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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민 세계평화교수협의회 1977 아카데미論叢 Vol.5 No.1
소프트웨어의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개발된 소프트웨어에 대해 시험 사례를 개발하여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시험단계에 이르러서야 테스트를 수행하고 있으므로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는 초기 단계의 오류일수록 최종 소프트웨어 제품에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초기 단계부터 단계별 테스트를 수행하여 문제점을 점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일 뿐 아니라 생명주기 전 단계에 걸쳐 각 단계에 적합한 시험 항목을 개발하여 적용하는 것이 고품질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생명주기 전 단계에 걸친 테스트 항목을 개발하여 실질적인 시험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홍순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6 규장각 Vol.49 No.-
승정원은 조선왕조에서 왕명(王命) 출납(出納)을 담당하는 관서였다. 왕명은 문서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궐내각사(闕內各司)의 핵심으로서 창덕궁 안 임금의 거처 가까운 곳에 그 청사가 있었다. 승정원의 조선 초기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조선왕조 내내 거의 같은 구성으로 존속하였다. 정규 관원은 주로 정3품 당상관이 맡았던 승지(承旨) 6명과 정7품의 주서(注書) 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고위직의 수효가 적고 하위로 가면서 많아지던 다른 관서들과는 다른 독특한 구성이었다. 승지들은 왕명 출납만이 아니라 임금과 관료기구를 연결하는 정무적인 업무 전반을 담당하였다. 임금을 측근에서 모심으로써 임금이 임금으로서 체통을 유지하며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관리자이기도 하였다. 주서는 승지가 임금의 국정 운영을 보필하는 과정에서 파생하는 보조 업무를 담당하였다. 주서의 업무 가운데 주축을 이루는 것은 기록에 관련된 일이었다. 『승정원일기』는 주서가 담당한 기록 업무의 최종 결과물이다. 서리(書吏)는 주서를 도와 승정원의 문서 작성등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사령(使令)을 비롯하여 평민 혹은 천민 신분의 보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 배치되었다. 승정원은 창덕궁의 인정전 동쪽 회랑의 바깥쪽에 붙어 있었다. 그곳은 임금이 기거하며 활동하는 대전과 가까운 곳으로서 주위에 비변사(備邊司) 당상(堂上)들의 회의 공간인 빈청(賓廳)과 언론을 담당하는 대간(臺諫)들의 직소(直所)인 대청(臺廳)이 있었다. 빈청과 대청은 임금을 정점으로 하고 관료제를 중심으로 작동되었던 조선왕조 국정 운영체계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직능이 수행되는 공간이었다. 승정원은 이들과 임금을 연결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인정전 동쪽 회랑의 윗층 일부에 누(樓) 형태를 띠고 동향을 하고 있던 육선루(六仙樓)는 승정원의 승지들의 공식 업무 공간인 정청(正廳)으로서 엄격한 규율이 통용되는 공간이었다. 승정원의 승지들의 공간 뒤편에는 주서의 공식 회의 공간인 당후(堂後), 사관(史官)의 공간인 우사(右史)가 배치되어 있었다. 우사의 동편에 주서와 사관들이 기록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공간으로 사선각(四仙閣), 기거주실(起居注室), 곽방(槨房) 등이 있었다. 사관들은 예문관 소속이지만 실제 활동 공간은 임금의 거처와 가까운 승정원에 배치되어 있었다. 승정원은 개인이 올리는 상소와 관서에서 올리는 각종 문서를 임금께 올리고, 이에 대한 처분을 포함하여 임금이 내리는 문서를 다시 해당자에 되돌리는 쌍방향의 연결 업무를 담당하였다. 승정원은 조선왕조 관료제의 목구멍-인후(咽喉)요, 임금이 혀-후설(喉舌)과 같은 존재로서 국정운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 관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