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천주교 인식과 대응 양상

        趙志衡 ( Cho Ji-hyoung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20 大東文化硏究 Vol.0 No.110

        본고는 燕巖 朴趾源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의 면모를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연암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식이 그의 손자 瓛齋 朴珪壽에게 계승·확장되는 양상을 탐색하였다. 연암이 지닌 천주교 인식과 대응의 양상을 살피는 것은 18세기 노론 인사들의 서학-서교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점을 살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연암은 노론 핵심인 반남박씨 가문 출신으로 北學派를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북학파 문인들은 일찍부터 서양의 과학기술과 자연과학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燕行을 통해서 자신들의 학문적 논의를 진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북학파 문인들은 종교적인 부분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북학파 문인들과는 달리, 연암은 천주교에 대해서 허황된 학설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즉 연암은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친서학-반서교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연암의 천주교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 양상은 沔川郡守 재임 시기의 행적에서 잘드러난다. 이 시기 연암에게 천주교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꾀어내어 비루한 습성들을 지니게 하는 매우 위험한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천주교에 대한 대응 방식에 있어서는, 천주교도들을 붙잡아 형벌을 가하고 배교를 강요하는 등의 강력한 대응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대신에 수령이 지극한 정성과 진실된 마음으로 백성들에게 신뢰와 감동을 주어 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연암은 이러한 방식을 직접실행에 옮겨, 천주교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을 돌리고 배교시키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같은 연암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식은 가문 내 후손들에게 계승·확장되었으며, 연암의 손자였던 박규수가 남긴 「闢衛新編評語」에서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박규수는 몇 차례 진행된 국가적인 천주교 박해가 실효성이 없었음을 강변하는 한편, 천주교의 확산을 막고 천주교도들을 회유하기 위해 천주교 관련 서적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연구하여 그 모순점을 비판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평안도관찰사로 나아가서는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주력하며 천주교도를 한 사람도 처형하지 않았다.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대응 방식은 조부 연암이 보여준 모습과 상호 참조가 된다. This paper examined the perception of the Catholic and the aspect of correspondence of Park Ji-won. In addition, it has been looked into how Park Ji-won's perception and correspondence to Catholicism were inherited and extended to his grandson Park Kyu-su. This study has its significance in examining one aspect of the Catholic and Western learning perceptions that the Noron scholars had in the 18th century. Park Ji-won was from a core family of Noron and a representative literary person of Northern Studies. The scholars of Northern studies were very interested in Western science and technology and natural science, and they advanced their academic discussions through history travels to Chinese. Park Ji-won had a negative perception of the Catholic and thought it's an absurd theory. In other words, Park Ji-won was taking the position of ‘pro-Western learning, anti-the Catholic’ that was positive about Western science and technology, but negative about Catholicism During his tenure as a Myeoncheon governor, Catholicism to Park Ji-won was recognized as a very dangerous idea that enticed foolish people to have poor habits. However, when it comes to the way of corresponding Catholicism, he raised the problems of a strong response to arrest and penalize Catholics, and instead insisted that Suryeong should be moved and taught the people with sincerity and trust. In fact, he put this in practice by himseld and made good results. Park Ji-won's perception of and correspondence to Catholicism were inherited by his grandson, Park Gyu-su. Park Gyu-su argued that the several Catholic persecutions at 『Byeokwuisinpyeongeo』 were ineffective, while he insisted that actively accepting and studying Catholic books and criticizing its inconsistency to prevent the spread of Catholicism. Also, at the time of the Byeongin Catholic Perceptions in 1866, he focused on educating the people as a Pyeongan-do governor and did not execute even a single Catholic. Such correspondence to Catholicism was similar to his grandfather, Park Ji-won.

      • KCI등재

        자암(自菴) 금구(金絿)의 유배 생활과 "우중유락(憂中有樂)"의 면모

        지형 ( Ji Hyoung Cho ) 한국고시가문학회 2010 한국시가문화연구 Vol.0 No.26

        본고는 16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자암(自菴) 김구(金絿, 1488~1534)의 한시 작품들을 통해 그의 南海유배 기간 중 내면 의식과 생활상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김구의 남해 유배기 한시 작품들의 주제적 경향은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는데, ①유배 생활의 괴로움과 병리적 고통, ②인간적 情懷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 ③남해 생활에 대한 적응과 交遊, ④산수 유람과 음악적 풍류, ⑤탈속에 대한 지향과 仙的풍류가 바로 그것이다. 김구는 13년간의 유배 생활이 지속되면서 차츰 남해 생활에 적응해 나갔고, 심리적으로도 일상을 회복한 측면이 엿보이고, 무엇보다도 주변 인사들과 적극적으로 교유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구는 이들과 어울리면서 유배 기간에도 여러 모임을 함께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시와 술과 음악이 늘 빠지지 않았다. 한편 김구는 이들의 도움과 비호로 남해 일대의 승경을 유람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측면들이 유배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호방한 풍류의 모습이 가득한 「화전별곡」이라는 작품의 창작을 가능케 한 기반이 아닌가 생각된다.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examine the inner side of consciousness as well as the life during Kim Gu`s banishment to the Nan-hae(南海) through Chinese poem works written during from 1488 to 1534 by Ja-am(自 菴) Kim Gu(金絿), who was active during the early 16th century. The Kim Gu`s theme tendency of Chinese poem works can be mainly organized into five types of ①agony and allergic pain of banished life, ② humane mind and longing for family, ③application and interaction upon live in the Nam-hae, ④landscape sightseeing and musical appreciation, and of ⑤aim to escape the world as well as truthful appreciation. As Kim Gu`s banished life continued on for 13 years, he began to gradually adapt to the life in the Nam-hae while showing the aspects of mentally restoring the daily life and actively interacting with people near. Accordingly, Kim Gu spent his period of banished life participating in various meetings along with these people and such courses of meetings were always accompanied by the poem, alcohol, and music. On the other hand, Kim Gu, under protection and help of these people, was able to travel to places around southern sea with beautiful scenery. As a result, such aspects are assessed being the base allowing Kim Gu to write 「Hwajeonbyulgok(花田別曲)」full of magnanimous appreciation for the arts despite the fact that it was written during his period of banishment.

      • KCI등재

        한벽당(寒碧堂) 곽기수(郭期壽)의 국문시가 향유 양상과 시가사적 의미

        지형 ( Cho Ji-hyoung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7 民族文化硏究 Vol.74 No.-

        본고는 조선 중기 전라도 강진 지역 문인인 한벽당(寒碧堂) 곽기수(郭期壽, 1549-1616)의 생애 주요 면모와 그의 국문시가 향유 양상을 살펴보고, 그의 시가 창작·향유가 갖는 시가사적 의미를 탐색하고자 하였다. 곽기수는 16세기 이래로 호남 지역에서 이어져온 국문시가 창작·향유의 전통 아래 시가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지역 인사 중에 임제(林悌), 김응정(金應鼎) 등과 직접적인 교유관계를 형성하였다. 특별히 곽기수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매개로 하여 이황(李滉), 권호문(權好文) 등 영남 지역의 시가 작품도 접했을 개연성도 매우 크다. 곽기수가 남긴 시가 작품은 시조의 한역인 <취원당십경단가(聚遠堂十景短歌)> 10수, 가사의 한역인 북창춘면가(北?春眠歌)> 1편, 국문시조 <만흥삼결(漫興三?)> 3수가 전한다. 이 시가 작품들은 생애 만년기에 접어든 곽기수가 자신의 거처와 별서를 오가면서 현실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유유자적하면서 여유롭고 낙관적인 삶의 흥취를 표출하고 있다. 이렇듯 곽기수의 시가 작품들은 강호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서의 고아(高雅)한 즐거움을 드러내는 강호시가의 맥락과도 그 흐름을 같이 하고 있는 바, 곽기수는 17세기 초반 호남을 대표하는 시가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This research aimed at investigating Hanbyeokdang(寒碧堂) Kwak Ki-su(郭期壽)`s major aspects of his life, who was a literary person of Gangjin, Jeollado during mid-Joseon, his enjoyment aspect of Korean poetry, and the historical meaning of his poetry creation·enjoyment. Kwak Ki-su created poetry works under the tradition of creation·enjoyment of Korean poetry that was succeeded in Honam since the 16th century, forming direct friendship with regional famous persons as Im Je(林悌), Kim Eung-jeong(金應鼎), etc., of the same period. Particularly, Kwak Ki-su probably faced poetry works of Yi Whang(李滉), Gwon Ho-mun(權好文), etc. from Yeongnam through Hakbong(鶴峯) Kim Seong-il(金誠一). Kwak Ki-su`s poetry works are 10 Korean translation works of Sijo < Chuiwondangsipgyeongdanga(聚遠堂十景短歌) >, 1 Korean translation work of lyrics, < Bukchangchunmyeonga(北?春眠歌) >, and 3 Korean Sijo < Manheungsamgyeol(漫興三?) >. These poetry works express Kwak Ki-su`s leisurely and optimistic joy of life in easy life maintaining a regular distance from the reality while coming and going around his home and another place in his latter years. This way, Kwak Ki-su`s poetry works share the stream with the context of Kangho Poetry, which revealed beauty of Kangho nature and the elegant(高雅) pleasure therein, accordingly, Kwak Ki-su can be evaluated as a representative poet of Honam in the early 17th century.

      • KCI우수등재

        마의 생장해석(生長解析)에 관(關)한 연구(硏究)

        지형,이승필,오세명,Cho, Ji-Hyoung,Lee, Seong-Phil,Oh, Sei-Myoung 한국약용작물학회 2000 韓國藥用作物學會誌 Vol.8 No.4

        마의 고품질 다수확 괴경 생산기술을 개발하고 품종선발 기준을 정하는데 필요한 기초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세 가지 재배종에 대한 경시적인 생육특성에 대한 생장해석을 하였던 바 얻어진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지상부의 초장과 엽수, 측지수 등의 경시적인 변화는 일반적인 S자의 생장곡선을 나타내었고 지하부의 근장, 근경과 생근중은 생육기간이 진전됨에 따라 8월 하순 이후 급격히 증가하였다. 2. 지하부의 특성을 보면 둥근마는 분기가 전혀 없으며 괴경장은 장마가 가장 길고 괴경폭은 둥근마가 가장 크며 형태적으로 둥근 형태를 보였다. 생체수량성은 단마가 가장 높아 2,123kg/10a를 보였고, 둥근마는 건조비율이 높아 가공용으로 유망시 되었다. 3. 각 기관별 RGR은 정식후 86일경에 신생마와 줄기에서 높은 값을 보였고 NAR은 생육초기에 극대값을 보인 후 점차 감소하였으며, LAI는 세 가지 재배종 모두 156일경부터 감소하는 경향이었다. CGR은 156일경에 공시 재배종 모두 최대치를 보였다. LAR의 변화는 둥근마는 86일경부터 단마는 106일, 장마는 136일경부터 감소하는 경향이었으며, SLW의 변화는 둥근마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나 장마와 단마는 변화의 폭이 적었다. This study was conducted to obtain the basic information on the production of high yield and qualitied yam in Andong, major yam-producing district, in Kyongbuk province, using three major Yam cultivars, such as Danma, Jangma and Alata (round type). Alata showed the longest tuber width while Jangma showed the longest tube length. Danma showed the highest tube yield at 2,123 kg/10a. Tubes of Alata had higher dry ratio than those of other cultivars, suggesting that Alata could be used as good processing materials. Characteristics of top parts, such as vine length, leaf number, and lateral vine number showed typical sigmoid curves. Tuber characteristics such as length, width and fresh weight of tuber were linearly increased as the growth period was progressed. Relative growth rate (RGR) for new tuber and stem reached the highest value at 86 DAT (days after transplanting). There were similar tendencies among the cultivars in net assimilation rate (NAR). The highest crop growth rate (CGR) was appeared at 156 DAT regardless of cultivars. In the changes of leaf area ratio (LAR), there were significant differences among three cultivars. LAR were decreased at 86, 106 and 136 DAT for Alata, Danma and Jangma, respectively. However, specific leaf weight (SLW) was greatly increased at 176 DAT, and leaf area index (LAI) was decreased at 156 DAT in all cultivars.

      • KCI등재

        조선 전기 "악비(岳飛)" 고사(故事)의 수용과 인물 형상의 정립 과정

        지형 ( Ji Hyoung Cho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2 大東文化硏究 Vol.77 No.-

        본고는 한국 고전문학 분야에 등장하는 중국의 역사 인물 가운데 宋代무장인``岳飛``에 주목하여, 조선 전기에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이 여러 문헌을 통해수용·형성되는 과정을 탐색하였다. 또 이렇게 형성된 악비 고사와 인물 형상이壬·丙兩亂期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악비 형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확산을 거듭해 갔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악비 관련 고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 자료는 『宋史』 「岳飛傳」이다. 「악비전」에서는 武將으로서 악비에 대한 역사적 사실 기록에 충실하면서, 문무를 겸비한 면모를 부각시키는 동시에 뛰어난 신하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한 군주의 무능을 비판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世宗代간행된 『三綱行實圖』에서는 악비가 「忠臣」편 항목의 일원으로 선택됨으로써 자연스레 충신으로 규정되고 있다. 그가 보여준 충효의 실질은 장수로서 외적 에 맞서 싸우면서 국토를 회복하고 국치를 설욕하고자 孤軍奮鬪한 것인데, 이러한면모에 주목하면서 악비를 儒家의 가치를 내재하고 체현한 충신의 형상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宣祖代간행된 『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은 이전 시기까지 악비에 관한 문헌들을 총 망라하여 악비의 인물 형상을 확정하였다. 이 책은 악비의 圖像, 악비에 대한역사 관계 기록, 악비의 저술, 고금 인물들의 악비에 대한 稱評및 관련 시문 등을 총괄하고 있어서 악비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집대성한 문헌이다. 이러한 문헌이 중국과 조선에서 동시에 간행되고 유포됨으로써 악비는 문무겸전과 충효의 실천을 아우르고, 나아가 흠잡을 데 없이 온전한 不朽의 충신 형상으로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악비 관련 고사는 漢族과 이민족 사이의 대결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경우도 임·병 양란은 주변 이민족들과의 대결 양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적 위기에 잘 대응했던 선례로써 악비가 주목되게 되었다. 이에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은, 전란 직전에는 군사적 방비 강화의 논리적근거로, 전란 과정에서는 군대의 편제와 훈련의 방법의 典範으로, 전란 후에는 講和반대의 명분과 논리로, 나아가 전란 과정에서 활약한 무장들을 칭송하고 褒奬하는준거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기에 이른다. 한편, 악비 관련 주요 문헌인 『삼강행실도』와 『정충록』은 이후에도 계속 간행되고 유포되었다. 『삼강행실도』는 한문과 諺解가 합기된 형태로 여러 차례 간행과 頒賜가 이루어졌으며, 『정충록』은 宣祖, 肅宗, 英祖때 모두 3차례나 간행되었는데, 숙종과 영조의 경우에는 책의 서두에 직접 御製序文을 쓰기도 하였다. 이렇듯 『삼강행실도』와 『정충록』의 지속적인 간행과 반사로 인해 악비에 대한 不朽의 충신 형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선 전기에 수용·형성된 악비 관련 고사와 인물 형상이 하나의 문학적 토양으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17세기 이후에 시조, 소설 등의 갈래에서 작품의 창작과 향유의 측면에서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This study drew attention on ``Yue Fei(岳飛)`` who was an admiral in Song dynasty among Chinese historical figures appeared in Korean classical literature and explored process of accepting event of Yue Fei and forming image of Yue Fei in early Joseon through several documentary records. Furthermore, this study investigated how event of Yue Fei and formed image of Yue Fei were used in two events of Japanese invasion of 1592 and Manchu Invasion of 1636, how formed image of Yue Fei had been developed. The earliest documentary record where event related to Yue Fei can be identified is 『History of the Song(宋史)』「the story of Yue Fei(岳飛傳)」. In the 「the story of Yue Fei」, historical facts about Yue Fei as an admiral were substantially recorded, while aspects of having both literary and military accomplishments were stressed. At the same time, this story even criticizes inability of King who could not see excellent ability of vassal. 『Samganghaengsildo(三綱行實圖)』 published in King Sejong includes Yue Fei in the section 「Loyal Subjects」. So Yue Fei is regarded as a royal subject. Yue Fei, as an admiral, fought against foreign enemies to recover national land and to vindicate national disgrace with all his efforts. Based on his this career, his image as a royal subject was made - Yue Fei is described as a figure who had value of Confucianism and embodied such a value. 『Hoechansongakakmumokwangjeongchungrok(會纂宋岳鄂武穆王精忠錄)』 published in King Seonjo contains all the literatures related to Yue Fei until then and definitely defined image of Yue Fei. This book includes iconography of Yue Fei, historical records about Yue Fei, books written by Yue Fei, assessment about Yue Fei, related poetry and writings etc. - all the materials about Yue Fei were collected. Such literature was published and distributed both in China and Josen at the same time. This definitely made image of Yue Fei as a permanent royal subject without flaw and Yue Fei is described as a figure who had both literary and military accomplishments, and implemented loyalty and filial piety. Historically, it can be said that event related to Yue Fei discloses showdown between China and different ethnic groups. For Joseon, because two events of Japanese invasion of 1592 and Manchu Invasion of 1636 show appearance of showdown between different ethnic groups, Yue Fei was paid attention as a case where national crisis is well responded. Accordingly, event of Yue Fei and his image was variably used like these - just before wars, as a basis of logic for strengthening military defense; during war, as a model of military organization and training method; after war, justification and logic to oppose treaty; furthermore standard to praise and encourage military commanders who acted in wars. On the other hand, since then, major literatures related to Yue Fei such as 『Samganghaengsildo』 and 『Jeongchungrok』 were continuously published and distributed. 『Samganghaengsildo』 was published and distributed several times in the form of being written in Chinese letter and vernacular translations together. 『Jeongchungrok』 was published three times during Seonjo, Sukjong, and Yeongjo - Sukjong and Yeongjo themselves wrote preface of the book. Thus, 『Samganghaengsildo』 and 『Jeongchungrok』 were continuously published and distributed. As the result, it is thought that image of permanent royal subject about Yue Fei was widely expanded. In the end, through this process, event of Yue Fei and image of Yue Fei accepted and formed in early Joseon became one of literary soil. And it is thought that this affected creation and enjoyment of work in the Sijo, novel etc. since the 17th century.

      • KCI등재

        조선시대 관북 지역의 시조 양상과 특징

        지형 ( Cho Ji-hyoung ) 한국고전문학회 2017 古典文學硏究 Vol.52 No.-

        본고는 조선시대 관북 지역에서 산출된 시조들을 통시적 흐름에 따라 정리하고, 관북 지역 시조의 창작 경향과 특징을 탐색하였다. 조선시대 관북 지역에서 산출된 시조는 모두 81수에 이른다. 관북 지역의 시조는 대체로 이 지역으로 부임·재임·유배의 과정에서 산출된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일부 지역 출신 기녀들과 지역 인사인 관곡 김기홍의 시조 작품도 아울러 존재한다. 조선시대 관북 지역에서 산출된 시조의 특징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무변 풍류’라 칭할 수 있는 무관들의 창작과 향유가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는 점. 둘째, 17~18세기 혼란한 정국과 붕당 정치의 갈등 속에서 유배시조가 집중적으로 창작되었다는 점. 셋째, 일부 기녀와 지역인사의 작품만이 존재하고 관북 지역 고유의 시조 담당층이 부재하다는 점. 관북 지역은 조선시대 원악지로 인식되고 또 중앙으로부터의 문화 전파가 가장 늦은 지역이었으므로, 관북 지역에서의 시조 창작과 향유는 국문시가의 향유가 전국적인 현상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This article diachronically arranged some pieces of Sijo created in Kwanbuk Region in Joseon Dynasty, and investigated the trends and characteristics of Sijo in this region. The total number of Sijo discovered from the Kwanbuk Region in Joseon Dynasty is 81 pieces. Although most pieces of Sijo created in Kwanbuk Region were created by Yangban, who were appointed, re-appointed to certain positions or be exiled, but there exist some pieces of Sijo written by Gineyo class from the region and Kwankok Kim Gi-Hong’s Sijo works, too. The Sijo works created in Kwanbuk Region in Joseon Dynasty can be summarized into three characteristics. First, the main trend of Sijo in Kwanbuk Region for the period from 15C to 19C was military officers’ writing and Sijo-appreciation, which can be called as ‘Mubyeon Pungryu (Military Officers’ Arts Appreciation). Second, amid the chaotic political situation and political parties’ confrontation during 17~18C, the works of Exile-Sijo type were intensively created. Third, there existed some Sijo works created by some Ginyeo and some local Yangban celebrities, but the class responsible for creating the local Sijo in Kwanbuk Region was absent. As the Kwanbuk Region was recognized as a primitive area and the culture from central government was diffused into the area the latest, so the creation and appreciation of Sijo in Kwanbuk Region can be said as a case proving that the appreciation of Korean Sijo was a nationwide-popular phenomenon.

      • KCI등재

        東學의 西學ㆍ西洋에 대한 인식의 변화 양상

        지형(Cho Ji-Hyoung)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敎會史硏究 Vol.0 No.34

        Through the Donggyungdaejeon (東經大全) & the Yongdamyusa (龍潭遺詞), the basic scriptures of Donghak, this paper explored changes in its awareness on the Catholic & the Western civilization in its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process. Besides the paper investigated Choi Si-Hyung's awareness on Western World. The result investigated is as follows. It is highly likely that Choi Je-Woo was awareness on the Catholic & the Western civilization during the process making a trip around the world and attaining Nirvana. However, we can't know whether he had any negative awareness on the Catholic & the Western civilization. While having some attention on the western missionary's evangelism logic in the book, 〈Podeokmun〉 (布德文) in the spring of 1861, he recognized the Western as strong being. However there was no rival thinking or negative attitude against the Catholic & the Western civilization in the book. As Donghak entered its public propagation process earnestly, Choi Je-Woo faced the situation that following people didn't understand the Western-Learning rightly and were confused the learning in the song of 〈Anshimga〉(安心歌) written in July of 1861. Although his some remarks belittling the Catholic were seen in the book, there appeared no aggressive criticism or exclusive attitude against Western power & its civilization. In January of 1862, he wrote the book of 〈Nonhakmun〉 (論學文) for the Yangban (noblemen) scholars, and the song of 〈Gwonhakga〉 (勸學歌) to commoners. In the 〈Nonhakmun〉, he emphasized that his religion was different from the Catholic with some specifical reasoning. Emphasizing his religion's differentiation from the Catholic, the region was named as 'Dong-hak' (Eastern Learning) in this process. In the 〈Gwonhakga〉, he criticized the Catholic for its ignorance of traditional manners & orders including the ancestral rites or the ancestor worship in order to emphasize Donghak's differentiation from it. Judging from the above discussion, it is thought that the opinion seeing Donghak as a kind of resist ideology established to resist against the Catholic will have to be corrected. Though Choi Je-Woo recognized the Catholic from early time of his attainment of Nirvana, he didn't appear any exclusive attitude to the learning and Western World. It can be considered that his criticism against the Catholic was carried for the purpose emphasizing his religion's differentiation from the learning. After then, it is judged that Choi Si-Hyung directly succeeded Choi Je-Woo's criticism logics against the Catholic & the Western civilization who activated in the previous period. Especially, in the book of 〈Gangseo〉 (降書), he severely criticized Western Power's armed aggression and insisted that people equipped with the moralism should fight against the Western Power. Therefore, it was the Choi Si-Hyung who formed some Donghak followers' aggressive will againt the Western.

      • KCI등재

        『관북시선(關北詩選)』의 작품 수록 양상과 지역 문학적 특성

        지형 ( Cho Ji Hyoung ) 한국어문학국제학술포럼 2018 Journal of Korean Culture Vol.41 No.-

        본고는 『관북시선(關北詩選)』의 구성 체계 및 작품 수록 양상을 살피고, 작품들의 주제적 경향을 탐색하였다. 『관북시선』은 16~17세기에 활동한 관북 지역 출신 문인 62명의 시문을 가려뽑아 편찬한 책으로서, 함경도 지역 문학의 양상을 파악하는 데 핵심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관북시선』은 현재 두 종류의 이본(異本)이 존재하는데, 동양문고본이 초간본, 규장 각본이 중간본으로 판단된다. 『관북시선』의 구성 체계에서 독특한 부분은 표제에서 ‘시선(詩選)’을 표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시와 산문 작품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선집임에도 한시와 산문을 함께 수록해 놓은 이유는, 한시 작품만으로는 책 1권 분량을 채우기에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관북시선』에는 한시 작품이 282제 303수, 산문 작품이 22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시는 절구·율시에 집중되어 있고, 산문은 10종의 문체만 수록되어 있어 선집 체제가 다소 불균형적이라 할 수 있다. 작가별 작품 수록 양상도 불균형적인데, 『관북시선』에 포함된 작가는 모두 62명에 이르지만, 박정(朴靖), 한기백(韓紀百), 주정(朱椗) 등 일부 작가들은 많은 작품이 수록된 반면, 대부분의 작가들은 1~2수의 작품만이 수록되어 있다. 『관북시선』의 주제적 경향은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관북 지역 안에 위치한 명소(名所)에 대한 작품화. 둘째, 함경도 지역으로 파견된 중앙의 인사들의 교유. 셋째, 지역 동료 문인들과의 애정과 유대감. 넷째, 학문과 환로(宦路)에서 오는 회한의 정서가 그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함경도에 위치한 조선 왕실 발상 관련 유적지를 작품화하며 풍패적자(豊沛赤子)라는 지역적 자긍심을 표출하고, 함경도 지역으로의 학술 문화 전파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며, 낮은 벼슬살이에서 오는 자괴감을 나타낸 부분들은 함경도 지역이 지닌 역사적 특수성과 결합된 지역 문학 고유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d a composition system and aspect of works in 『Gwanbuksiseon(關北詩選)』 and investigated thematic tendencies of the works. 『Gwanbuksiseon』 is a book compiled by choosing poetry and prose of 62 writers from the Gwanbuk district who were active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It can be the core materials to grasp aspects of literature in Hamgyeong-do. There two kinds of different versions in 『Gwanbuksiseon』. It is judged that the Collection of Dongyangmungo(東洋文庫本) is the first edition and the collection of Kyujanggak(奎章閣本) is the second edition. The unique part in the composition system of 『Gwanbuksiseon』 is the point that there are classical Chinese poetry with prose writings in it despite the title claimed to stand for an anthology of poetry. It is judged that it's because Chinese poems were not enough to fill a book. There are 282 je and 303 su of the classical Chinese poetry works and 22 pieces of prose writings in 『Gwanbuksiseon』. As the classical Chinese poetry concentrates on quatrain and regulated verses and prose just includes 10 kinds of writing styles, the system of the collection can be a bit of an imbalance. An aspect of the works by writer is also an imbalance. All the writers included in 『Gwanbuksiseon』 are the 62 persons. There are a lot of works by partial writers such as Park, Jeeong(朴靖), Han, Gi-baek(韓紀百), Ju, Jeong(朱椗) in it, while for most writers, one or two works are included in it. Thematic tendencies of 『Gwanbuksiseon』 can largely be divided into 4 types. First, it had attractions located in the Gwanbuk district works of art. Second, the writers associated with central figures sent to Hamgyeongdo. Third, the regional writers loved and had close links with one another. Fourth, it's penitent emotions from study and the way into the government service. Especially in this process, the parts that they had the historic sites related to the royal birth of the Joseon Dynasty located in Hamgyeong-do works of art, expressed regional pride, revealed their longing for spreading academic culture to the Hamgyeongdo region, and showed senses of shame from their life as low-ranking government officials can be the unique characteristics of regional literature which is combined with the historical distinct characteristics of the Hamgyeongdo region.

      • KCI등재

        18세기 시조사(時調史)의 흐름과 완암(浣巖) 정래교(鄭來僑)의 위상

        지형 ( Ji Hyoung Cho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5 民族文化硏究 Vol.66 No.-

        본고는 18세기 시조사의 전개 구도 속에서 완암(浣巖) 정래교(鄭來僑)의 위상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시조사의 흐름 속에서 18세기는 중인층 전문 가창자의 출현과 그들에 의해 주도된 가집(歌集) 편찬으로 집약할 수 있는 특징적 면모를 보인시기이다. 당시 정래교는 이른바 ‘백악시단(白岳詩壇)’의 일원으로 새로운 시 창작 이론에 공감하고, 홍세태(洪世泰)와 더불어 천기론(天機論)을 본격화하면서 여항문학의 이론적 명분을 확보해 나갔다. 이러한 결실은 홍세태의 『해동유주(海東遺珠)』의 편찬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홍세태의 <해동유주서문>에 보이는 여항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논리 체계는, 이정섭(李廷燮)·정래교로 이어지면서 시조를 중심으로 하는 중인층 여항 예술인 활동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주고자 하였으며 그 결과가 『청구영언』의 서발문으로 구체화되었다. 정래교는 음악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김천택(金天澤), 이태명(李台明), 김성기(金聖基) 등 18세기 시조사와 관련된 주요 가객 및 악사들과 교유하면서 다양한 모임과 예술 활동의 장을 마련하고 궁극적으로는 시조 작품의 창작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정래교가 창작한 시조작품의 바탕에는 18세기 여항인들의 향락적·소비적생활 기풍이 깔려 있으며, 운치 가득한 달밤에 거문고와 퉁소 같은 가악을 동반한 음주, 그리고 여기에서 오는 고고한 흥취를 드러낸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18세기에는 악조상의 변화, 즉 고조-신조의 변화 구도 속에서 정래교는 신조를 긍정하고 지지하였으며, 이러한 연장선에서 신조를 기반으로 음악활동을 이어간 김천택·김성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결국 정래교는 18세기 시조사의 흐름 속에서 시조예술을 중심으로 하는 중인층 여항 예술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이론적 명분을 마련해주고, 직접 그들과 어울리며 여러 문예활동을 통해 시조예술의 장을 넓혔으며, 음악상의 변화 국면에서도 그 신조의 흐름에 잘 편승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This essay mainly discussed the status of Wanam Chung Rae-Gyo of the 18th century sijo developmental landscape. 18th century in the context of sijo has distinct points : one is the emerging of middle class professional singers, the other is their poems are published. Chung Rae-Gyo, as a member of so-called ‘Baegak poetic circles’, appreciated the new poem writing theory, and searched in earnest to Cheongi discussion along with Hong Se-Tae and obtained a theoretical cause of Yeohang literature. These efforts lead to the compilation of Hong Se-Tae’s Haedongyuju. In particular, looking at Hong Se-Tae’s “the Introduction of Haedongyuju”, it affirms the value of Yeohang literature in a logical system. As it leads to Lee Jung-Sub (李廷燮), and Chung Rae-Gyo, laid the groundwork for the theoretical basis of the sijo, which focused on the Yeohang plebeian’s artistic activities. At the introduction of Chungguyoungun, the affirmative value of Yeohang literature is materialized. Chung Rae-Gyo, with his interests about music, associated with leading ‘Gagaek’ and ‘Arksa’ of 18th sijo context, like Kim Cheon-Tek, Lee Tae-Myeong, Kim Seong-Gi and others. Chung organized various meetings and artistic activities with those people and ultimately started to his creation of sijo. The basis of the Chung Rae-gyo’s sijo creative work is the Yeohang group’s pleasure seeking and materialistic lifestyle and ethos, and is characterized by an appearance of people under a full moon, playing such instruments as the Geomungo (a large Korean stringed instrument) and Tungso (Korean bamboo flute), while engaging in other aloof interests. Meanwhile, the changes of the key and mode in the 18th Century, in other words, the changes of Gojo-Sinjo, Chung Rae-Gyo accepts and supports Sinjo, and he makes a favorable assessment of Kim Cheon-Taek and Kim Seong-Gi, whose music careers also followed by Sinjo tendency. Chung Rae-Gyo, in the 18th century’s current of the sijo, layed the groundwork for a theoretical justification to act to the middle class Yeohang artistic groupe specially who wrote sijo. Also Chung made connection directly with many artists, did various literary activities, and broadened the field of sijo. Furthermore Chung could be said the person taking advantage of changes of music aspect as well.

      • KCI등재

        1906년~1910년 京鄕新聞 소재 천주가사의 특성과 그 지향

        지형(Cho Ji Hyoung) 국어문학회 2009 국어문학 Vol.46 No.-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review the nature and characteristics of the Catholic-Gasa[天主歌辭] in vol. 41, 「Bogam(寶鑑)」, 『Kyunghayng daily newpaper[京鄕新聞]』 published between 1906 and 1910, and to investigate the perception of reality and intention represented by the Catholic-Gasa in those periods. This study, based on those investigations, attempted to understand the change pattern of the Catholic-Gasa and examined some aspects of Catholics of those periods in terms of perception of reality and social activities. It was considered, as a result of discussions, that the Catholic-Gasa in 『Kyunghayng daily newspaper』 (l) expended the range of author and increased the amounts, (2) made contents and subjects to being various, (3) tended toward single pattern, and (4) shifted to visual reading materials. The Intention of the Catholic-Gasa in 『Kyunghayng daily newspaper』 was (l) confession of faith and hymnals, advice on the religious life, (2) critical perception of reality due to the national right pillage, (3) open-hearted thoughts on the Western cultures and emphasis on the education within school, and (4) the formation and diffusion of new interpersonal relationships and sense of community. The critical perception of reality concerning the process of pillaging national right, the encouragement on the open-hearted thoughts on the Western cultures, and the emphasis on the education within school shows clearly the position on the actual issues and the social role of Catholic in the period of urgent history. It is estimated that the 『Kyunghayng daily newspaper』 intervened actively in current social issues and voiced their own, therefore, that the Catholic-Gasa works in it also showed such strong tendency.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