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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沿海州 세형동검 관계유적의 고찰

        姜仁旭(Kang, In-Uk),千羨幸(Cheon, Seon-Haeng) 한국상고사학회 2003 한국상고사학보 Vol.42 No.-

        본고에서는 1960년에 보고된 러시아 연해주 소재 이즈웨스토프까 유적에서 출토된 세형동검반출 유적을 검토하고 더불어 새롭게 알려진 연해주 지방에서 출토된 세형동검 관련 유적?유물을 살펴보았다. 필자들의 조사를 통해서 이즈웨스토프까 유적 이외에도 쉬꼬또프까, 말라야 뽀두쉐치까, 올레니 유적 등에서 세형동검 관련 유물이 발견되었음이 밝혀졌다. 또 새롭게 확인된 이즈웨스토프까 유적 출토의 토기를 통해서 이 유적이 연해주 초기철기시대에 존재했던 끄로우노프까문화에 속함을 밝혔다. 이즈웨스토프까 유적을 포함한 연해주의 세형동검관련 유적은 모두 피터대제만과 아무르만으로 흐르는 쉬꼬또프까 강과 아르떼모프까 강의 하류에 집중 분포한다. 이즈웨스토프까 출토 청동기의 합금비율은 납과 주석이 각각 6%, 3% 내외로 한반도를 비롯한 다른 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합금비율을 보인다. 한국의 세형동검관련 유물과 비교할 때 이즈웨스토프까 유적은 세형동검문화의 초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3세기 중반 경으로, 쉬꼬또프까 유적은 세형동검문화의 말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세기 중~후반으로 편년할 수 있다. 전기와 후기의 세형동검이 모두 발견되며 단편적이나마 연해주에서 세형동검 관련 유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그 위치가 연해주의 남부 해안가에 집중된다는 것은 향후 한국과 연해주의 기원전 3~0세기의 문화교류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The Izvetovka site was found in 1959 by a excavator near the village of Maikhe Primoire Krai, Russia, and the found materials, included slender daggers(細形銅劍) was reported by russian archaeologist in 1960. Because of lack of information about this site, the Izvestovka was undervalued in korean archaeology. In this study, authors reexamine the Izvestovka and another related sites with the view to correlation with korean peninsula and publish newly measured drawings. Nowdays, in the Primorie krai(or maritime region) of Russia were found weveral wites related materials of slender dagger culture. All that sites are belonged to Krounovka culture, dated from 3th c. B.C. to first part of 1st c. A.D.. Contrast to previous Yankovski culture(or shell midden culture), Krounovka culture was based on agricultural economy, which are believed to be influenced from Manchuria and Korea. It is worth to remind that most of these sites are concentrated on the lower basin of Artemovka and Shkotovka rivers, near the East Sea. The composition of bronze implements from Izvestovka were identified as 90% Cu, 6% Pb, and 3% Sn. This portion is characterized to almost bronze from Primorie. Furthermore, bronze from the metallurgical site Petrova, regarded as Krounovka culture had the same portion. Based on the typological analysis of bronze implements, Izvestovka site are dated to the middle of 3th century B.C., and Shkotovka are in the second half of 1st century.

      • KCI등재

        三江平原 滾兎嶺ㆍ鳳林문화의 형성과 勿吉ㆍ豆莫婁ㆍ靺鞨의 출현

        강인욱(Kang In Uk) 고구려발해학회 2015 고구려발해연구 Vol.52 No.-

        본 고에서는 기원전 2세기~서기 5세기의 삼강평원의 곤토령문화와 봉림문화의 고고학적 문화를 중심으로 그 계통을 살펴보고, 그들의 성립 및 소멸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와 같이 사서에 기록된 각 민족의 시공적인 범위를 선험적으로 규정하고 그에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을 맞추는 중국학계의 연역적인 접근을 통하여 삼강평원=읍루설은 실제 고고학자료와 배치됨을 밝히고, 삼강평원의 곤토령을 읍루, 봉림문화를 물길로 인식할 경우 이후에 발흥하는 말갈문화와 고고학적 문화에서 보이는 차별성을 설명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본고에서는 삼강평원에 사람들이 집약적으로 거주하는 기원전 2세기~서기 6세기를 전기단계인 곤토령문화시기(기원전 2~서기 2세기), 발전기인 봉림문화시기(기원전 2~5세기), 그리고 말갈계문화로 전환되는 물길-두막루단계(서기 6~7세기)로 나누었다. 전기의 곤토령문화의 고고학적 문화상은 목단강유역의 東興文化, 부여문화(포자연문화), 연해주의 團結문화(=올가문화) 등과 가까운 바, 옥저계의 문화가 북상해서 삼강평원에 안착된 결과로 보았다. 또한, 이들 유적은 폴체계문화와는 다른 계통으로 이렇게 옥저계문화가 북상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삼강평원이 상대적으로 북쪽에 고립되어 있는 고위도지방이며 저지대이지만, 농업생산력이 아주 높은 흑토지대라는 점 등을 들었다. 그런데 곤토령문화에는 폴체문화의 요소들도 적지 않으며, 삼강평원의 동부지역에도 폴체문화의 일종인 완연하 유형이 존재하는 바, 추위에 대한 적응잠재력이 큰 옥저계 주민들이 북상하여서 남하한 폴체계 집단 일부와 융합하여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발전기인 봉림문화 단계에 삼강평원에 고환경 자료로 볼 때에 사람들의 적극적인 개간사업 등으로 소택지가 줄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의 또한, 집약적인 농경으로 사회를 유지했기 때문에 사회의 복합도가 증가하며 인구도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 송눈평원 지역은 부여계의 유적이 급감하고 대신에 유목계의 문화가 들어오는 것과 정반대의 상황이 된다. 봉림문화가 사라지는 5세기말~6세기는 일종의 전환기로 옥저계문화가 말갈계로 교체되는 시기로 사서에 물길과 두막루가 등장하는 시기로 대표된다. 이후 6세기 이후에는 삼강평원의 서부의 동인유형 및 아무르강 일대의 나이펠드 등 만주 북부 전역의 문화는 말갈문화계통으로 재편되었다. 이후 이 지역의 판도는 말갈계문화로 재편되게 되었고 삼강평원 지역의 봉림문화는 사라지고 이후 여진세력이 진출하기 전까지 이 지역은 공동화가 된다. 이와 같이 본 고에서는 고고학 자료를 근간으로 하여 사서, 고환경 자료, 민족지자료 등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을 한 결과, 삼강평원의 고대문화 전개는 고대 옥저계문화의 확산 및 물길, 두막루, 말갈 등 사서에 기록된 집단의 형성과정을 규명하는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북방민족사에서 매우 중요하며 독특한 위치라는 점을 밝혔다. In this article, author tried to figure out the reason who formated the early iron age fortresses and towns in Sanjiang plain, located on the northern tip of Manchuria, which have been regarded as one of poorly investigated area fo rarchaeology. From 2000’s some group of archaeologists from Heilongjiang province intensively conducted surface survey and excavation on the basin of Qisinghe river, in the center of Sanjiang plain. After several year’s investigation, chinese scholars found chronologically related two archaeological cultures-Guntuling(2nd century BCE ~ 2<SUP>nd</SUP> century ACE) and Fenglin culture(2nd century ACE ~ 5<SUP>th</SUP> century ACE) concluded that these fortresses and fortified settlements was made by Yilou-Wuji peoples, based on the analysis of historical records such as Weizhi, Hanshu and etc. But, if considered that typological features of pottery, dwelling heating system, and fortresses, assemblage, it is obvious that these two cultures could belong to Wuji(Okcho) cultural area. Furthermore, Fenglin culture of 5<SUP>th</SUP> century ACE are thoroughly different from Mohe culture, which widely spread over from 7<SUP>t</SUP>h century ACE all over Manchuria. So, if we regard Fenglin culture as a part of Wuji people. who are regarded as the ancestor people of Mohe, then archaeological investigation on Sanjiang plain should be faced with severe discrepancy with historical record. So. author reexamined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ancient culture in Sanjiang plain and concluded that the formation of Kuntuling culture was related to expansion of Okcho culture into Sanjiang plain, and they maintained to flourish until the end of 5<SUP>th</SUP> ACE. It is interesting to point out that with appearance of Wuji people in chinese chronicle (weizhi) in 475 y., climate chance and decline of Fenglin culture in Sanjiang plain occurred simultaneously. So. we can assume that around 6<SUP>th</SUP> ACE, arising of Mohe culture accompanied with the end of Sanjiang ancient culture.

      • KCI등재

        17-20세기 러시아 만주학 연구의 시작과 전개과정 -북경교회사절단을 중심으로

        강인욱 ( Kang In Uk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6 民族文化硏究 Vol.73 No.-

        본고에서는 북경교회사절단을 중심으로 만주학의 연구를 일괄하고 그 전후 러시아의 만주족 연구에 대한 학사적 검토를 했다. 본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난 300여 년 간의 러시아 동방학연구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고 중요하다. 한문 중심의 중국사가 아니라 그들과 외교관계를 맺은 청나라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빨리 만주어 연구에 돌입했고, 그 이해 수준도 매우 높았다. 즉, 극동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인식되는 대부분의 만주연구와 달리 러시아에서는 청나라와 국경을 접하는 첨예한 외교관계 속에서 발달되었으며, 한문의 보조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정식 외교언어로 만주어가 연구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18-20세기 초반 사이에 제정러시아의 북경교회사절단 및 그들이 양성한 학자들의 의해서 상당수의 만주는 물론 중국 전반에 관한 역사와 언어가 번역되어서 러시아 동방학의 기초를 수립했다. 이후 제정러시아의 동방학은 20세기 이후 고고, 역사 등으로 확대되어서 독특한 러시아 동방학의 전통은 물론, 구 사회주의권의 동방학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와 같이 조선이 나선정벌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극동 진출은 북경교회 사절단으로 이어졌고, 러시아는 물론 사회주의권의 만주학을 발달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러한 중요성에 비해서 북경교회 사절단의 역할은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바, 본고에서는 북경교회 사절단의 주요한 업적을 소개하고, 그들이 20세기 이후 러시아의 만주학 연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보았다. In this study, author analyses the beginning of Manchu study in Russia from 18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 BCE. It is worthwhile to notice that Sino-Russian borderline conflict and diplomatic relation with dynasty Qing promoted the development of manchu study in Russia. After the Albazin ostrog was stormed by Qing troops in 1685, some of Cossacks moved to China and relocated to Dongzhimen of Beijing. In spite of relocation, these Albazinian strongly withheld their own belief. Since 1713 year, Russia sent Russian Orthodox Church Missionary to Beijing to serve Albazinian. Contrast to catholic missionaries in China. Russian Missionary in Beijing didn`t engage in evangel to chinese and most of time they spent in translating manchu language to russian and occupied in researching chinese history and culture. Like this, manchu language was not regarded as a secondary, but official language for Russia. Until the Boxer Rebellion of 1898-1900, Russian Orthodox Missionary functioned as main source of manchu(=Jurchen) study in Russia. Although most of manuscript still remained unpublished, archive materials widely used during Soviet Era. Recently Larichev V.E. had been edited and published `Liaoshi(History of Liao Dynasty)`, `Jinshi(History of Jin Dynasty), `Yuanshi(History of Yuan Dynasty) and etc.. Furthermore, archaeological researches on Jurchen was also motivated by this Manchu study of Russian Orthodox Church Missionary. Ducher of upper basin of Amur river and Jurchen culture of lower basin of Amur river are identified as material remains of Jurchens(=manch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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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라시아 동부 초원지역 선비 · 유연 시기 고고학적 문화와 그 의의

        강인욱(Kang In Uk) 동북아역사재단 2017 東北亞歷史論叢 Vol.- No.57

        최근 고구려의 연구가 다양화되면서 그 북방 이웃지역과의 관련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삼연(三燕) 문화로 대표되는 모용선비에 대하여 한 · 중 · 일 여러 학자들의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성장시기와 관련된 북방지역의 선비 · 유연 · 돌궐 등이 어떻게 유라시아 초원 일대의 유목국가형성에 이바지했는가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흉노의 발흥 이후 선비와 유연 시기에 해당하는 서기 1~5세기의 남부 시베리아의 알타이 · 몽골 · 프리바이칼 · 자바이칼 지역의 고고학적 문화를 살펴보고 그 특징과 유라시아 고고학에서의 의의를 다루었다. I장에서는 유라시아 동부의 초원지역에서 선비 문화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II장에서는 그간 공백으로만 알려져 있던 서기 1~5세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줄 수 있는 최신 발굴자료들을 소개했다. 이후 III장에서는 각 지역의 선비·유연 시기의 시공적인 범위, 지역적인 차이 등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고구려의 북방 이웃으로서의 선비족에 대한 관점을 탈피하여 고대 북방사라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선비와 그를 이은 유연의 의의를 재평가하고자 했다. 본고에서는 북방 유라시아 일대의 선비 · 유연 시기의 유적을 일별한 결과, 이들은 흉노 이후 유목사회의 발달을 지속하여서 투르크가 등장하기 이전의 유목문화의 발흥에 기반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비 문화의 경우 동쪽으로는 말갈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유연제국으로 계승되는 점을 살펴보아서, 고구려와 북쪽으로 이웃한 선비가 초기 중세시기 북방지역 유목문화를 이해하는 핵심되는 점을 밝혔다. 이를 통하여 유라시아 역사 편년 상에서 민족의 대이동시기로 대표되는 시기(서기 3~5세기)에 고구려의 발달과 북방지역과의 관계를 밝히는 데에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After the collapse of Xiongnu in the first century, the rise of Xianbi has been one of the most interesting subjects in archaeology and ancient history of East Asia and Eurasia. According to historical records, Xianbi replaced most of the Xiongnu boundary from Manchuria to Altai, and from Baikal to the Great Wall region of China. In the fifth century, the Rouran empire occupied most of Eastern Eurasia. To date, the succession of nomadic states (or empires) from in the early medieval age of East Asia have been mainly discussed based on historical records. Traditionally, this period is regarded as “the Great Migration period” in western history. However, because of a lack of archaeological materials, the eastern part of Eurasia was poorly discussed. Thus, in this article, the author seeks to examine the archaeological culture of the Altai, Mongolia, and Baikal area in southern Siberia during the second century to the fifth century. Recent archaeological findings in Mongolia and Southern Siberia show that in this period, after the collapse of Xiongnu, Xianbi’s influence extended to Altai. The Rouran tombs also show the succession of Xianbi cultural elements. Let us take a glimpse at the relationship with Goguryeo. As the author has mentioned in previous works, it is worth pointing out that the stirrups and the horse harness of Altai were strongly influenced by the Goguryeo horse harness. This could be also explained by diplomatic alliances of Goguryeo and Rouran in the second half of the fifth century. However, here the author shows that the archeological findings of the third century to the fifth century share more similarity with the Xianbi. This means that the Rouran-Goguryeo relationship and alliance had just started in the late Rouran empire period and coincided with the rise of ancient Turkic (Tujue) peoples in Altai. In this way, recent archaeological findings of the Xianbi-Rouran period in the eastern Eurasia Steppe give us new perspectives on the early medieval history of East Asia, including Goguryeo.

      • KCI등재후보

        형식학, 국경, 그리고 민족주의를 넘어서 -제7회 동아시아고고학대회의 주제를 중심으로

        강인욱 ( Kang In-uk ),한진성 ( Han Jin-seong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6 인문학연구 Vol.0 No.31

        본고에서는 2016년 6월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제 7회 동아시아고고학대회에서 제의된 동아시아 고고학의 주요 연구 주제와 현황을 분석했다. 최근까지도 세계고고학에서 변방의 위치에 가까웠던 동아시아 일대에서는 다양한 발굴과 연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그동안 미진했던 변방지역에 대한 연구는 양적인 성장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국가 간 정보 교류가 원활해지면서 거시적/광의의 교류 확대, 다양한 자연과학적 분석이 활발해지는 등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최근 급증하는 동아시아 각 지역의 고고학 자료의 증가로 기본적인 편년 및 형식에 대한 연구를 각 지역의 고고학자들이 담당하게 되면서 자연히 문화사적 고고학을 탈피하는 연구방법이 도입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동아시아 각지에서 활발해진 이 같은 움직임은 이번 학술대회에도 반영되었다. 제7회 동아시아고고학대회의 주요 의제는 기존의 형식학을 넘어선 방법론, 국경을 초월한 연구범위, 그리고 고고학을 둘러싼 민족주의적 성향의 대두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In this article, authors review contemporary issues in 7th Congress for SEAA(Society for East Asian Archaeology), which held in June of 2016, Boston. Recently the increasement of archaeological investigations in East Asi is very significant. Furthermore. interregional studies and scientific analisys have been increased. This conference shows how archaeology of East Asia are trying to expand its scope, define interactions and figure out economic systemes. Also. in recent years, however, nationalistic interpretations have emerged as a new trend in addition to the historical approaches. This may indicate that archaeological practice and interpretation have been strongly affected not only by the political, social, and economic environments of each country but also by the recent surge of nationalistic sentiments and conservative political and social trends in the region. Like this, we can find some changes in archaeological method and trend in East Asia, and could define as three key words - Beyond typology, borderline and nationalism.

      • KCI등재후보

        완주 상림리 유적으로 본 동아시아 동검문화의 교류와 전개 - 동주식검(東周式劍)의 매납과 청동기 장인의 이주를 중심으로

        강인욱 ( In Uk Kang ) 호남고고학회 2016 湖南考古學報 Vol.54 No.-

        상림리 유적은 동아시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중국 동주식검이 대량으로 매납된 유적으로 동검을 통한 세 형동검 시기 동북아 일대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하지만 그 의의에 대해서는 `도씨검`이라는 애매한 명칭의 사용과 함께 원론적인 논의만 진행되었을 뿐이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기원전 1천년기 동아시아 동검문화의 확산과 소멸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상림리 유적을 재해석하였다. 먼저 상림리 동검의 관찰결과 실용적인 의미 는 거의 없는 의례용이며 주조 직후 곧바로 매납되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동아시아 일대 청동장인 관련 유적과 마 찬가지로 청동기 장인에 의해 남겨진 것으로 보았다. 상림리 매납유구는 중국(아마 산동지역)에서 장인이 한반도 서남지역을 이동해서 지역사회에 동화되었고, 청동검의 주조와 관련한 의례를 하고 남긴 결과이다. 이러한 청동기 매납현상은 기원전 1천년기에 동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보이는 것으로 장인들은 자신만의 제작기법에 대한 노하우를 유지하며 제사와 매납행위를 통하여 자신들의 청동기 주조를 신성시하고 사회적인 위치한 것에 따른 결과이다. 상림리의 주 연대는 전국시대 동검의 수요가 급감한 이후이며 평양 석암리 출토의 동주식검보다 이른 시대이기 때문에 기원전 4세기 말~3세기 초반으로 편년된다. 이 시기에 중국 동주식 동검의 장인이 한반도로 이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국 내부의 전국시대 말기에서 진대에 이르면서 중국 내에서 동검의 수요가 급감하고 철검으로 대체되는 때와 일치한다. 또한, 동검 장인들의 사회 변동에 따른 이주행태는 오월지역의 동검 장인에 대한 역사기록을 통하여 유추하였다. 또한, 한반도 서남부지역에서 주로 출토되는 점은 전통적으로 황해를 둘러싸고 한국과 중국 의 교류가 빈번했기 때문에 중원식 동검이 유입될 수 있었다. This paper examines the bronze daggers discovered from Sangrim-ri and discusses their implications in the contexts of ancient bronze metallurgy and development of bronze culture across northeast Asia during the first millenium BC. Most importantly, the author notes that the Sangrim-ri daggers bear no evidence of practical uses. These artifacts were presumably manufactured for rituals and interred immediately after they were made. This suggests the presence of bronze craftsmen near Sangrim-ri in Wanju. The period of the late 4th to the early 3rd century BC is the time when the demand for bronze daggers decreased in China. The manufacturers of the Sangrim-ri daggers presumably migrated from China around this time period. The so-called Chinese style daggers are rarely found in Korea and the current findings are distributed only in the southwestern region, while the nomad style bronze goods were much more popular across the southeastern region. The rather restricted distribution of the Chinese style daggers reflects the reduced demand for these items, which was caused by the establishment of the Lelang commandry and the influx of diverse prestige goods such as Chinese swords, bronze mirrors, lacquer wares, and garments. The presence of diverse items that could be used as prestige goods possibly led to a reduced demand for bronze daggers.

      • KCI등재

        유목국가의 형성과 문자의 역할에 대한 고고학적 고찰 : 흉노를 중심으로

        강인욱(Kang, In Uk) 백산학회 2020 白山學報 Vol.0 No.117

        본 고에서는 고고학 자료에 남아있는 기호를 중심으로 흉노 이전 유목사회가 가지고 있는자신들의 독특한 문자체계를 증거를 살펴보고 그 문자 체계가 어떻게 유목제국의 형성에 기여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유라시아 유목사회에서 최초로 문법체계를 갖춘 글자는 기원전 4세기경카자흐스탄의 이식(Issyk) 고분에서 보인다. 초기 흉노 사회의 형성에 사카문화의 확산이 관련되어 있음을 고려하면 사카문화의 문자체계가 흉노 문자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흉노는자신들이 만들어낸 독특한 탐가를 사용했음이 귀족 고분의 출토 유물과 암각화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흉노의 문자는 사카문화에서 유입된 투르크문자와 유사한 기호의 형태와 그림문자와유사한 형태로 양분된다. 이것은 언어학계에서 주장하는 투르크어계와 몽골어계로 양분된 흉노의 이중적 언어체계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흉노는 체계적인 문법에 기반한 문자 체제로 발전시키는 대신에 탐가와 같은 기호로만 주로 사용했다. 이것은 글자에 대한 무지가아니라, 그들의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히 기호체계를 사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탐가를 새겨 넣은 노용울 출토 칠기에서 보듯이 흉노의 상층부는 오히려 탐가체계를 계속 활용함으로써 중국문화로의 동화를 막으려 했었다. 흉노의 탐가는 두 계통으로 세분되어서 투르크어계와 몽골어계로 나뉜 그들의 언어 체계와도 유사하다. 흉노 사회의 붕괴 이후 그들의 기호 체계는동유럽의 훈족과 그들의 영향권으로 확산되었고, 투르크 카간에서 새로운 문자가 등장했다. 이와같이 중국 사서에 기록된 유목민은 글자를 몰랐다는 기록은 고고학적 자료로 볼 때 사실과 다르다. 글자는 유목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글자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절대적으로맹신하기에는 고고학적 자료에서는 유목민 사이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문자 또는 문자와 유사한상징체계를 운용했음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In this paper, the author preliminary looked at the possibility of the existence of the writing system in Xiongnu and their previous nomadic societies, focusing on symbols remaining in archaeological materials. In the early nomadic state in Eurasia, the most significant evidence of writing system is seen from the Issyk ancient tomb in Kazakhstan around the 5~4th century B.C. Considering that the influence of Saka culture had motivated the formation of early Xiongnu federation state, the writing system of Saka culture can influence to Xiongnu tamga (symbols). But, so far majority of Xiongnu s tamga from Petroglyph and Noble tombs are different from Issyk inscription. Thus, it is possible that Xiongnu made use of two different systems of writing simultaneously: the Issyk style insctiption, which are similar to Old Turkish inscription, from Saka Culture, and Xiongnu Tamga. This may be related to the dual linguistic system of the Huns, which are divided into the Turkic and Mongolian languages that the linguists suggest. Like this, from the initial period of sovereignty, xiongnu recognized and used developed writing skill, However, it is worth to point out that as Xiongnu gains hegemony in Mongol Steppe, they intentionally didn t adopt developed writing system. It was more efficient to govern nomadic society without operating the complicate writing system. As seen in the Lacquer bowls with Chanyu s tamga, excavated from the Noyon-Uul big barrow, Chanyu and Xiongnu superior governors make sure to maintain their own tamga writing. Actually, Xiongnu used Chinese characters quite skillfully in diplomatic documents. Otherwise, they did not use Chinese at all in their society. It was a strategic choice that the use of Chinese characters would shake their ruling system. Since the collapse of Xiongnu society, their symbol system has spread to the Huns and their sphere of influence in Eastern Europe. Also, it is clear that Old Turkic scripts in the Turkic Khanate originated from what was continuously used in nomadic society through Xiongnu in Saka. As such, the Chinese historical record of nomadic people not knowing the characters should be reexamined thorough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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