틀 속에서 추진된다. 이를 위해 중국은 임정 불승인, 광복군 통제와 삼민주의 교육을 추진한다. 중국은 임정을 승인할 경우 소련이 훈련시키고 있는 2~5만에 달하는 한인들이 또 다른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소련이 이들을 통해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임정을 승인했다면 미국과 영국이 중국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중국의 조치에 맞추어 정책조정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있었으며 소련도 중국과 동일할 행동을 취했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 국민당 정부의 분석이었다. 즉 중국은 해방 후 한국문제에 대한 선태의 폭을 넓게 갖는다는 의도였다. 특히 광복군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광복군이 일본의 항복 후 한국에 진공하는 경우 한국 지배에 이용하려는 야심을 노출시킨다. 중국은 또 국민당의 요인들이 임정을 나누어 담당하고 지원금도 여러 통로로 공급하는 등 분리통치 방식으로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을 관리함으로써 이들의 단결을 저해하면서 이들이 단결하지 못하며 독립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미-영 연합국들에 강조함으로써 서방 열강들이 한국문제를 검토할 때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은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간접적으로 기여한다. 미국과 영국은 중국의 야심에 대해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문제를 연합국 3국의 공동합의에 의해 처리할 것을 확정지음으로써 중국의 야심을 차단하지만 중국은 1945년 초까지 어떠한 방식으로든 전후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1992년 한중 수교 때 대만정부가 중경시절 임정을 지원한 사실을 망각하고 한국이 대만을 배반했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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