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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문화연구소 금오공과대학 2011 선주논총 Vol.14 No.-
일찍이 西厓 柳成龍(1542-1607)은 旅軒 張顯光(1554-1637)을 가 리켜 “이 사람은 마음이 차분하고 순박하여 그를 대하면 사람을 감복하게 만든다. 훗날 세상에 이름난 大儒가 되어 우리 유학을 통합하고 이끌 사람은 틀림없이 이 사람이다.”1)라고 하였으며, 寒岡 鄭逑(1543~1620)는 “공자 문하에서 학문을 좋아한 사람은 顔子 한 사람뿐인데, 이것이 어찌 쉬운 말이겠는가! 장현광이라는 사람이 배움을 구하고 도에 뜻을 두었으니, 훗날 우리의 스승이 될 사람은 이사람이다.”2)라고 평하였다. 장현광은 과연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정구 사후 명실상 부한 영남의 사표로써 각계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인조반정 이후 이른바 ‘山林’으로 추앙을 받으면서 광범위한 문인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旅軒先生及門諸賢錄」에 수록된 인물만 해도 170여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속에 포함된 인물을 활동지역별로 분류해보면 심한 지역적 편중현상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즉 경상 우도 지역에 기반을 둔 학자들의 숫자는 겨우 열 명 남짓에 불과할 정도로, 경상좌도 지역에 기반을 둔 학자들의 수효에 비해 현저히 적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전승되지 못하고 당대에 소멸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적어도 두 가지 추측을 가능케 한다. 첫째, 장현광은 정구 사후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인물로서, 학문과 덕행을 갖추고 명실상부하게 경상좌도를 대표할 수 있는 학자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경상우도 지역을 대표하던 남명학파가 인조반정으로 인해 급격히 몰락함으로써 중심을 잃은 강우지역 학자들이, 이미 학문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장현광에게로 관심을 쏟을 수도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본고에서는 강우지역 여헌 문인들의 행적을 검토해봄으로써 강우지역 여헌학 전개과정을 세밀히 살펴보고자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인조반정 이후 경상좌도와 우도의 학자들이 당면한 정치 현실에 대해 어떠한 대응태세를 견지했는지에 대한 이해와 직결될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우선 당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학자들이 지니고 있던 기본적인 정치사상이 무엇이었는지 비교,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러자면 당시 경상우도를 사실상 정치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來庵 鄭仁弘(1536-1623)과 경상좌도 지역의 장현광을 비교해봄으로써 양 지역 학자들의 실질적인 사상적 차이점을 파악해 나가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한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한 다음, 강우지역에 거주하던 장현광 문인들이 가졌던 사승의식을 다시 한 번 심층적으로 분석해 봄으로써 그 당시의 실상을 좀 더 깊이 이해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