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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과 사실 - 이영훈교수의 비평에 다시 답한다

        수열 경제사학회 2013 經濟史學 Vol.54 No.-

        This paper is written on the purpose of replying to the criticism raised by Prof. Young Hoon Rhee (“The Historical Time-Space in Confusion and Fantasy – The Reply to Huh’s Criticism to Me-“). According to his assertion, the agricultural productivity of Korea declined drastically during 18th and 19th century, but shows an upward trend with the entering of Japanese farmer to Korea. When I clearly proved there’s no irrigation facilities created by Japanese farmer until 1917 with empirical evidence, he changed his map from 1917 to 1921 without any explanation. There was not a shred of evidence to support his assertion. His regression analysis on the productivity of rice farming between 1645 and 1945 also ignored the particularities of the source data. His assertion that the rapid increase of agricultural product between 1910-1917 was caused by the boom of WWI also could never be proved. His explanations were nothing to do with the theme. I think that the Prof. Rhee’s assertions comes from his imagination, and there is nothing virtual about it. 이 논문은 필자의 저서에 대한 이영훈교수의 비평논문(「혼란과 환상의 역사적 시공-허수열의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에 답한다」)에 다시 답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그는 조선의 농업이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몰락하고 있었고, 일본인들이 조선에 진출해 오면서 그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전라북도의 방조제, 보, 벽골제를 비롯하여, 조선 후기 수도작 생산성, 1910-1917년간의 미곡 생산 등에 관한 그의 주장은 이런 역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영훈교수의 비평 대상이 되었던 필자의 책에서, 1917년까지 일본인에 의해 축조된 방조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객관적 증거를 들어 비판하였을 때, 그는 그것을 실증적으로 반박하는 대신 사용하는 지형도를 1917년에서 1921년으로 바꾸면서 문제를 회피해 버렸다. 조선후기 수도작 생산성에 관한 그의 회귀 분석은 자료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분석이었고, 1910-1917년간의 농업 생산의 급증이 제1차 세계대전의 호황 때문이라는 그의 주장에 대한 필자의 비판에 대해서도 그는 어떻게 제1차 세계대전의 호황이 농업 생산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설명하는 대신, 관계도 없는 다른 설명만 늘어 놓았다. 필자는 이영훈교수의 주장이 어떤 객관적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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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교역권론’의 역사상

        수열(李秀烈) 한일관계사학회 2014 한일관계사연구 Vol.48 No.-

        1980년대에 일본 학계에 등장한 아시아 교역권 논의는 기왕의 역사학에 보이는 방법론적 문제점을 지적하며 근대세계시스템에 대한 아시아의 상대적인 자립성과 유럽적 근대와는 구별되는 아시아 독자의 근대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지적 움직임이었다. 아시아 교역권 논의는 많은 부분에서 현재의 역사학계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단순히 순수학문적 동기에서 비롯한 경제사 연구로 치부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아시아 교역권론은 교역권 그 자체에 대한 실증적 연구이면서 동시에 일본자본주의에 대한 적극적 평가와 1980년대 이후 아시아의 경제적 발전에 대한 인식론상의 전환을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적 이론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하마시타 다케시, 스기하라 가오루, 가와카츠 헤이타등의 논의를 중심으로, 그들의 이론이 갖는 인식론상의 문제를 주로 일본의 역사상의 경우에 한정하여 생각해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학계에서는 아시아 교역권론이 현대일본의 사상적 문맥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나 검증이 생략된 채 단지 그 결론만이 긍정적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결론에 있어서의 일치에 불과하다. 설사 유럽중심주의의 극복이나 내셔널 히스토리의 상대화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하더라도 아시아 교역권론은 근세일본의 실상을 실체 이상으로 과대포장하거나 근대 이후 일본자본주의가 수행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은폐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아시아 교역권 논의가 출현하는 사상적 배경과 정치적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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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일본의 대련(大連) 표상

        수열(李秀烈) 중앙대학교 일본연구소 2014 日本 硏究 Vol.0 No.36

        In modern Japan, two different images about Dalian are co-existing: a modern city and a colonial city. Those images of Dalian represent an aspect of Dalian as a colonial seaport town built in the 20<SUP>th</SUP> century. Dalian has been under the domination of Great powers including England, Russia and Japan, one after another, and in the process, it became a representative colonial seaport town in East Asia where different ethnic groups co-existed. Firstly, I will look at Dalian’s modern history. This can be said to be the history of ordeal in a sense that the city of Dalian has passed through the contacts and conflicts with different ethnic groups. And secondly, I will look at a possibility of a new identity which was born in the midst of the history. Multi-cultural society of Dalian was another feature of colonial city of Dalian resulting from the history of Imperialism. Diaspora people or marginal men, who were created in the midst of political chaos, were definitely the tragic existence as well as the victim of history. At the same time, they relativized the logic of a nation-state that regards the equation of the ethnic origin with political identity as natural. In this sense, Dalian, a colonial seaport city built in 20<SUP>th</SUP> century, has a significance as a method to imagine the post-modern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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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지역갈등의 극복과 교류확대 방안

        수열(吳洙烈),이계만(李啓滿) 한국동북아학회 2000 한국동북아논총 Vol.5 No.4

        21세기에 들어선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해결해야할 민족적 ? 국가적 과제가 산적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서 이른바 동서간 지역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영호남간의 교류와 협력의 확대는 내부적으로는 국가적 에너지를 결집시키므로써 발전을 위한 역량충전을 가능케 할 것이 외부적으로는 남북화해시대에 따른 민족대단합의 전제조건이 될 것이다. 지난 4.13총선의 경우 정치 부적격자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낙천 ? 낙선운동의 의도가 궁극적으로는 정치풍토를 변화시켜 동서갈등구조를 해소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운동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사상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총선 이후 동서간 갈등은 거의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으며, 여야는 그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여전히 지역감정에 호소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국민의 정부`의 집권이 종식되는 것을 계기로 하여 40여년간 지속되어온 이른바 `3김시대`가 형식적으로라도 종식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제 우리는 `3김`과 연계된 지역갈등구조로부터 해방될 계기를 맞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은 우리들의 주체적 노력 없이는 도모될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노력은 그 당사자들인 영호남인들에 의해 도모되어야 더욱 값진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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