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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Effect of Substrate Temperature on the Properties of ITO/TiO2 Bi-Layered Films Deposited by RF Magnetron Sputtering

        공영민,김민규,김대일 대한금속·재료학회 2014 대한금속·재료학회지 Vol.52 No.3

        Sn-doped In2O3 (ITO)/TiO2 bi-layered films were deposited by radio frequency magnetron sputteringunder different substrate temperatures, 100, 200, and 300 ℃, and the effects of substrate temperature onthe structural, electrical and optical properties of the films were investigated. For all depositions, thethicknesses of the ITO and TiO2 films were kept constant at 100 and 5 nm, respectively, by controlling thedeposition times. The films deposited at room temperature showed a relatively low optical transmittance of76.0%, while the films deposited at 300 ℃ showed a higher transmittance of 80.7%, compared to the otherfilms. In addition, the electrical resistivity of the films was influenced by substrate temperature and thelowest resistivity of 3.0 × 10‒4 Ω·cm was observed in the films deposited at 300 ℃. From the experimentalresults, we concluded that increasing the substrate temperature enhanced the optical and electricalproperties of the ITO films.

      • KCI등재

        고감도 ZnO 박막센서의 수소가스 검출 특성 연구

        공영민,이학민,허성보,김선광,유용주,김대일,Kong, Young-Min,Lee, Hak-Min,Huh, Sung-Bo,Kim, Sun-Kwang,You, Yong-Zoo,Kim, Dae-Il 한국재료학회 2010 한국재료학회지 Vol.20 No.12

        ZnO thin films were prepared on a glass substrate by radio frequency (RF) magnetron sputtering without intentional substrate heating and then surfaces of the ZnO films were irradiated with intense electrons in vacuum condition to investigate the effect of electron bombardment on crystallization, surface roughness, morphology and hydrogen gas sensitivity. In XRD pattern, as deposited ZnO films show a higher ZnO (002) peak intensity. However, the peak intensity for ZnO (002) is decreased with increase of electron bombarding energy. Atomic force microscope images show that surface morphology is also dependent on electron bombarding energy. The surface roughness increases due to intense electron bombardment as high as 2.7 nm. The observed optical transmittance means that the films irradiated with intense electron beams at 900 eV show lower transmittance than the others due to their rough surfaces. In addition, ZnO films irradiated by the electron beam at 900 eV show higher hydrogen gas sensitivity than the films that were electron beam irradiated at 450 eV. From XRD pattern and atomic force microscope observations, it is supposed that intense electron bombardment promotes a rough surface due to the intense bombardments and increased gas sensitivity of ZnO films for hydrogen gas. These results suggest that ZnO films irradiated with intense electron beams are promising for practical high performance hydrogen gas sensors.

      • SCOPUSKCI등재

        RF 마그네트론 스퍼터로 증착된 In<sub>2</sub>O<sub>3</sub> 박막의 질소분위기 열처리에 따른 특성변화

        공영민,이영진,허성보,이학민,서민수,김유성,김대일,Kong, Young-Min,Lee, Young-Jin,Heo, Sung-Bo,Lee, Hak-Min,Seo, Min-Su,Kim, Yu-Sung,Kim, Dae-Il 한국재료학회 2012 한국재료학회지 Vol.22 No.1

        $In_2O_3$ films were deposited by RF magnetron sputtering on a glass substrate and then the effect of post deposition annealing in nitrogen atmosphere on the structural, optical and electrical properties of the films was investigated. After deposition, the annealing process was conducted for 30 minutes at 200 and $400^{\circ}C$. XRD pattern analysis showed that the as deposited films were amorphous. When the annealing temperature reached 200-$400^{\circ}C$, the intensities of the $In_2O_3$ (222) major peak increased and the full width at half maximum (FWHM) of the $In_2O_3$ (222) peak decreased due to the crystallization. The films annealed at $400^{\circ}C$ showed a grain size of 28 nm, which was larger than that of the as deposited amorphous films. The optical transmittance in the visible wavelength region also increased, while the electrical sheet resistance decreased. In this study, the films annealed at $400^{\circ}C$ showed the highest optical transmittance of 76% and also showed the lowest sheet resistance of $89{\Omega}/\Box$. The figure of merit reached a maximum of $7.2{\times}10^{-4}{\Omega}^{-1}$ for the films annealed at $400^{\circ}C$. The effect of the annealing on the work-function of $In_2O_3$ films was considered. The work-function obtained from annealed films at $400^{\circ}C$ was 7.0eV. Thus, the annealed $In_2O_3$ films are an alternative to ITO films for use as transparent anodes in OLEDs.

      • KCI등재후보

        1950년대 한국영화와 영화과의 역할: 영화과장 이성철의 구술사례를 중심으로

        공영민 영상예술학회 2011 영상예술연구 Vol.0 No.18

        본고의 목적은 1950년대 공보처 영화과장이었던 이성철의 구술을 통해 공보처 영화과의 역할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보는 것이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어느 시기보다도 열악하고 혼란한 시기였던 1950년대에 공보처 영화과는 검열과 영화수입에 관한 주요 업무를 관장하고, 뉴스․문화영화를 제작하고, 한국영화 정책을 주관하는 영화관련 핵심 기관이었다. 1951년부터 1962년까지 공보처 영화과장으로 근무한 이성철의 구술은 1950년대라는 특수한 상황 속의 공보처 영화과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이성철의 구술은 한국전쟁 시기 공보처 영화과와 영화인 간의 교류과정과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산업 복구과정을 보여준다. 본고는 이러한 모색과 연대의 과정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 또 하나의 구술사례인 이경순과 유장산의 증언록을 활용한다. 두 구술사례의 교차, 비교는 ‘구술되는 이성철’과 ‘구술하는 이성철’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행정가와 영화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혹은 양자를 다 포함하는 구술자의 정체성에 대한 고찰을 가능하게 하고 더 나아가 1950년대 공보처 영화과가 민/관의 구분이 모호한 과도기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는 결론을 유출하게 한다. 또한 본고는 이성철의 구술을 통해 한국영화와 대한원조의 상관관계를 알아본다. 특히 아시아영화제에 관한 구술자의 회고는 기존의 사료와 결합해 원조기구와 영화인 사이에서 공보처 영화과가 조율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본고는 대한원조와 공보처, 그리고 한국영화와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연구하는데 있어 구술사 방법론이 폭넓게 이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KCI등재후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선전 애니메이션과 1950~60년대 한국 국립영화제작소 애니메이션의 관계

        공영민 영상예술학회 2014 영상예술연구 Vol.0 No.25

        그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는 주로 1967년 등장한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신동헌)을 기원으로 하여 산업과 정책의 모순, 기술과 재원의 미비 등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지속성을 갖지 못하고 사회적 요구에 따라 일시적으로 등장했다 사라지는 순환을 반복한 산업적 장르로서 또는 몇몇의 뛰어난 인재에 의해 창조된 작품을 중심으로 다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극영화 중심으로 연구되었던 한국영화사 연구와 마찬가지로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 연구 또한 상업용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단속적 장르 내지는 작가론에 기대는 특수한 개인 성과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1960년대 후반 한국 애니메이션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아야만 하는가? 스펙트럼을 어떻게 넓힐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으로 국가 공보선전의 중심에 자리했던 국립영화제작소의 애니메이션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1950-6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이 국립영화제작소를 중심으로 어떻게 공보선전에 활용되었는지를 밝히고, 이러한 애니메이션들과 후일 등장하는 상업용 애니메이션의 관계를 추적해보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1960년대 후반 <홍길동> 등장 전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등장하였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본다. 이를 위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력해진 애니메이션의 선전성과 국립영화제작소의 애니메이션이 어떤 관계를 갖는지, 이 애니메이션들이 공보선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제작되었는지를 분석한다.

      • KCI등재후보

        1950년대 한국영화와 영화과의 역할: 영화과장 이성철의 구술사례를 중심으로

        공영민 영상예술학회 2011 영상예술연구 Vol.18 No.-

        본고의 목적은 1950년대 공보처 영화과장이었던 이성철의 구술을 통해 공보처 영화과의 역할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보는 것이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어느 시기보다도 열악하고 혼란한 시기였던 1950년대에 공보처 영화과는 검열과 영화수입에 관한 주요 업무를 관장하고, 뉴스․문화영화를 제작하고, 한국영화 정책을 주관하는 영화관련 핵심 기관이었다. 1951년부터 1962년까지 공보처 영화과장으로 근무한 이성철의 구술은 1950년대라는 특수한 상황 속의 공보처 영화과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이성철의 구술은 한국전쟁 시기 공보처 영화과와 영화인 간의 교류과정과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산업 복구과정을 보여준다. 본고는 이러한 모색과 연대의 과정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 또 하나의 구술사례인 이경순과 유장산의 증언록을 활용한다. 두 구술사례의 교차, 비교는 ‘구술되는 이성철’과 ‘구술하는 이성철’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행정가와 영화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혹은 양자를 다 포함하는 구술자의 정체성에 대한 고찰을 가능하게 하고 더 나아가 1950년대 공보처 영화과가 민/관의 구분이 모호한 과도기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는 결론을 유출하게 한다. 또한 본고는 이성철의 구술을 통해 한국영화와 대한원조의 상관관계를 알아본다. 특히 아시아영화제에 관한 구술자의 회고는 기존의 사료와 결합해 원조기구와 영화인 사이에서 공보처 영화과가 조율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본고는 대한원조와 공보처, 그리고 한국영화와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연구하는데 있어 구술사 방법론이 폭넓게 이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This article aims to focus on the role of Bureau of Public Information (BPI) in new perspective through the oral interview of Lee Sung-chul who had been a section head of Film Branch of BPI during the 1950s. During the 1950s, the most deteriorated and chaotic time due to the Korean War and the divided state, BPI Film Branch was the core office where its role was in charge of film censorship, controlled the main process of film import, produced the news reels and non-commercial films and supervised the film policies. Had been Section Head of BPI Film Branch from 1951 to 1962, Lee Sung-chul’s interview offers a guidance to understand BPI Film Branch under the special circumstances of the 1950s. His interview displays the process of interchange between film professionals and BPI Film Branch and the restoration process of Korean film industry of the mid-1950s. This article utilizes the testimonies of Lee Kyong-soon and Yu Jang-san to be in more solid view of the process happened during the 50s. By cross-referencing and comparing those testimonies, it would reveal the difference between ‘the testified Lee Sung-chul’ and ‘the testifying Lee Sung-chul’. And this revelation will enable to examine his identity that is conflicting between as an administrator and as a film professional and/or including both. Furthermore, it will lead to a conclusion that the 50s’ BPI Film Branch was in ambiguous position difficult to differentiate its role between as a private company and as a government office. Also, this article explores the interrelation between Korean film industry and the foreign aid to Korea of the time. In particular, Lee’s recollection on Asian Film Festival shows the mediating role of BPI Film Branch between the aid organization and the film professional with combined reading of preexisted historical materials. As a result, this article proves the vast usage of oral history for the in-depth study on the interrelations among the foreign aid to Korea, BPI Film Branch and Korean film industry of the time.

      • KCI등재후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선전 애니메이션과 1950~60년대 한국 국립영화제작소 애니메이션의 관계

        공영민 영상예술학회 2014 영상예술연구 Vol.25 No.-

        그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는 주로 1967년 등장한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신동헌)을 기원으로 하여 산업과 정책의 모순, 기술과 재원의 미비 등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지속성을 갖지 못하고 사회적 요구 에 따라 일시적으로 등장했다 사라지는 순환을 반복한 산업적 장르로서 또는 몇몇의 뛰어난 인재에 의해 창조 된 작품을 중심으로 다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극영화 중심으로 연구되었던 한국영화사 연구와 마찬가지로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 연구 또한 상업용 애 니메이션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단속적 장르 내지는 작가론에 기대는 특수한 개인 성과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1960년대 후반 한국 애니메이션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아야만 하는가? 스펙트럼을 어떻게 넓힐 것인 가라는 질문의 답으로 국가 공보선전의 중심에 자리했던 국립영화제작소의 애니메이션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1950-6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이 국립영화제작소를 중심으로 어떻게 공보선전에 활용되었는지를 밝히고, 이러한 애니메이션들과 후일 등장하는 상업용 애니메이션의 관계를 추적해보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 에서는 1960년대 후반 <홍길동> 등장 전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등장하였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본다. 이를 위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력해진 애니메이션의 선전성과 국립영화제작소의 애니메이션이 어떤 관계 를 갖는지, 이 애니메이션들이 공보선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제작되었는지를 분석한다. Up until now, the history of Korean animation has been addressed Hong Gil-dong, the first feature length animation made in 1967, as the starting point and discussed the animation as a temporary industrial genre without having consistency due to various reasons such as industrial and political contradiction, inadequate technology and financial resource, and etc., which had repeated cycles of appearing and disappearing only when it was needed by social demand. Another approach would be focusing on some of particular talents and their creations in the industry. Similarly to the study of Korean film history focused on the feature length fiction film, the study of Korean animation history has been also focused on commercial animation and treated as a temporal or intermitted genre, and/or depended on authorship highlighting particular individuals and their works. Then if we try to avoid this fixed notion, where should we look for the origin of Korean Animation of the late 1960s? And how could we widen the spectrum of our historical view? One of the answers can be found by examining animations produced by the National Film Production Center which was stood at the heart of public propaganda during the Cold War era.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reveal how the National Film Production Center utilized Korean animation to public propaganda during 1950s and 60s and trace the relations between its animations and the commercial animations that followed them in later years. Therefore, this article examines how the Korean animation entered to the social scene and what its role was before the appearance of Hong Gil-dong. To accomplish this, it also analyzes the relationship between animations produced at the National Film Production Center and the propaganda characteristics of animation highly strengthened after the World War II. In addition, it also looks at how these animations were produced in the realm of public propag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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