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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체제기 일본 내 조선인 탄광 노동자의 노동 통제 실태와 임금 수탈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침략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와 노동력을 수급하기 위해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을 공포하였다. 국가총동원법의 공포와 함께 실행된 총동원체제는 조선인들에게 노동력 동원의 법적 근거를 부여하였고, 이는 일제의 침략전쟁수행을 위한 물적ㆍ인적 물자의 통제와 운용, 국민징용과 노동조건의 규제, 그리고 언론 통제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국가통제를 가능케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국가총동원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강령은 칙령으로 이를 정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물자 수급과 조정, 단체 협력, 국민징용, 노사협조를 위한 노동쟁의 방지, 고용제한, 수출입 통제, 물자 사용·수용(收用)자금 수급 조정, 공장시설 등 수용, 광업권 제한, 물가통제, 출판 제한·금지 등과 같은 사회전반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다. 이후 1939년에 들어서자 일본 정부는 ‘국민징용령(國民徴用令)’과 ‘가격 등 통제령(価格等統制令)’ 등과 같은 주요 칙령을 잇따라 발령하면서 국가전시체제의 영향은 식민지민의 경제생활에 깊숙이 침투하였고,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인적 자원의 통제와 전시동원을 본격화하였다. 전시동원의 본격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전장의 확대와 장기화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수물자의 생산성 증강을 요구하였고, 이에 일제는 일본 내 부족한 노동력을 조선인을 동원ㆍ배치하여 이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모집(募集)’과 ‘관알선(官斡旋)’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된 조선인 노동력 동원은 일본대자본과 식민지 행정력이 투입된 강압적 행위였다. 이후 전황이 악화될수록 노동력 동원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일본 정부는 경찰력을 투입하여 노동력 동원을 지속하였고, 지방의 말단 행정에서는 식량배급의 불이행이나 촌락 내 자본ㆍ계급 차이를 이용하여 노동력 동원을 충당하였다. 이렇게 동원된 조선인들은 일본 내 탄광이나 군수회사의 작업장으로 배치되거나 동남아시아, 또는 사할린 지역으로 동원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는 1937년 전시체제기 이전부터 식민지의 노동력 활용에 대한 고민에 따른 조사를 실시하였다. 식민통치 초기인 1910년에는 원활한 식민지 통치를 위한 조선인 신체 조사나 인류학적인 측면으로 인식ㆍ접근하였지만, 1920년대 공업화의 진행과 함께 조선인들이 일본 본토로 유입되면서 노동자로서의 조선인으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해당 시기의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조사는 노동력과 그에 따른 통제에 대한 조사가 아닌 일본 사회 내 관리해야 할 계층으로서, 게으르고 더러운 인종집단으로 인식ㆍ처우하였다. 하지만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제국의 영역을 확장함에 따라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만주국 운영을 담당하던 국책회사였던 만철은 그 하위기관인 경제조사부와 흥중공사를 통해 조선인과 일본인, 그리고 중국인 노동자들의 노동능력을 수치화하여 조사를 진행하였고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능률적인 활용과 관리ㆍ통제 방법을 모색하였다. 만철의 조사에 따르면 조선인과 일본인, 그리고 만주인 노동자들의 노동능력은 신체적 조건이나 작업태도에 따라 노동능률에 조금씩 차이가 나고 있음을 밝혀냈다. 다만 식민지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선 언어나 생활 문화 차이에 의한 어려움이 존재하였고, 이는 노동 관리와 통제의 필요성을 제시하면서 노동시장에서 일본인 노동자의 입지에도 영향을 줄 것임을 예측하였다. 이러한 만철의 조선인 노동자의 노동능력 조사는 제국 운영의 방침과 필요에 따라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증거임과 동시에 조선인 노동력 사용을 위한 사전 조사작업이었다. 이후 조선인 노동자들은 전시체제기 동안 일본 내 군수사업장에 본격적으로 동원ㆍ유입되었고, 이들은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에 활용되었다. 전시체제기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침략전쟁 수행에 필요한 노동력을 조선인 노동력 동원을 통해 수급하고자 하였다. 특히 중국과 태평양 지역으로까지 전황이 확대되고면서 장기전 양상에 의해 군수물자의 지속적인 생산요구는 이를 실제적으로 생산하는 일본대자본에게 수행토록 하였다. 이에 ‘국가총동원법’에 의한 일본대자본의 전쟁 수행은 이윤창출이라는 기업의 본래적 요구와 함께 적용되었고, 이는 조선인 노동자에게 차별적 저임금체제와 억압적 노동 관리ㆍ통제라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인 노동자에 하여금 일본 정부의 국가적 전쟁 수행과 일본대자본의 이윤창출이라는 부담을 전가시켰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리야마채탄의 조선인 노동자 관리담당자의 증언과 다이쇼광업의 임금표는 일본대자본이 행정력을 통해 강제동원한 조선인 노동력 수탈 실태를 보여준다. 1937년부터 본젹적으로 조선인 탄광 노동자를 동원하기 시작한 이리야마채탄은 1944년 기준 4,000여명의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있었고, 이들은 대부분 갱내 작업에 투입되었다.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광부로서 일본인 숙련 탄광 노동자인 사키야마와 조를 맞춰 갱내로 투입, 채탄작업에 동원되었다. 작업 이후에는 아오바구에 설치된 기숙사에서 기거하였는데 이들은 일본인 기숙소장의 엄격하고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감금에 가까운 생활을 하였다. 이리야마채탄은 기숙사에 거주하는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에 대하여 폭력을 통해 도주방지와 생활 통제를 하였고, 도망가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조선인에 대해서는 지역 경찰과 협업하여 통제하였다. 또한 임금조차 제대로 지불되지 않았고, 식사나 치료조차 미비하여 전염병이나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노동자나 포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리야마채탄의 조선인 탄광 노동자 동원과 통제는 강제적이며 착취적인 노동환경 속에서 이루어졌고, 이는 조선인 탄광 노동자에 대한 임금과 노동력 수탈로 이어졌다. 한편 큐슈 치쿠호탄전에 자리잡은 다이쇼광업 역시 전시체제기 이후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을 동원ㆍ관리하였다. 다이쇼광업은 탄광 노동자의 근무년수나 숙련도와는 상관없이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을 일본인 탄광 노동자와는 차별적인 임금체계 속에서 채탄작업에 동원하였고, 이는 임금수탈로 이어졌다. 또한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은 같은 작업을 하더라도 일본인 탄광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시간동안 작업에 투입되었음에도 산정된 임금은 일본인 탄광 노동자들의 그것보다 적은 양상을 보여준다. 특히 공제내역에서는 민족간 임금 차이가 나타나는데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은 일본인 탄광 노동자들과는 달리 더 많은 공제내역과 공제금이 할당되었고, 이는 직역저금이나 국채저금, 배식비나 유부비와 같은 명목의 내역을 통해 임금의 상당액이 공제되었다. 이러한 차별적인 임금체계는 일본탄광대자본으로 하여금 조선인 탄광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노동수당을 들이며 채탄생산비용을 낮추는 대신 생산량을 증가시키려 했고, 이는 조선인 탄광 노동자에 대한 임금수탈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조선인ㆍ일본인 탄광 노동자의 차별적 임금체계 속에서 조선인 탄광 노동자의 낮은 인건비를 통해 침략전쟁 수행에 동원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전시체제기 조선인 노동력 동원은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식민지 조선에서 실행된 적극적ㆍ강제적 노동력 수탈이었다. 일제는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근본적 필수요소였던 노동력을 식민지 조선인을 통해 수급ㆍ동원하였고,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강제적인 식민행정과 착취적인 일본대자본의 노동 관리ㆍ통제를 실행하였다. 이는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운영과 전쟁수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노동력을 저임금체계와 동원행정을 통해 이루어진 식민 지배의 본질이었다. 이러한 전시체제기 조선인 노동력 동원은 식민지 조선의 산업과 사회의 근간이 되는 인적자원의 말살과 수탈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 해방 이후의 한국 사회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도시철도 운영 효율화를 위한 정차시간 예측 모델 개발 : 도시철도 운영 효율화를 위한 정차시간 예측 모델 개발
강필구 국립한국교통대학교 교통대학원 2025 국내석사
서울도시철도는 서울시와 주변도시들을 연계하여 광역 수송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신속성과 안전성, 정시성이 크게 요구되어 지고 있다. 또한 대량수송이 가능하고 지하구간을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공해유발이 적으며, 공간 효용성을 극대화 할 수 있고, 고밀도 운전을 통해 많은 승객들이 이용하는 대중교통 수단으로 자리하고 있다. 서울도시철도 신림선은 가장 최근인 2022년에 개통된 무인운전 고무차륜 경전철이다. 또한 한국형 무선기반 신호시스템(KRCTS)이 탑재되어 정시운전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기에 본 연구에서는 최근에 개통한 신림선의 정차시간 지연에 대해 확인하였다. 이를 통해 도시철도의 표정속도 예측 및 열차운행계획을 수립할 시 중요한 변수가 되는 정차시분의 추정모델에 대해서 연구하고, 기존 정차시분 추정모델과 다른 방식의 시계열 예측모델을 활용하여 정차시분을 예측하고 비교하였다. 기존 방식의 경우 정거장/시간대별 유출입 승객수와 환승정거장의 환승객 수의 시간대별 데이터를 입력하여, 각 정거장에서의 정차시분을 분석하였고, 다른 예측모델의 경우 실제 정차시분 데이터값을 이용한 추정모델을 구성하여 분석하였다. 또한 정차시분 데이터를 기반으로, 예측모델간의 비교를 통하여 정차시분 예측 모델의 장단점을 비교할 수 있었다. 본 논문의 연구 성과는 현재 가장 최근에 개통된 신림선의 사례를 참조로 향후 서울도시철도내 주요노선 구간의 정차시분을 구분하여 최적의 정차시간을 설정하는 추정모델을 구성하는데 참조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The)Study of PI-PSCOF Mode for the Flexible Display
최근 평판 디스플레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기존의 유리 기판을 사용한 액정 디스플레이 대신 좀 더 가볍고, 얇으며, 유연하다는 장점을 갖춘 플라스틱 기판을 이용한 액정 디스플레이가 주목을 받고 있다. 플라스틱 기판을 사용한 액정 디스플레이는 앞으로 그 장점들을 기반으로 각종 가전제품과 전자시계, 스마트카드 등에 적용되어질 전망이며 또한 종이처럼 둘둘 말아 휴대할 수 있는 플렉서블 디스플레이는 저장기능과 표시기능 뿐 아니라 실시간의 네트워크 기능을 구현함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정보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시대를 현실화시킬 전망이다. 그러나 플라스틱을 기판으로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단점인 외부에서의 물리적 충격에 의한 액정분자의 배향에의 불안정성 때문에 아직까지 실용화에 어려움이 많은 실정이다. 본 논문에서는 플라스틱 기판을 사용한 디스플레이에서의 외부 충격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패턴 된 마스크를 덥고 자외선을 조사하여 상하 플라스틱 기판사이에 고분자를 이용한 격벽을 쌓는 Pixel-Isolated Mode를 사용하였고 분리되어지지 않고 액정과 석여 있는 잔여 고분자들 때문에 전기/광학적인 특성이 떨어지는 점을 개선하기 위해 다시 그 위에 자외선을 조사하여 잔여 고분자들을 상 분리에 의한 방법으로 제거하는 Phase Separated Composite Organic Film Mode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과정들은 액정과 고분자의 비율을 각각 달리하여 실험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최적의 비율과 최적의 자외선 세기를 찾아내었다. 이렇게 제작된 각 비율별의 샘플을 SEM을 이용하여 단면의 모습을 확인하였으며 고분자를 이용하여 격벽을 만든 샘플과 그렇지 않은 샘플들의 전기/광학적인 특성과 충격에의 안정성을 각각 비교 분석 하였다.
(A) Study on all solution processed organic light emitting diodes
We have studied OLED device fabrication using solution processes. As we fabricated the green phosphorescent OLED device for the solution process, we could improve the current efficiency of the device by about 15% from 61.6 cd/A to 72.7 cd/A by optimizing the interface between the cross-linkable HTL and EML. In addition, we found that the efficiency of blue phosphorescent devices increased when we did not introduce cross-linkable HTLs, while fabricating Blue phosphorescent OLED devices for solution processes. Finally, OLED devices were fabricated to utilize the all solution process. By introducing the inverted structure, GraHIL, and CGL, we were able to fabricate a Yellow device with stability and maximum current efficiency of 17.5 cd/A.
일제의 전시체제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분석 : 대구광역시 강제동원 피해신고자를 중심으로
1937년 노구교사건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에 돌입한 일제는 전장을 확대해 나갔다.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면서 일제는 총동원체제를 구축하였고, 이후 전선이 동남아와 태평양까지 확대되면서 인적ㆍ물적 자원의 수요가 늘어났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총동원체제를 수립하여 인적ㆍ물적 자원의 수탈을 종전때까지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일본 내 공장과 탄광으로 배치되어 전쟁 물자를 생산하였다. 일제는 강제동원한 조선인들에게 저임금이나 무보수, 처우 차별 등과 같은 노동력 수탈을 통해 군수물품을 대량생산 할 수 있었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제의 대표적인 노동력 수탈이었다. 기존의 강제동원 연구는 관련 법령과 제도에 초점을 두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례분석을 통해 강제동원의 실태를 밝히려는 연구는 미미하다. 강제동원의 실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련 법령과 제도 연구와 함께 사례연구가 필요하다. 이에 본 연구는 ‘대구광역시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 신고된 자료를 분석하여 강제동원의 실태를 파악하였다. 사례연구에 의한 강제동원의 실태연구는 일제가 저지른 식민지 조선의 노동력 수탈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며, 과거 청산을 위한 중요한 작업이다. 일제는 1939년 7월 8일 일본에서 국민징용령(칙령 451호)을 공포하였다. 뒤이어 조선에서도 동년 9월에 공포하였다. 이후 일제는 전쟁이 확대되자 국민징용령을 네차례 개정하였다. 일제는 전황에 따라 필요에 의해 개정하였고, 주요 내용은 노동력 동원의 확대였다. 전쟁 말기에는 패전이 가까워지자 일제는 전면적인 강제동원을 실시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는 징병정책도 실시하였다. 미나미 지로는 조선인의 육군지원병제도를 도입하려 했으나 병역법과 실정법의 법적 모순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이후 일제는 병역법을 수정하면서 조선인의 징병을 확대하였다. 일제는 1939년 국민징용령을 공포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강제동원을 실시하였지만, 조선인 강제동원은 이전 시기에도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조선총독부는 기업의 노동력 공급신청을 받았고, 이에 필요한 노동력 충당은 지원자에 한해 관알선으로 실행되었다. 하지만 기업의 노동력 수요를 채우기 위해 일제는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이후 국민징용령이 공포되면서 조선인 강제동원은 합법성을 지니게 되었고, 동원방법과는 상관없이 마을마다 할당된 인원수만 충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일제는 근로보국대도 운영하면서 모집과 관알선, 징병으로 부족해진 농촌에서의 노동력을 충족하였다. 이것들은 각기 독립된 정책이 아닌 노동력 동원을 위한 유기적으로 연결된 정책들이었다. 한편 조선 민중들은 도피를 통해 일제에 저항을 했으나 주변인들에게 갈 피해가 염려되어 빈번히 실패하였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경부선을 통해 부산으로 이송된 후, 배를 타고 일본이나 남양군도로 이송되었다. 일본의 주요 탄광, 군수공장, 그리고 노역장으로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은 각 동원지에서 힘들게 생활하였다. 피해자들은 약속된 임금은 고사하고 무임금으로 노역당했고, 부족한 식사로 인해 항상 굶주렸다. 탄광에서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위험한 막장에서 일하다가 붕괴사고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리고 작업량이 충분치 않을 경우 피동원자들은 빈번히 감독관에게 구타를 당하였다. 이는 군수공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임금은 약속보다 적거나 전무하였고 주거나 의복, 식생활은 넉넉하지 못했다. 특히 군수공장은 미군의 공습목표로 지정되어 여러 차례 폭격을 당했다. 이로 인해 많은 조선인 피동원자들이 사망하는 사례가 많았다. 남양군도로 이송된 피동원자들은 대부분 군속으로 군부대 관련 시설을 설치하는데 동원되었다. 하지만 최전선이었기에 미군과의 전투나 공습으로 인해 수많은 조선인 피동원자들이 사망하였다. 무엇보다 피동원자들은 식량부족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다. 동원지에서도 피동원자들은 도피를 하면서 강제동원에 저항하였고, 도피 이후에 귀환한 경우도 발생했다. 해방 이후 피동원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귀환하였으며 남양군도로 배치된 피동원자들은 미군을 통해 귀환하였다. 일제가 실시한 강제동원 관련 법제와 제도는 강제동원을 위한 합리화와 명분에 불과했다. 일제는 표면적으로 조선의 근대화와 내선일체를 통한 조선사회의 발전을 추구했다고 했지만, 그 실체는 조선인과 조선사회를 자신들의 침략전쟁으로의 동원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 앞으로도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 연구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이면을 정확히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The Empire of Japan, shortly after entering into the Second Sino-Japanese War (1937-1945) upon the Marco Polo Bridge Incident (also known as the Lugouqiao Incident), expanded their battlefields and established a full-scale requisition system. As the front expanded to the Pacific and South East Asia, demand for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increased greatly, and in order to satisfy such demand, the Japanese intensified their requisition system by exploiting and plundering the human and natural resources in Korea. Thousands of Koreans, mobilized against their will were deployed in coal mines and factories in Japan to produce war materials. The Imperialist Japanese Army was able to mass-produce war supplies through their low-wage, no-wage and other various discriminatory policies. Such forced mobilization of the Koreans is a classic example of the Japanese Colonial Exploitation Policy. Existing studies on the forced mobilization of Koreans by the Japanese focus on the laws, decrees and ordinances related to the requisition system. Little has been done to expose the actual conditions of the forced mobilization through case studies. In order to fully and accurately disclose the real conditions of the forced mobilization, studies must be done two-fold: one on the laws and policies implemented and the other on the cases or the mobilized victims' reports. This research paper analyses various cases and claims reported to "The Truth Commission on Forced Mobilization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in Daegu." Such analysis is crucial not only to reveal the truth about the wartime forced labor but also to move closer to the liquidation of Japan's past crimes. Japan proclaimed the national requisition law domestically on July 8, 1939 and in September of the same year promulgated a similar law in Korea. As the War progressed and expanded, they amended the law four times in order to cope with the changing situations. Mobilization of labor and its expansion were the main subjects of amendment. Near the end of the War, Japan carried out a sweeping mobilization in order to change the course of the battles. Japan also implemented a conscription policy. Jiro Minami,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ried to adopt army volunteer program but the enforcement of the program was postponed due to the inconsistencies between the military service law and the positive law. Later, the Japanese government amended its military service law and expanded the conscription of Koreans. Even though the Japanese proclaimed the national requisition law against Koreans in 1939, forced mobilization had been conducted well before the promulgation. In 1937 when the Second Sino-Japanese War broke out, the Government-General accepted labor supply requests from Japanese companies, and the manpower supply was met through the "volunteer" system in which the Korean laborers were given disadvantages if they "chose" not to volunteer. Later when the Japanese proclaimed the national requisition law, the forced mobilization of Koreans became legal and each village had to supply a certain allocated number of people regardless of the means of mobilization. Moreover, the Government-General operated the Labor Patriotism Unit System in order to fill up any manpower shortages. All of the systems above were intimately connected policies implemented only to mobilize Koreans against their will. The victims of forced mobilization tried to resist such systems by escaping but to little avail. The Korean workers of forced mobilization were sent to Busan from which they were transferred to Japan or the South Sea Islands by ship. Having to work in coal mines, munitions factories and other workhouses, the victims lived under abject conditions. Not only did they work without any wages, but they also had to suffer from hunger. Many lost their lives in various accidents in coal mines. If they did not meet their share of workload, Japanese superintendents beat them often. Life in munitions factories was worse. As the factories were often military targets of the US armed forces, Koreans always had to work under the fear of air-strikes, and in fact many lost their lives from the bombing. Those who were transferred to the South Sea Islands worked in army bases to build military facilities, but because the Islands constituted the frontline, many were killed in battles and air raids by the U.S. Shortage of food was a serious problem as the victims constantly suffered from starvation. Koreans in the South Sea Islands also tried to resist the forced mobilization by running away from the frontline. Some successfully returned home after the War with the help of the U.S. troops. The laws, policies and systems proclaimed, implemented and enforced to mobilize Koreans from 1938~1945 are nothing but Japan's attempt to rationalize and self-justify its conduct. On the surface, the Japanese claim to have sought and promoted progress of the Koreans through modernization and the Naeseon Ilche or 'Korea and Japan are One' policy. However, in reality the Japanese only tried to exploit Korean manpower for their war of aggression. More studies must be done about the forced mobilization of the Koreans by the Japanese during this period in order to accurately expose and correctly understand the hidden side of the Japanese Imperialism.
강필구 Graduate School of Dankook university 2017 국내석사
The aims of this study was conducted to search functional activity for the hydrolysates of whey protein concentrate by two kinds of commercial proteases; Alcalase 2.4L and Neutrase 0.8L. To produce hydrolysates, enzymes were added to 10% (w/v) whey protein concentrate (WPC) solution in the proportion 1:50 (w/v, protein) and then made a reaction each of them for 30 to 240 minutes every 30 minutes. The degree of hydrolysis (DH) of Alcalase 2.4L hydrolysates was shown the highest (22.02%) in WPC solution. The protein profiles of WPCH used to compare the hydrolysis development by Alcalase 2.4 L and Neutrase 0.8 L has specifically peptide bands 6 and 11 kDa, 11 and 15 kDa, respectively. In FPLC system, peptides produced by WPC hydrolysates (WPCH) of treated Alcalase 2.4L and Neutrase 0.8L has separation of seven and five fractions with fraction 1 is β-Lg, F3 is α-La were determination in SDS-PAGE, and other fractions were unknown peptides, respectively. The separation of WPCH generated by fraction 6 hydrolysis by Alcalase 2.4L (F6(A)) and fraction 5 hydrolysis by Neutrase 0.8L (F5(N)) had the highest antioxidant activities (FRAP, ABTS, Hydroxyl radical) 37.24±3.17, 159.17±6.21, and 189±8.03 mM and 42.71±5.33, 137±7.82, and 132±2.95 mM, respectively. And comparison of calcium assimilation determined F6(A) was 7.32±0.88 mg/dL and F5(N) was 8.01±1.07 mg/dL. The anti-inflammatory effect was confirmed from all WPC hydrolysis by enzymes (Alcalase, Neutrase) the molecular pharmacology basis of its anti-inflammatory effect is revealed in this test, each fractions from WPCH were studied in LPS (Lipopolysaccharide)-activated mouse macrophage cells (RAW 264.7) as an established inflammation model. As the results, we found that in the range of each fractions peptides concentrates without showing cytotoxicity, F6(A) and F5(N) produced a remarkable anti-inflammatory effect and showed a dose-dependent inhibitions of LPS induced NO production. Compared with F6(A) and F5(N) has potency and action of NO inhibition. In manufacture of yogurt added WPC hydrolysis by alcalase, WPC hydrolysis by neutrase, non hydrolysis WPC and CPP fermentation lactobacillus casei DK128 isolated from Kimchi. Antioxidant and comparison of calcium assimilation results showed that added WPCH could be alternative source for low cost material instead of CPP in yogurts. The results suggest that whey protein possibly has the potential to be used as the raw material to produce the calcium binding peptides, antioxidant activity and anti-inflammatory effects as dietary supplements for functional foods. 이 연구의 목적은 농축 유청 단백질의 가수분해물에 대한 기능적 특성을 탐색하기 위해 수행하였다. 가수분해물을 생산하기 위해 10% (w/v) 농축 유청 단백질에 효소를 1:50 (w/v, 단백질기준) 의 비율로 첨가하여 240분 동안 30분마다 시료를 채취하였다. 가수분해물의 가수분해도는 Alcalase 2.4 L를 사용한 경우 22.02%로 가장 높았다. 가수분해물의 단백질 분해 패턴을 확인하기 위해 SDS-PAGE를 진행하였으며, Alcalase 2.4L를 첨가한 시료에서 6, 11 kDa 그리고 Neutrase 0.8L를 첨가한 시료에서 11, 15 kDa의 특이적 펩타이드가 관찰되었다. FPLC 시스템으로 가수분해물을 정제한 결과, Alcalase 2.4L를 첨가한 시료는 7개의 펩타이드가 확인되었으며, Neutrase 0.8L는 5개의 펩타이드가 확인되었다. 두 효소를 이용하여 획득한 펩타이드의 F1은 β-Lg, F3은 α-La로 SDS-PAGE 결과 확인되었으며, 나머지 펩타이드들은 알려지지 않은 미확인 펩타이드이다. Alcalase 2.4L와 Neutrase 0.8L를 이용한 가수분해물의 분획물 중 Alcalase의 분획6 (F6(A))과 Neutrase의 분획5 (F5(N))에서 가장 높은 항산화 활성 (FRAP, ABTS, Hydroxyl radical)을 각각 37.24±3.17, 159.17±6.21, 189±8.03 mM 그리고 42.71±5.33, 137±7.82, 132±2.95 mM 의 결과값을 얻을 수 있었다. 유리칼슘 함량 또한 F6(A)와 F5(N)에서 7.32±0.88 mg/dL 과 8.01±1.07 mg/dL 로 가장 높은 칼슘 결합능을 나타냈다. 또한, 가수분해물이 대식세포에서 LPS 에 대한 항염증 효과를 검증하고자 모든 분획물을 농도 별로 첨가하여 확인하였다. 그 결과, 세포 독성을 나타내지 않는 농도 범위에서 F6(A)와 F5(N)은 현저한 항염증 효과를 나타내었고, LPS-유도 NO 생산량 또한 농도가 높아짐에 따라 유의적으로 증가하였다. 가수분해물의 상업적 활용 가능성을 검증하기 위해 가수분해하지 않은 농축 유청 단백질, 케이신 포스포펩타이드, Alcalase 가수분해물 그리고 Neutrase 가수분해물을 5%(v/v, 200mg/mL, 단백질)로 첨가한 뒤, 김치 유래 유산균인 lactobacillus casei DK128을 스타터로 접종하여 제조하였다. 그 결과, Alcalase 와 Neutrase 를 사용하여 농축 유청 단백질을 가수분해 할 경우 항산화능 및 칼슘 결합능이 증가하였으며 이는 케이신 포스포펩타이드 대체 물질로 사용 될 수 있는 낮은 가격의 기능성 첨가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