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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생형사의 성질에 미치는 유기 점결제 중자사의 영향에 관한 연구

        문재숙,천병욱,김종철,최창옥 ( Jae Sook Moon,Byung Wook Cheon,Jong Cheol Kim,Chang Ock Choi ) 한국주조공학회 1998 한국주조공학회지 Vol.18 No.2

        N/A This study has been carried out to investigate the properties of green sand as system sand containing various organic core sand, such as Shell core, Cold Box core and Pep Set core sand. The permeability of the system sand containing Pep Set core sand was decreased, but increased from containing 5wt.% core sand. The compressive strength and the surface stability index were increased up to containing 5wt.% core sand, but decreased with containing more than 5wt.% core sand. The compactability index was increased with the ratio of core sands. In case of the system sand containing Cold Box core sand, the permeability and the compressive strength were increased with the ratio of core sands, and the surface stability index and the compactability index was a little increased with the ratio of core sands. In case of the system sand containing Shell core sand, the permeability and the compressive strength were a little decreased with the ratio of core sands, and the surface stability index and the compactability index was a little increased with the ratio of core sands. The bonded force of the system sand mixed with core sands were poor and the grain surface was rough. The loss of ignition of system sand containing shell core sand were more than it with others, it has been found that the system sands containing organic core sands have to reclaim for using molding sand. (Received December 31, 1997)

      • KCI등재후보

        고려시대 가야금 연구

        문재숙(Moon, Jae-sook) 한국국악교육학회 2015 국악교육 Vol.40 No.40

        고려시대는 약 500여년이라는 짧지 않은 우리나라의 왕조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야금에 관한 문헌은 매우 소략하여 고려시대 가야금 관련 선행연구 또한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는 고려시대의 가야금과 관련된 기사가 미비하게나마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 악지(高麗史樂志), 『고려도경』(高麗圖經),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 이색(李穡)의 『목은시고』(牧隱詩藁) 등과 도상자료를 통해 가야금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고려시대를 4기로 나누었는데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918년부터 헌종(1084~1097)까지 국가제도를 정비한 시기를 제1기, 제9대 왕인 덕종(1016~1034) 부터 제 16대 왕인 예종(1079~1122)까지 고려문화가 전성기를 이룬 시기를 제2기, 고려 의종왕(1127~1173)부터 공민왕(1330~1374)까지 무신들이 집권하고 몽고가 간섭한 시기를 제3기, 공민왕 말부터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1345~1394)까지를 제4기로 나누어 각 시기에 해당되는 문헌을 살펴보았다. 고려 초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기록된 태조의 훈요 10조 통해 고려시대의 정신사조를 살펴보면 불교․도교․유교를 모두 수용하는 다원화 시대였다. 이러한 정신사조는 가야금 음악세계에도 영향을 미쳐 고려시대 대표적인 문인 이규보(1168~1241)는 자신의 문학을 가야금을 반주에 맞추어 연주한 성악곡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 가야금은 기생이라는 음악집단에 의해서 연주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는 억불숭유정책에 의하여 유교가 융성하였기 때문에 윤선도(尹善道: 1587〜1671) 등 당대 문인들은 거문고를 많이 연주하였다. 연주형태는 가사가 있는 성악곡을 주로 연주하였는데, 음악적인 내용은 오늘의 판소리 성음의 가야금 병창과 달리 가사전달에 중점을 둔 문학적인 면을 더 강조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가야금이라는 이름외에 絲(사), 絃(현), 十二絃(12현), 금(琴) 이라는 말로 많이 사용되었음에 비하여 조선시대에는 가야금이라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즉, 고려시대에는 가야금이라는 악기 이름이 다양하게 사용되었고, 고려 말부터 이곡의 『가정집』은 가야금이라는 용어를 점차 사용하였고, 가야금이라는 악기이름으로 확실하게 정착된 것은 조선의 세종시대 이후로 간주된다. 고려시대는 이곡의 『가정집』 제7권 중 ‘새로 만든 12현의 명’ 이라는 시에서 不雅不俗, ,匪古匪今이라는 문구를 통해 고려 당시 가야금을 雅하기도 하지만 俗하기도 하다고 생각하고, 현대식도 아니고 옛날식도 아니라고 표현한 것이 가야금의 특징 중 하나이고 고려시대 문인들은 다원화시대였기 때문에 가야금의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많이 애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가야금은 거문고 중심의 조선시대와 달리 가야금이 문인들을 중심으로 더욱 성행했으며, 연주되어졌다. 더불어 가야금은 전문가의 음악이라기보다 문인으로서 자기의 시를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던 악기로 간주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가야나라의 금이었던 가야금은 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 까지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담아내며 2000여 년 동안이나 사랑을 받아온 악기였음을 알 수 있다.

      • KCI등재후보

        조선시대 가야금 연구

        문재숙(Moon Jae Sook) 한국국악교육학회 2016 국악교육 Vol.42 No.42

        「조선시대 가야금 연구」는 「고대 가야금연구」, 「고려시대 가야금 연구」에 이어서 우리나라의 가야금 역사에 관해 연구해본 것이다. 조선시대 가야금에 관해 연구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먼저 조선시대의 시대구분을 실제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분류하기 쉽게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초기(태조(392)~성종(1494))․중기(연산군(1494)~경종(1724)) · 후기(영조(1724)~1910)로 3기로 나누었다. 『조선왕조실록』, 문집, 그림자료에 나타난 가야금에 대해서 사료(史料)를 수집하고 시기별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다행히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전체를 아우를 수 있었는데 불행히도 초기사료 중 문집, 그림자료가 전무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병자호란(1636) 등 왜침을 겪으면서 소실됐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조선 초기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문집의 가야금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았으며, 중기에서는 『조선왕조실록』과 문집, 그림자료를 살펴보고 더불어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가야금과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거문고를 비교하여 살펴보았다. 후기 또한 초기, 중기와 동일하게 『조선왕조실록』과 선비들이 남겼던 문집, 그리고 그림자료에 남겨진 가야금을 살펴보았으며 더불어 후기에 편찬된 가야금 악보와 가야금 산조의 출연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고려시대에는 가야금 관련 문집을 살펴보면 금(琴), 현(絃), 사(絲), 12현(十二絃) 등으로 가야금이 불렸는데 조선시대 초기에는 현(絃) 또는 가야금(伽倻琴)으로 불리어 졌다. 세종시대부터 가야금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세종 때 수양대군(훗날 세조, 세조의 대군시절 이름)이 가야금을 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외가의 가풍과 명망 있는 집안 분위기가 그대로 세종의 집안에서도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이후에는 왕가에서 연주되는 기록이 없는데, 이는 세종 이후에 유교문화가 정착되면서 가야금보다는 거문고를 선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거문고가 유교사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악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헌자료는 조선후기에 집중적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후기의 거문고 악보는 55여 종이 전하는 반면 가야금 악보는 『졸장만록(拙庄漫錄)』과 『방산한씨금보(芳山韓氏琴譜)』 등 에만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의 유교를 중심으로 예악(禮樂)사상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또한 『졸장만록』은 가곡, 졸장만록 이후에 간행된 『방산한씨금보』는 기악곡을 전하는데 이는 성악곡에서 기악곡화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림자료를 보면 칠태부인 경수연도(慶壽宴圖)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가야금이나 거문고는 양반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고, 피리, 대금, 해금 등의 관악기는 댓뜰 아래에서 연주하는 모습이 많다. 이것은 가야금이나 거문고가 음량이 작아서 야외에서 연주하기에는 제한될 수도 있었겠지만, 관악기 보다는 현악기 연주한 사람들이 좀 더 대접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1796년 졸장만록이 만들어 졌는데 악보 내용은 거의 가야금 중심의 악보이다. 송만재(宋晩載: 1788~1851)가 쓴 『관우희(觀優戱)』가 1810년도에 만들어 졌고, 판소리가 19세기 전후로 성행했던 것으로 볼 때 가곡을 뒤를 이어 판소리가 성행했으며 이어서 1916년 『방산한씨금보』에 나타난 기악곡 중심의 가즌영산회상으로 이어졌다. 가야금 산조 창시자인 김창조(金昌祖: 1865~1919)가 1895년에서 1919년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김창조는 가곡, 판소리, 민간풍류를 두루 섭렵한 인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가야금 산조 음악 속에는 가곡과 민간풍류와 판소리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가야금 산조가 위대한 악곡이 탄생된 것은 그 전에 있었던 가곡, 판소리, 민간풍류의 악곡들의 우수한 점들이 응집되어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판소리 에서는 성음을 가곡에서는 가곡성 우조를 포함한 평우조 선법을, 민간풍류에서는 가야금 연주수법 등에 영향을 받았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김창조는 가곡, 민간풍류, 판소리, 퉁어(퉁애), 해금 등 까지도 섭렵할 수 있었던 명인이었기 때문에 가야금 산조 악곡을 창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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