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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호 한국동학학회 2005 동학연구 Vol.0 No.18
19세기말 격변기 조선의 정치 및 대외관계에 다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인 淸의 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袁世凱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제반 역할은 조선에 대한 淸의 宗主權 강화라는 점에 모아지고 있었다. 전통적 宗·藩의식에 따를 때 藩邦이 외침을 받거나 내부 소요로 말미암아 위기에 처할 경우 종주국이 군대를 파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淸軍 파병은 일본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駐韓 일본 대리공사 杉村濬 및 그 통역원 鄭永邦의 계속되는 淸의 ‘代戡’ 종용이나 일본의 조선에 대한 ‘無慾’ 강조 등은 원세개로 하여금 파병 결심을 굳히도록 만들었다. 결국, 宗主國적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 사태를 해결하려던 원세개의 의식과 일본에 대한 그의 오판이 淸·日 양국군의 파견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淸·日戰爭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강문호 한국동학학회 2004 동학연구 Vol.17 No.17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1894년의 淸兵 請援은 동시에 일본의 출병을 야기시켜 조선이 청・일 양국군의 각축장이 됨으로서 한국 근대사의 굴절이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에 필자는 淸兵 請援이 이루어졌던 근본 배경을 天津條約에 따른 撤兵으로 조선 내에서의 세력 확장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宗主國적 입장을 되찾으려는 淸의 노력과, 弊政 개혁을 주장하는 동학교도들의 요구 속에 弊政의 원인 제공자였던 척족 세도가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이해관계의 합치 결과라는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였다.
강문호 경주사학회 2009 경주사학 Vol.0 No.29
儒・佛・道 3교의 先․後에 관한 논란이 비교적 활발했던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唐 전기, 즉 그 儒・佛・道 3교의 先․後에 관한 논란이 비교적 활발했던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唐 전기, 즉 그 건국부터 현종 천보 14년(755) 안사의 난 발발 직전까지였다. 이 기간에 儒・佛・道 3교 차서를 가장 먼저 언급했던 것은 고조 무덕 8년(625) 조서로서 여기서 이연은 3교 차서를 도교 - 유교 - 불교 순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 후 현종 천보년간(742∼756)까지 네 차례에 걸쳐 그 순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 첫 변화는 태종 정관 11년(637) 「道士․女官在僧尼之上詔」에서 규정한 ‘道先佛後’원칙이었으며, 두 번째는 고종 상원 원년(674) 8월 「僧道立位」詔의 ‘道佛竝齊’ 규정이었고, 세 번째는 武周 재초 2년(691) 4월 「釋敎在道法上制」의 ‘佛先道後’원칙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예종 경운 2년(711) 4월의 ‘佛道齊行竝集’ 규정이었다. 당 전기의 儒・佛・道 先後의 변화과정은 당 제왕들의 3교에 대한 신앙보다는 정치적 필요에 따른 변화였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유교는 이미 官學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태종 이후의 3교 次序 논의 과정에서 예외가 되어 논란은 佛・道 2교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