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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원필경집』과 최치원의 교유관계

        張日圭 한국고전번역원 2010 民族文化 Vol.- No.34

        최치원은 857년(신라 헌안왕 1)에 태어나 908년(신라 효공왕 12) 이후까지 활동하였다. 그의 집안은 儒學과 佛法을 존숭하면서 숙위학생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경문왕계 왕실과 친밀하였다. 자연히 최치원 역시 입당유학을 통해 왕실과 가까운 관직으로 진출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868년(경문왕 8) 당나라에 들어간 최치원은 당나라의 인재 등용 방법인 常選과 制擧에 모두 관심을 보였다 낙양에 자리한 국자감의 태학에서 습업한 그는 874년(경문왕 14) 7월 이전에 예부시랑 배찬 아래서 빈공의 자격으로 생도시의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876년 겨울에 선주 율수현위로 나아갔지만, 보다 높은 관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877년 겨울에 현위직을 사임하고 박학굉사에 응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박학굉사의 중단과 황소군의 침략 위협이 더해지자, 최치원은 당시 성행했던 벽소제를 통해서 보다 높은 관직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그는 879년(헌강왕 5) 10월 이후부터 884년 8월까지 약 4년 동안 당시 당나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던 회남절도사 고변의 휘하에 나아가 관역순관을 맡았다. 객관과 역원을 돌아다니며 부정비리를 감찰하고 전적과 문서를 검열하는 임무를 담당하면서 그는 중앙 관직으로 轉職할 수 있다는 희망도 가졌다. 하지만 고변이 실각하고 회남도가 붕괴하여 더 이상 관직 진출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최치원은 귀국길에 올랐다. 최치원은 886년 정월에 고변의 휘하에서 막료생활을 하면서 지은 370수의 글을 모아 『계원필경집』20권을 엮어 헌강왕에게 바쳤다. 『계원필경집』은 여러 글을 유형별로 나누어 구성하였고, 각 권에 유형별로 나눈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찬술 연도의 시대순으로 글을 배열하였다. 특히 권1~권16까지는 대체로 고변을 대신한 글을 배열하였지만, 권16의 일부 글부터 권20까지는 최치원 자신과 관련된 글을 수록하였다. 최치원은 자신과 관련된 글에 고변이나 지인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혀 두었다. 최치원은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담은 글에 배찬, 배료,배숙, 배졸,裵秀才 등 裵瓚의 일족과 송현, 양섬, 오만, 이관, 장고, 장웅 등의 활동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들은 중앙 관서의 관료나 지방관을 맡은 사람도 있었지만, 판관이나 순관 등 절도사의 막료 출신도 있었다. 지인들은 최치원이 국자감에서 진사시를 준비할 때나 급제 후 현위직으로 나아갈 때, 고변 휘하로 옮길 때 도움을 주었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성행했던 좌주?문생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때문에 최치원은 자신의 관직 진출에 가장 근본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진사시 좌주 배찬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 『계원필경집』은 당나라 황실과 고변의 관계는 물론 고변과 재상의 관계, 고변 휘하 인물의 활동상을 담았지만, 그보다는 재당시절 자신과 교유하였던 지인들을 소개하면서 재당시절에 관직 진출을 위해 변함없이 노력하였다는 점과 여전히 당나라에 자신의 지인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 편찬되었다. 곧 『계원필경집』은 경문왕계 왕실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던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를 담았다.

      • KCI등재

        계원필경집의 편찬과 사료적 가치

        장일규 진단학회 2011 진단학보 Vol.- No.112

        Choi, Chi-Won’s GyeWonPilGyeongJib was composed with his own writings and writings which write for Gao-pian(高騈) from October, 879 to March, 885. Writings in volume 1~15 are mostly written for Gao-pian, but volume 16~20 contains his own writings excluding some writings. Choi, Chi-Won had special relation with Fei-zan(裵瓚)’s pupil. However, he could know style of poetry who was contemporary such as Luo-yin(羅隱), Lu-gui-meng(陸龜蒙), Du-xun-he(杜荀鶴), Pi-ri-xiu(皮日休), while he served as Local officials. Furthermore, he was influenced by style of past generations poetry such as Bai-ju-yi(白居易) and Du-mu(杜牧) while he served Yangzhou(揚州) and Xuanzhou(宣州). Choi, Chi-Won could learn how to write writings and make contents through BaiShiChangQingJi(白氏長慶集) which was written by Bai-ju-yi. But he keep in mind system of FanChuanWenJi(樊川文集) which was written by Du-mu while he organize system of GyeWonPilGyeongJib. FanChuanWenJi contains many documents which was send to the emperor, central officials and local officials. He was influenced by Du-mu’s writings while he served local officials in region which Du-mu lived in. Meanwhile,LuoZhaoJianJi(羅昭諫集) was contained his own proposed article for people who suffer in chaos. Choi, Chi-Won could learn to recognize the reality that you want to remedy the people’s difficulties through associate with Luo-yin. Also, Choi, Chi-Won get view of history that records fact realistically without summarizing through Gu-Yun(顧雲)’s writings. Thus, he could organize plan that overcome social confusion as well as he could realistically records events, circumstances each person’s activities of late Tang dynasty through influence of Luo-yin and Du-mu. They also usually pursued moral influenced politics which was on the basis of confucian political philosophy centered by king. He also believed that king should govern strictly and quell revolt efficiently in GyeWonPilGyeongJib. Also, he thinks that king should appoint benevolent courtier for achieving moral influenced politics. For such a reason as mentioned, his view of history and recognizing the reality was totally different from Kim,Dae-Moon(金大問) who has view of history which was centerd Jingol(眞骨). GyeWonPilGyeongJib was composed with writings which was send to emperor,central officials and local officials and acquaintance that was totally different from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in Tang. Choi, Chi-Won want to report on that he could successfully learn and accept China’s products of civilization and establishment of governing system which was centered by king could be realizd in Silla(新羅) to King Hun-Gang(憲康王). To conclude, GyeWonPilGyeongJib is Korea’s first anthology which was reflect Confucian view of history. 계원필경집은 최치원이 879년 10월 이후부터 885년 3월 이전까지 고변의 휘하에서 활동하면서지은 글로 구성되었다. 권1~권15의 글은 대체로 고변의 代作이지만, 권16~권20에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글이 주로 수록되었다. 최치원은 빈공진사시의 貢擧를 맡은 배찬의 門生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고, 羅隱, 陸龜蒙, 杜荀鶴,皮日休 등 자신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문인과 교유하였다. 또한 宣州와 揚州에서 활동하면서 머물렀던 白居易, 杜牧 등 자신보다 앞선 시기를 살았던 문인의 시문에 영향을 받았다. 최치원은 백거이의 문집인 白氏長慶集을 통해서 공사간에 전한 글을 짓는 방법이나 내용을 익혔다. 하지만 두목의 문집인 樊川文集에는 황제부터 중앙 및 지방 관인에게 보낸 여러 문서가 수록되었기에, 최치원은 계원필경집의 체제를 구성하면서 번천문집의 체제를 유념하였다. 한편 나은의문집인 羅昭諫集에는 당시 혼란 속에서 고생하는 백성의 모습을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나름의 의견을 제시한 글이 실려 있다. 최치원은 나은과 교유하면서 사회 혼란 속에서 백성의 어려움을 구제하려는 현실인식을 가졌다. 최치원은 顧雲과 함께 사실을 간추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는 歷史觀을 가졌다. 또한 두목과 나은의 영향을 받아 당 말의 사건과 상황, 각 인물의 활동상을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그대로로 적어야함은 물론 사회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도 구상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유교적 관념에 토대를 둔현실인식과 역사관을 나타내었다. 최치원은 계원필경집에서 혼란한 사회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상벌을 엄정히 하고 효율적으로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고 하면서, 군주가 요순시대와 같은 德化政治를 이루려면 어진 신하를 등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현실인식이나 역사관은 자신과 같은 유학지식인을 중심으로 군왕 중심의 상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어서, 진골 중심의 역사관을 가졌던 金大問과는 달랐다. 계원필경집은 시를 함께 엮은 당 문인의 문집과는 달리 황제나 관료, 지인들에게 전한 表, 狀 등을 중심으로 체제를 구성하였다. 최치원은 독특한 체제로 계원필경집을 엮으면서 헌강왕에게 중국의문물을 익히고 수용하는 숙위학생의 역할을 완수하였다는 보고와 함께 군왕 중심의 통치 체제의 구축이라는 자신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음을 알리려고 하였다. 계원필경집은 春秋로 상징되는 儒敎史觀이 반영된 문집이었다.

      • KCI등재후보
      •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의 조성과 그 의미

        장일규 한국이사부학회 2015 이사부와 동해 Vol.9 No.-

        이 글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삼화사 창건 내역과 노사나불상 조성의 내용, 그리고 불상 조성의 불교사적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다만 불상의 양식을 중 심으로 고찰한 기존 연구와 달리 명문에 기록된 결언의 행적, 사상 경향을 통해서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 조성의 정치적인 입장을 주로 살폈다. 삼화사는 대체로 후삼국통일 이후에 왕건이 범일의 遺墟에 전각을 세우고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범일이 터를 닦기 이전에 이미 삼화사는 지금의 자리보다는 바다에 가까운 계곡 아래쪽에 자리 하였다. 삼화사 옛 터에는 석탑 1기와 함께 철불 2구가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1구의 철불만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삼화사 적광전에 봉안된 노사나불상이다. 이 불상은 ‘말법이 시작된 지 300여 년’에 조성되었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상이나 염거화상 승탑의 명문과 관련하여 볼 때, 제작 시기는 대체로 860년 쯤일 것이다. 없어진 1구의 철불은 9세기에 전국적으로 비로자나불상 제작이 성행하였음을 고려하면, 비로자나불상일 것으로 짐작된다.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 조성 불사는 결언이 주관하였다. 결언은 삼화사 노사나 불상을 조성하는 불사를 설행한 뒤, 다시 숭복사 노사나불상을 제작하는 불사에 참여하는 등 주로 노사나불상 조성에 깊이 관여하였다. 숭복사 노사나불상의 제작은 경문왕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도 경문왕 의 교서에 의해서 제작되었을 것이다. 곧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의 조성에는 즉위 직후 위상을 부각하면서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경문왕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 되었다. 결언은 해인사 승려였다. 헌강왕과 정강왕 때 해인사에서는 지엄과 의상을 추모 하는 법회를 개최하면서 60권 화엄경과 80권 화엄경을 사경하는 화엄불사를 설행하였다. 결언은 현준과 함께 이 불사를 주관하였다. 결언은 성기론적 화엄사 상을 가졌지만, 유식 논리에도 유념하였으며 실천 논리에도 관심을 가졌다. 결언 이 융섭적인 화엄사상을 강조하면서 노사나불상과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는 불사를 주관하였으므로, 삼화사 노사나불상 조성 불사는 화엄사상을 통해 당시 불교계를 아우르려는 경문왕계 왕실의 입장이 반영되었다. 경문왕계 왕실은 노사나불상과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면서, 당시를 말세로 인식하는 민심을 위무하고, 굴산 문과 같은 선종산문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결국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 조성 불사는 9세기 중반 이후에 경문왕계 왕실이 명주 일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삼척 을 전략적 요충지로 삼아 지배력을 유지하려고 하였던 정치적 의도와 밀접히 관련되었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foundation history of Samhwasa, the construction and the content of Nosanabulsang, as well as the Buddhist meaning of construction of Bulsang (statue of the Buddha) based on previous research findings. Only, as opposed to previous studies focusing on the form of Bulsang, political perspective behind the construction of Samhwasang Cheoljonosanabulsang was mainly observed. Samhwasa is generally known to have been founded as Wanggeon built a royal palace on the historical site of Beomil after the unification of the later three kingdoms. However, the record from the late Chosun reveals that it was already located on the lower part of a valley near the sea instead of the present location even before Beomil laid the foundation. It has been told that there was a stone tower and 2 iron Buddhas on the old site of Samhwasa. Today, only 1 iron Buddha remains and this seems to be Nosanabulsang that was enshrined before the serene light of Samhwasa. This Bulsang was built after 300 years of the start of the latter days of the law. Based on Dopiansa Cheoljobirojanabulsang and Yeomgeohwasang Seungtap of that period, the construction period is presumed to be around the year 860. The iron Buddha that disappeared is presumed to be Birojanabulsang based on the fact that it prevailed around the country in the 9thcentury. The Buddhist service of Samhwasa Cheoljonosanabulsang was supervised by Gyeoleon. Gyeoleon was deeply involved in the construction of Nosanabulsang, for example performing the Buddhist service for constructing Samhwasa Nosanabulsang, as well as attending the Buddhist rituals for building Soongboksa Nosanabulsang. The construction of Seungboksa Nosanabulsnag was supported by King Gyeongmun. Accordingly, Samhwasa Cheoljonosanabulsang too was probably built following the order of king Gyeongmun. The King Gyeongmun’s political intention to accentuate its status following the accession to throne and to seize the political leadership was behind the construction of Samhwasa Cheoljonosanabulsang. Gyeoleon was the Buddhist monk of Haeinsa. During the period of king Heongang and king Jeonggang, Haensa organized Buddhist ceremonies commemorating Jieom and Euisang, and performed Hwaeombulsa for the Avatamska Sutra(Hwaeomgyeong). Gyeoleon, along with Hyeonjun, organized Buddhist services. Natuallry, Gyeoleon had Hwaeomsasang, but was also interested in scholarly reasoning and practical logic. As Gyeoleon emphasized combined Hwaeomsasang as he organized Buddhist services building Nasanabulsang and Birojanabulsang,, the stance of King Gyeongmun wishing to embrace the Buddhism was reflected. The royal family of King Gyeongmun tried to pacify the public sentiment perceiving that the world was coming to an end, and to hold Seonjongsanmun in check. Finally, the construction Buddhist services of Samhwasa Cheoljonosanabulsang was closely related to political intention of the royal family of king Gyeongmun who attempted to preserve its power with the interest in Myeongju areas and by using Samcheok as strategic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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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의 유교적 정치이념과 사회개혁안

        장일규 한국고대사학회 2005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38

        This study is on the realization process of Choi, Chi-won(崔致遠)'s Simuchaek(時務策) and reform advocacy to Silla society. Choi, Chi-won presented to Queen Jinseong(眞聖王) the a plan for current affair made up of over 10 provisions. While in Tang(唐), he suggested political ideas in Confucianism. According to that, it was stressed king's characteristic and the appointment of wise men. After coming back to Silla, Choi presented political ideas in Confucianism raising a plan to engage men of ability, which gave prominence to benevolence(仁) and filial piety(孝). As a result, he had composed so-called Sasanbimyeong(四山碑銘). This attached importance to the activity of Confucians in 6th head-rank(六頭品), restraining the nobility, so-called Jingol(眞骨). It was also based on the theories of king's characteristic and the appointment of wise men while in Tang. Choi made a synthesis of political ideas in Confucianism which Confucians in 6th head-rank had proposed so far. It was a plan of social reform that he presented Simuchaek. The Jingol nobility had exerted pressure upon Queen Jinseong to vacate the throne to King Hyogong(孝恭王) in the reign of the queen. Which made Choi harbor ill feeling against the Jingol nobility because he was one of the surroundings of King Gyeongmun(景文王)'s lineage. So there was Choi's intention to hold the Jingol nobility in check and make the authority of the royal family raise in his plan. In conclusion, his plan could not come true in the end. But the plan like Choi's Simuchaek was the common desire of Confucians in 6th head-rank. As a result, it would have an effect on the system consolidation of new Goryeo by Confucians that were from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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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의 ‘생태환경’ 이해

        장일규 한국생태환경사학회 2022 생태환경과역사 Vol.- No.8

        최치원이 살던 당시는 혼란의 시대였다. 이 글은 ‘생태환경’을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으로 상정하였을 때, 최치원이 당시를 ‘생태환경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자 하였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최치원은 귀국 후 주로 불교 관련 저술에 힘썼다. 최치원의 생태환경 이해는 불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두어야 한다. 귀국 직후 왕명을 받아 사산비명 찬술을 완료하면서, 해 뜨는 곳인 신라에는 아침 해와 봄바람이 변함없이 존재하였고, 누구든지 호생과 교양을 중시하고 지켜나갔으므로, 결국 만물의 생성・성장이 원활히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자연히 최치원의 생태환경 이해는 신라 산수를 바탕으로 삼고, 산수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조건으로 아침 해와 봄바람을 강조하면서, 아침 해와 봄바람에 익숙한 신라 사람과 신라의 대지가 만물의 생성과 성장의 근원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다만 그는 신라 대지에 대한 관심을 신라 고유 정서의 부각으로 연관시켰다. 곧 ‘인’, ‘생’, ‘지’를 통해서 ‘도’와 ‘제화’, 그리고 ‘생화’를 부각하였고, 특별히 ‘생령’과 ‘물정’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생령은 백성이나 인민을 가리키고, 물정 역시 중생이 지닌 정서를 말한다. 자연히 ‘풍류’인 ‘접화군생’은 ‘무릇 세상의 주체인 각 생령들이 온전히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자’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고, ‘풍류’ 역시 ‘바람 불 듯이 이러저런 당시의 상황’을 실상 그대로 강조한 것이었다. 최치원은 공자, 노자, 부처가 물정을 생각하고 아낀 것을 내세우며 신라 국왕과 신라 국가가 백성을 온전히 보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최치원에게 ‘생태환경 이해’를 통한 ‘접화군생’의 강조는 당시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려는 또 하나의 사회개혁안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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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문한직의 설치와 그 변화

        장일규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9 한국학논총 Vol.31 No.-

        이 글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현재까지 구축된 ‘한국사상 관인ㆍ관직DB’를 활용하여 신라하대 문한직의 변화 과정을 추적ㆍ정리하고, 문한관의 활동과 성격을 구체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신라는 삼국통일전쟁 전후 시기에 문한관을 두었다. 이 때 문한관인 상문사는 외교문서 작성이나 외교사행 파견은 물론 문한관 양성을 위한 교육도 담당하였다. 상문사의 직임은 그 뒤 통문박사, 한림대로 각각 개칭되면서 계속 이어졌다. 혜공왕대 이후 한림대의 직제는 더욱 다양해졌다. 특히 경문왕 말년 이후 헌강왕대까지 근시기구에 소속된 관인은 문한관의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였다. 그들은 국왕의 명령을 받아 여러 비명과 기문을 작성하는 한편으로 국왕의 경연을 담당하면서 국왕의 교서를 작성하였고, 중앙관부와 지방관서의 요직을 맡았다. 문한직은 외교문서와 외교사절의 고유 업무 이외에 국왕의 측근 관료로 기능하였다. 885년 이후에 한림대를 개편한 서서원이 다시 문한관의 역할을 회복하여 비명과 기문 찬술을 전담해 나갔다. 서서원의 관인은 근시직으로 국왕의 측근 관료로 활동하면서 문한직과 함께 중앙관서와 지방관서의 실무직을 맡아 정치적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이러한 모습은 정강왕대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헌강왕은 선왕인 경문왕처럼 측근 관료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경문왕은 왕손과 함께 근시직 문한관을 중앙관서의 차관직이나 지방관서의 장으로 임명하여 측근정치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헌강왕 말년에 이들이 대개 사망하자, 헌강왕은 보다 축소된 세력을 중심으로 왕권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서원 중심으로 문한직을 개편하고, 문한관에게 중앙관서의 차관직이나 지방관의 장을 겸직시켜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 때 김원, 최치원, 박인범 등의 유학지식인은 국왕의 측근관료로 활동하면서 육두품 출신의 신분적 기득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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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하대 서남해안 일대 선종산문의 정토신앙과 장보고의 법화신앙

        張日圭 신라사학회 2010 新羅史學報 Vol.0 No.18

        이 글은 교종 불교의 전통 위에서 선종 불교가 크게 일어났던 신라 서남해안 일대에 분포한 선종 사찰의 선사상 속에서 법화신앙과 관음신앙의 흐름과 변화를 살피고, 그것이 장보고의 법화신앙과 어떤 관련을 가지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신라 하대에 서남해안 일대에는 천관산을 중심으로 화순, 능성, 장흥, 강진, 완도, 영암 등지에 여러 사찰이 분포하였다. 그것은 처음에 의상, 영통(통영)등과 관련되었지만, 장보고가 활동하였던 시기에는 점차 혜철, 체징, 도윤 등과도 연결되었다. 이들은 입당이나 귀국 과정에서 모두 장보고 선단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특히 쌍봉사에 머물다가 대안사로 이거한 혜철은 천태불교를 유념하였는데, 혜철 이후 쌍봉사에 머문 도윤은 물론 보림사에 주석한 체징은 쌍봉사의 법화신앙에 제법 영향을 받았다. 법화신앙을 포함한 선사상은 도선, 절중, 형미, 경보, 경유 등 문도들에 의해서 서남해안 일대에 널리 퍼져갔다. 서남해안 일대에 자리하였던 선문은 화엄이나 유식 등 교종 불교를 완전히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아우르면서 남종선사상을 펼쳐 나갔다. 혜철은 하늘과 땅에 기원하여 비를 내리는 神力을 보였고, 형미와 경유는 미륵의 강림을 위해 힘써 수행하는 求道者로 비유되는 등, 당시 선승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중생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선사상에 석가정토와 미륵정토의 염원을 담았다. 다만 혜철은 서남해안 일대의 민심과 관련하여 미륵신앙을 아울렀지만, 쌍봉사의 법맥을 이은 절중은 특별히 관음신앙을 부각하였다. 그는 장보고의 본영에 가까운 천관산과 보림사를 중심으로 서남해안 일대 선문에 영향을 미쳤던 화엄사상을 유념하면서 실천적인 관음신앙과 함께 현세이익적인 법화신앙을 강조하였다. 신라 사람들은 적산법화원에 모여 《법화경》 강경법회를 열었다. 천태종 승려인 지원, 문감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성림이 법회의 법주를 맡았기에 법화원의 신라인들도 화엄사상을 아우르는 법화신앙에 익숙하였다. 장보고는 적산과 완도를 잇는 해상 무역을 전개하면서 상인들이 항해 중에 겪는 무서움과 어려움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절중은 파도치는 바다를 건널 때 관음보살로 상징되는 바다신을 만나 신라로 돌아왔다. 서남해안 일대의 선문에는 渡海의 위험을 해소하려고 특별히 관음신앙이 부각되었다. 장보고는 서남해안 일대 선문과 관련 속에서 천태사상과 화엄사상, 선사상을 아우르는 경향과 함께 실천적인 관음신앙을 아우르면서 현실을 강조하는 법화신앙을 유념하였다. 장보고 사후에도 이러한 불교사상이나 불교신앙은 서남해안 일대 선문의 법맥을 이은 선승에 의해서 고려 초의 교종 불교와 선종 불교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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