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고구려연구재단과 동북아역사재단의 남·북 역사문화 교류와 성과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2023 東北亞歷史論叢 Vol.- No.80
고구려연구재단과 동북아역사재단의 남북 교류 협력은 불안정한 남북 관계의 속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2004년 설립된 고구려연구재단은 2005년 북측과 남북 공동 학술연구 사업 진행 등의 내용을 담은 ‘남·북 고구려관련 공동학술사업 추진을 위한 합의서’를 체결하였다. 2년의 기간 동안 평양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공동 학술조사, 관련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등 양측이 협력해나가야 할 바람직하고 보편적인 학술 교류의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였다. 2006년 설립된 동북아역사재단은 변화된 정세로 인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2008년 캐나나 밴쿠버에서 열린 ‘동북공정과 고구려’ 국제학술회의에 동북아역사재단과 북측 사회과학원 관계자들이 참여하면서 제3국을 통한 학술교류를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고구려연구재단과 동북아역사재단의 남북 역사문화 교류는 고구려사와 발해사, 일본의 역사교과서, 독도,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분야에서 학술회의 8건, 직간접 발굴조사를 통한 발굴조사 보고서 발간 11건, 북측 연구 성과 출판 1건 등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하였다. 최근 10여 년 동안 변동성이 심했던 남북 정세 속에서 고구려연구재단과 동북아역사재단이 얻은 이러한 성과들은 우리 정부의 남북 역사문화 교류 사업 전체의 수량적 측면에서도 일정 부분을 점하고 있어 기여한 바가 있다고 평가된다.
고광의 백산학회 2016 白山學報 Vol.- No.106
高句麗 建國期에 이미 渾江과 鴨綠江 유역에도 일정하게 한자의 활용이 가능한 세력들이 존재하였고 이들은 고구려의 서사문화 형성의 모태가 되었다. 고구려 초기의 書寫文化는 漢이나 夫餘 등 주변 국가와의 교섭 속에서 발전하였는데, 漢 유민들의 유입과 그들이 이식한 儒敎를 비롯한 陰陽五行 및 兵書 등 다양한 사상이나 서적들이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서사문화는 고구려 초기 체제 정비 등 국정 운영에 적극 활용되었는데, 주변 세력을 통합해 가는 과정에서 賜姓, 군사 활동을 비롯하여 외교 및 국내 일반 행정에까지 다양한 文書를 작성하고 시행하였다. 특히 <黃鳥歌> 같은 詩歌의 창작은 한자의 단순 이해를 넘어 문학적 활용이라는 점에서 고구려 초기의 書寫文化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고구려 초기 文書와 관련하여 ‘巫’, ‘占者’, ‘日者’ 등은 왕의 측근에서 일종의 기록 및 전승 등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고구려 書寫文化 발전에 기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識字層들은 제도화를 거쳐 국정의 전문가 집단으로 형성되었는데, 主簿는 각종 外交文書의 작성과 해독 및 印綬의 관장 등 문서 업무의 최고위 직책이었다. 고구려 초기 서사문화는 통치를 위한 구체적인 법령 시행과 행정 사무에도 폭넓게 활용되었다. 고구려 초기에 이미 다양한 법률이 존재하였고, 범죄에 대한 각각의 법 조항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문서의 활용과 확산은 賑恤과 薦擧 등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업무와 그 담당자는 문서의 작성은 물론이고 유교적 품성과 지적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구려 초기의 서사문화의 기반은 중기 이후 고구려 서사문화의 발전을 이끄는 토대가 되었다. .
고광의(高光儀) 고구려발해학회 2011 고구려발해연구 Vol.41 No.-
본 논문은 2010년 북한에서 발굴 조사된 옥도리 고구려 고분벽화의 화면 배치에 담긴 의미와 일부 도상에 대한 해석, 그리고 편년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옥도리 벽화고분의 안칸에는 도리를 중심으로 벽면과 천장에 각각 현세와 내세를 의미하는 공간이 구현되어 있다. 벽면의 장방생활도나 접객도, 가무도 및 수렵도는 현세의 영화로운 삶을 보여주고, 천장의 연꽃무늬와 화염무늬 등은 내세의 극락정토를 염원한 것이다. 초기의 고구려 벽화가 현실적인 삶을 제재로 그려지던 것에서 점차 내세를 상징하는 관념화된 주제들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옥도리 벽화의 내용 중에서 이른바‘행주치마[앞치마]’처럼 장식된 복식이 눈에 띈다. 이는 동아시아 고대 국가들에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祭服이나 朝服등 禮服에 착용하는 장식품의 일종인‘蔽膝’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폐슬 장식은 평양 지역의 벽화고분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으며, 집안지역의 저고리나 점박 무늬 복식과는 구별되어 제도의 변화 등에서 오는 지역 특색의 복식 양식일 가능성도 있다. 옥도리 벽화의 편년에 대해서 보고서는 4세기 말∼5세기 초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벽화 배치가 현세와 내세로 비교적 뚜렷이 구분되어 주제의 특화가 진행되고, 복식이 집안계와 평양계가 함께 나타나는 점 등으로 보아 5세기 전반의 감신총보다는 늦고 5세기 후반의 안악2호분 보다는 빠른 시기, 즉 5세기 중반으로 편년하였다.
고광의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10 신라문화 Vol.35 No.-
This paper is the fundamental review of Jungseongri Silla monument newly found at Pohang, Gyeongbuk, Korea on May 11, 2009. It tried to decode and interpret the monument through the analysis of the shapes of its letters and then examined the features of calligraphy, operation of variant characters and Zhangfa and judgement of chronicle in order to understand the letter use life of Silla people. It can be considered that the shapes of letters and calligraphy styles have relatively strong characters of Haeseo. But, the meaning of Yeseo or Sinyeche and Haengchoseo was found together and the general calligraphy showed transitional aspect into Haeseo. In particular, this monument showed similar characteristics with the calligraphy of Naengsuri monument or Bongpyeong monument and it suggests that it has the same vein with the calligraphy characteristics of monuments of Silla in the former half of the 6C. Formation of variant characters can be divided into omitting or adding strokes and changing the original letter structure. The use of a variety of variant characters showed that the Silla people at that time didn't end accepting the Chinese character passively but transformed them actively. Zhangfa matched the column but didn't match the line and the letter size was not uniform and had not border. The characteristics of such a Zhangfa were generally found in the epigraph before Jeokseong monument and it suggested transcriptional culture was prevailed at that time when this monument was erected. ‘Sinsa year’ when the monument was erected was considered 501 year as calligraphy, Zhangfa and use of specific letters for official rank were found and there was ‘Sadeokji’ who involved in Naengsuri monument (503 year). in ‘Sinsa year’ when the monument was erected. Therefore, this monument showed the calligraphy naturalized in the Silla society since the mid-5th century and was also very valuable as the earliest stone monument material which can show the letter use life of Silla.
고광의(Ko KwangEui)(高光儀) 백산학회 2014 白山學報 Vol.- No.100
필자는 2004~2005년에 중국 학계를 중심으로 廣開土太王碑 釋文 비교표를 작성한 적이 있다. 최근에는 이를 보완하고 일본과 남북한 및 서구 학계의 석문을 추가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간의 석문에 대한 이견들을 파악하고 논란이 된 글자들을 중심으로 원석탁본의 자형과 비교 검토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본 논고에서는 광개토태왕비 제1면과 제2면에서 새로 판독하거나 기존 다수설과 다르게 석문한 일부 글자들을 소개하였다. 새로 읽은 글자는 1-1-34(제1면 1행 34번째 글자)를 ‘豫’, 1-2-2를 (聿), 1-2-15를 ‘聿’, 1-3-9를 (於) 또는 (祚), 1-7-14를 ‘(祠)’, 1-7-16을 ‘久’, 1-7-24를 ‘貧’, 2-1-22를 (國), 2-2-13을 (祙), 2-5-3을 ‘衘’, 2-6-29를 ‘聆’자 이다. 笔者于2004~2005年曾经做过广开土太王碑释文对比表,主要收录了中国学界的研究成果。最近对释文对比表加以补充,并增加了日本和南北韩以及西欧学界的释文。把握过去对释文的歧见,并以争议文字为中心进行比较分析。 本稿对广开土太王碑第㊀面和第二面的文字作了重新识别,或者对原有的多数学说持不同意见,对㊀些文字重新进行解释。重新解释的文字是,1-1-34(第㊀面第㊀行第34字)为‘豫’, 1-2-2为‘聿’, 1-2-15为‘聿’, 1-3-9为‘於’或者(祚), 1-7-14为‘祠’, 1-7-16为‘久’, 1-7-24为‘貧’, 2-1-22为‘國’, 2-2-13为 ‘祙’, 2-5-3为‘衘’, 2-6-29为‘聆’字。
고광의 한국고대사학회 2004 韓國古代史硏究 Vol.34 No.-
Writings in ink and scenes of writing found in murals of old tombs in the age of the Koguryo verify the actual conditions of transcription culture in those days exactly. Writings in ink have more material values than inscription engraved on stone or metal in that they were written directly by the Koguryo people and scenes of writing depicted on murals vividly and transcription tools show their actual transcriptions. Many researches on the transcription of murals in old tombs have been developed, but the whole examinations of scenes of transcription found in murals have not been conducted. Therefore, this study analyzes the scenes related to transcription of murals in old tombs in the age of Koguryo and examines the transcription culture in those days. Consequently, transcription tools used in actual life iucluding brush, ink, inkstone, piece of wood, silk, paper and baton were continued. These transcription tools were various and excellent in their quality. And, scenes of transcription found in murals of Koguryo showed writing styels and transcription posture in detail. It seems that writing style was Dangu style or Ssanggu style suitable to transcription in those days and transcription posture showed attaching arms to body tightly and corresponded to actual posture of transcription in those days. Shapes of Koguryo brushes depicted on the murals of Anak Tomb #3 and Muyongch'ong reflected the transcribers' habit in those days. This investigation through murals in Koguryo is meaningful in that it is a new finding of actual materials showing the transcription culture of those days in the research of ancient history of Korea with the lack of records and relics related to transcription culture.
고광의 고구려발해학회 2010 고구려발해연구 Vol.36 No.-
본 논문은 고구려 역사문화와 관련된 중국의 관광산업 전략과 관광지 개발, 유적의 보존 현황, 그리고 관련 박물관의 전시 상황을 통해 그에 따른 문제점을 짚어본 것이다. 中國 吉林省‘十一五’계획에 반영된 한국 역사문화 관련 관광산업 전략과 集安市에서 진행되고 있는 역사문화 도시 건설 상황을 살펴보았다. 특히 집안시를 특화된‘고구려 역사문화 도시’로 건설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들이 중앙과 지방 정부 차원에서 수립되어 실행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는데, 먼저 유적의 관광지 개발에 따른 보호와 보존 대책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특히 五女山山城, 國內城, 丸都山城, 太王陵, 廣開土王碑, 將軍塚, 五灰墳五號墓 등은 조급하게 개발되어 역사상이 충분히 복원되지 못하고 원형이 왜곡되거나, 관람객의 수요 증가에 따른 물리적 훼손이 심각한 상태이다. 고구려 역사문화를 활용한 관광상품 개발 역시 충분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아, 오히려 고구려 역사문화 이미지를 훼손할 우려가 크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박물관 등을 통해 고구려사를 직접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각지에서 개관되는 관련 박물관들은‘高句麗는 中國 東北의 少數民族 地方政權’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도시의 국가급 대형 박물관에서부터 중소 도시의 유적공원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에게 교육 및 홍보함으로서 고려사의 중국사 만들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을 통해 필자는 중국의 고구려유적 개발 및 역사왜곡 따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강조한다. 고구려사에 대한 진지한 학술 논의를 통해 공동의 인식을 형성하고, 현장의 공동조사 및 발굴, 유적과 유물의 복원 및 보호 대책의 강화 등을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