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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 예배 갱신에 관한 연구 : 초기 기독교 예배를 중심으로

        김창인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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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에서 예배란 "예(禮)를 다하여 절한다"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예배는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와 보답의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만큼 예배는 기독교에 있어 중요한 것이다. 또한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은 예배를 통하여 영광의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돌려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적 생명력은 예배에 의해 지속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 중 최우선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예배가 한국 교회에서는 많은 문제점들을 수반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예배의 발전 과정에서 예배 신학의 부재, 설교 중심적인 예배로 인한 감정적 예배가 확산됨으로 인해 예배의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불균형의 예배는 반드시 갱신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예배 신학의 정립, 말씀과 성만찬의 균형잡힌 예배, 생활로서의 예배로 갱신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 논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예배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 교회의 문제점과 그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신약성경에는 예배에 관한 자세한 기록들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단지 예배를 드린 모습과 예배의 요소들이 단편적으로 이곳 저곳에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들을 통하여 초기 기독교 예배를 조명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먼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예배의 배경은 성전예배와 회당예배에서 찾을 수 있으며, 초기 기독교 예배가 유대적 제도 속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성전에서 모이기도 했지만 가정집에서도 모였고 유대교와 구별하기 위해 한 날을 택하여 예배를 드렸는데 그 날이 바로 주님의 날이다. 초기 기독교 예배는 유대인 중심의 예배로 시작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이방인, 속사도들의 예배로 점차로 발전하여 갔다. 그들의 예배는 찬양과 기도가 있었고, 말씀의 사역이 있었으며, 가르침과 성찬이 항상 행하여 졌다. 또한 교인들간의 교제인 공동식사가 있었고, 사랑의 섬김, 즉 헌신과 전도가 있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로서 말씀과 성찬이 항상 조화 있게 드려지는 예배 공동체였다. 그러나 이에 비해 한국 교회는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먼저 예배 신학의 부재로 인하여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성직자 중심의 예배로 드려지고 있으며, 제사적 예배로 회귀하고 있고, 인간 중심의 예배로 드려지고 있다. 또한 설교 중심의 예배로만 치중되어서 성찬이 격하되었다. 단지 1년에 1-2회 하는 행사에 그치고 말았다. 연보 또한 제사에 쓰이는 제물이 되어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한국 교회의 예배는 목사의 축도와 성가대의 송영으로 끝나고 교인들은 새로운 각오 없이 세상으로 그냥 흩어져 버린다. 예배와 삶이 분리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많은 문제점들로 인해 한국 교회의 예배는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예배의 본연의 전통과 권위를 찾아 참된 기독교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에서 일어나는 삶의 중요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 갱신이 필요한 것이다. 먼저 예배 신학의 정립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예배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면 먼저 예배 인도자의 예배 신학이 정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예배에 대한 교육은 중요하다고 본다. 또한 말씀과 성만찬의 균형잡힌 예배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예배의 원형이며 초기 기독교 공동체 예배의 주된 요소였다. 이 두 가지가 조화될 때 예배는 더욱 온전하여 질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중심의 예배로 갱신되어야 하며, 축제로서의 예배로 전화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개인주의에서 탈피하여 공동체로서의 예배로 회복되어야 하고, 생활로서의 예배로 갱신되어야 한다.

      • 마르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

        염명동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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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자로서 늘 느끼는 의문과 갈등은 내게 맡겨진 저 양들에게 내가 선포하는 멧세지가 과연 한치의 어긋남 없는 올바른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점이다. 행여 목회 현장의 상황과 조건들, 그리고 시대적 조류에 떠밀려서 잘못된 복음을 잘 못 되었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태연히 강단에서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강단을 내려올 때마다 마음에 큰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바른 방법은 내가 외치는 설교의 내용을 스스로 점검할 수 있어야 하는 것뿐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오직 신학의 힘을 빌려야 했고, 와중에 개혁신학의 가장 깊은 뿌리를 살펴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됨에 자연스럽게 종교개혁자 루터로 시선이 돌려졌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잘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몰트만을 말했다. 이 정의를 루터의 표현을 빌린다면 참된 신앙은〈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럼 점에서 본다면 루터는 가장 바른 신앙의 소유자라고 말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그 바른 신앙의 힘은 한낱 보잘 것 없는 무명의 구도승으로 하여금 전 세계를 정치치적으로 초월적인 위치에서 지배하고 있던 절대 권력의 로마 교황과 맞서 개혁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도록 만든 초인적인 용기와 담력을 생성토록 했으며, 같은 시대의 사조와 삶의 형태까지도 좌지우지하던 "영광의 신학"까지도 붕괴시키는 기적을 이루어 냈다. 목회자의 제일의 사명은 맡겨진 성도들에게 바른 신앙을 심어 주는데 있다면, 가장 좋은 교재는 단연코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다. 십자가의 사역과 십자가의 능력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하지 않고 바른 신앙, 바른 복음을 심어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루터는 조직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성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맞닥뜨린 신학적 논쟁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변증하거나 상대의 논리를 공격하는 결과로 그의 신학은 정립이 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랬기에 루터에게서 체계적으로 자신의 신학을 저술해 간 활동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가장 루터를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 가면서 그가 받은 사상적 영향, 그리고 변화되는 그의 신학의 면모를 그의 삶의 부분들과 연계해서 살펴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루터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청년기에 그를 괴롭혔으나 그로 하여금 위대한 신학을 탄생하도록 만든 가장 큰 동기가 된 영적 고뇌를 살펴보고, 이어서 루터로 하여금 위대한 종교개혁가로 재 탄생할 수 있도록 만든 의인론의 발견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의인론을 발견할 수 있기까지 그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던 중세시대의 여러 사상들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이어서 그의 수많은 저술 속에서 나타난 십자가 신학의 편모들을 살펴본 후에 이를 종합하여 십자가 신학에 대한 정의와 평가로 끝맺음을 하였다. 여기서 나타나 루터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자 고통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 즉 역설적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전 우주 안에 충만하도록 장엄하신 영광은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받은 처형의 고통과 치욕 아래 감추어져 있으므로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한 역설 그것이다. 십자가 신학은 루터의 신학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참된 신학은 "십자가의 지혜"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참된 신학적 지식을 판단하는 기준이고 하나님의 실재성, 은혜, 구원,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의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이라는 의미이다. 십자가 안에는 이런 모든 실재들이 감추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을 가리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력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력함과 비천함을 통해서 직접적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분노 아래 숨겨져 있는 것은 그 분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은 "십자가 아래 숨겨져 있는 것이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것은 마땅히 루터가 자기 모국어로 집필한 저술들을 집대성한 교재인 이른바 바이말판 루터 총서((Weimarer Ausgabe=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Weimar, 1883-)나 이를 영어로 번역한 미국어 판 루터 전집 (American Edition of Luther's Works, Pheladelphia and St. Louis, 1955-)이 주 교재로 사용되어야 했으나 여러 가지 조건의 제약으로 그렇게 하지 못 한 점이다.

      • 교회개척의 실제적 방법론에 관한 연구 :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전신호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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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현대의 교회 개척에 대한 실제적인 방법론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해 사도행전에서 초대 그리스도의 교회가 개척된 과정을 연구해 보고 성서에서 주는 교회 개척에 대한 교훈을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하고 적용하여 보다 성서적이고 보다 실질적인 교회 개척 방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II장에서는 교회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현대에도 계속적인 교회 개척이 필요한지를 살펴보았다. III장에서는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그리고 바울이 개척한 교회 중에서 빌립보 교회, 고린도 교회, 에베소 교회와 마지막으로 로마 교회를 교회 개척의 표본으로 삼고, 각 교회의 환경과 개척사와 성장사를 살펴 본 후 초대의 개척교회들이 주는 교회 개척에 대한 의의들을 짚어 보았다. IV장에서는 성서의 초대교회에서 주는 교훈들을 바탕으로 현대의 교회 개척의 유형과 교회 개척에 실제적으로 필요한 준비사항들에 대해 영적인 부분과 일반적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리고 개척된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한 몇 가지 조건들을 다루어 보았다. V장에서는 현대 교회 개척에 대한 본 연구자의 제언을 실었다. 회피해야 할 사항들과 교회 개척과 개척된 교회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점검사항들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VI장에서는 전체적인 요약 및 교회 개척에 대한 성서적인 제안을 하였다. 현대에는 무수히 교회가 개척되고 한편으로는 무수한 교회들을 사라지는 시대이다. 특별히 한국의 교회들은 그동안 교회 개척을 통해 급속한 성장을 해왔지만, 구체적인 마스터플랜이 없이 독단적이고 모험적인 교회 개척으로 인해 많은 목회자들은 교회 개척의 실패와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는 개척되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개척은 은혜로서 구속함을 받은 구원의 신앙공동체를 세우는 일이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가장 성서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성서, 특히 사도행전은 각 지역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실제적이고 과학적인 하나님의 방법을 알려준다. 우리들은 사도행전에서 개척되어진 교회들의 모형을 통하여 보다 성서적이고, 보다 과학적이고, 보다 실제적인 교회 개척 방법론을 발견할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권능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교회였다. 개척부터 큰 능력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늘을 향한 비전과 비전을 위한 기도, 그리고 성령 충만함으로 변화된 새생활로 성장한 교회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땅끝을 향하지 못하여 결국 고난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흩어진 성도들로 말미암아 땅끝을 향한 주님의 계획은 계속 이루어져 간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실패의 교훈을 바탕으로 세워진 선교하는 교회였다. 선교에 대한 열정과 복음사역에 대한 협력은 안디옥 교회를 선교 교회로써 높이 세웠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교회들을 개척하였다. 유대인 회당이 없던 복음의 불모지에 세워진 빌립보 교회, 뜨겁고 활달한 영성과 신앙으로 초고속 성장한 고린도 교회, 제자화 훈련으로 안에서부터 밖으로 살아있는 믿음을 보인 에베소,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세계의 중심지 대로 마의 한 가운데 세워져서 안디옥 교회에 버금가는 선교 교회가 된 로마 교회, 초대 교회의 설립과 성장과정은 현대에도 역시 살아있는 교회 개척의 교과서이다. 성서시대의 교회 개척의 과정들은 현대의 과학적인 방법들의 단서이자 핵심자료요 실제적인 제시가 된다. 가장 먼저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이며, 성령이 진행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초대 그리스도의 교회의 개척사는 분명히 보여준다. 인간이 사역을 하지만, 그를 구원시키고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복음과 교회를 확장시켜 나가시는 분은 다름 아닌 성령이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초대 교회는 현대의 교회 개척자들에게 몇 가지 자질을 요구한다. 소명의식의 중요성과 개척자가 가진 목회철학과 목회 비전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며, 기도를 통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함을 지적하면서 강하면서도 섬기는 지도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초대 교회는 현대 교회 개척에 대한 실제적인 방법들도 보여준다. 교회 개척에 있어서 지역의 선정의 중요성을 보여줌, 지원기관과 후원자가 개척교회들에 어떤 힘이 되어주는 지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개척 멤버의 구성방법과 그 위력을 알려주며 각 지역마다 특징 있는 전략과 프로그램이 필요함을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교훈해 준다. 더불어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비결도 제시해 준다. 오늘날에 세워지는 교회는 여전히 성령께서 세우시는 "그리스도의 교회"여야 한다. 초대 교회는 그 청사진을 현대의 교회 개척자들에게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초대교회와 같은 개척과 성장을 원한다면 오늘의 교회 개척자들은 먼저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에서 출발점을 찾고, 거기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현대의 과학적인 방법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개척 준비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항목을 만들고 점검해야 한다. 교회의 개척은 더 이상 감정이나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하여 발생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을 이루어가려는 복음적인 소명과 성서적이고 실제적인 노력에 근거할 때, 성령께서는 초대교회와 같은 권능으로 현대의 개척 교회들을 부흥으로 일으켜 세워주실 것이다.

      • 환원운동과 교회일치 : 에큐메디칼 운동과의 비교연구

        함동수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8 국내석사

        RANK : 249631

        오늘날 우리가 체감하고 있는 교회와 교단 분열의 실상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더욱이 어떠한 성경적인 정당성 없이, 교권적 이해와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의해 교단이 분열되고 있는 모습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교단의 분열이 전도의 열심을 부추겨 교회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한때의 실용주의적 논리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오히려 이제는 교회 분열이 기독교 진리를 가리워서 복음전도를 가로막게 되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21세기를 앞두고 교회는 다방면에서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렇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모아 슬기롭게 대처해야 할 때에, 교단의 분열현상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요,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 또는 교단의 연합 내지 통합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20세기는 통합과 연합 운동이 두드러진 시대였다. 기독교 연합의 관심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났는데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현대 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대의 교회일치 운동 중 가장 대표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적은 세계교회를 지향하는 것이며, 외형적인 연합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말해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다양한 사람과 단체들이 함께 제한된 목적과 제한된 일치 속에서 함께 모이는 느슨한 형태의 연합을 희망한다. 마치 경제인 연합의 일원들이 그들이 개성을 유지하면서 공동이익이라는 경제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연합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이나 믿음은 다수결로 결정되어지는 성질도 아니고, 회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만일 외적인 연합을 위해서 복음을 희생시킨다면 그 단체는 이미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성경적 성찰이 없이 실용주의적인 제도적 통합만 추구한다면 외형적인 통합은 이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리와 교회의 순결성의 면에서 크게 손상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환원 운동의 지도자들은 일치의 유일한 기초가 성서임을 발견했다. 그들은 성령의 중재로 설립되고 지도되는 교회 즉 신약교회로의 환원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들은 만일 그들이 신약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재현할 수 있다면, 기독교 일치의 근거를 세상에 제공할 수 있을 것임을 자각했다. 또한 일치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견에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서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따름으로 가능해 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환원운동은 시작부터 두 가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출발한다. 그것은 성서로의 환원(Restoraion)과 하나의 교회로 일치(Unity)하는 것이다. 이 두 개념은 다시 '환원을 통한 일치'로 줄여서 명료하게 정의할 수 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Back Lo the Bible)는 중심적인 표어 아래 많은 주장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 중 가장 초점이 되는 것은 분열된 교회들이 하나의 교회로 일치할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성서는 교회가 하나로 일치해야 할 당위성을 거듭거듭 확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일치를 꾀하여야 한다. 교회일치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유기체성 안에서 일치해야 한다. 둘째로, 교리적인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셋째로, 실제적인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교회의 일치는 바른 동기와 바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올바른 상호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연합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바울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를 하나되게 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성경으로의 환원은 필수적이다. 환원운동가들은 교회일치의 과제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고, '일치'를 위해서는 '환원'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모든 교파적 산물을 포기하고 오직 성경 하나만을 유일한 신조로 할 때에 진정한 일치는 가능할 것이다.

      • 요한계시록 2-3장을 통해 본 바른 교회상에 관한 연구

        최기선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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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어 보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이말에 주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7-19)고 말씀하셨다. 120여명의 성도들에게 성령 충만함을 주어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셨고 복음 전파의 결과 예루살렘 교회를 비롯한 교회가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중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 선교에 앞장섰다. 이 사도 바울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소아시아에 일곱 교회를 세웠고 기타 많은 교회를 세웠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은 말년에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 곳에서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환상을 본다 요한은 주님의 지시에 따라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게 되고, 이 편지의 내용이 요한 계시록이다. 그중 요한 계시록 2-3장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로 그 형식은 모두 똑같다. 먼저 수신자를 말하고, 그 다음 발신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잘한 점에 대한 칭찬의 내용, 잘못한 점에 대한 책망의 내용, 격려와 용기를 주기 위한 예수님의 권면의 내용, 마지막으로 경고와 이기는 자에게 주는 약속으로 끝맺고 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는 말씀을 통하여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는 편지가 단지 그 시대 그 교회 그 성도들에게만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세대를 뛰어넘어 우리 시대의 교회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임을 말한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첫째, 각 교회마다 보내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부 다 모으면 요한 계시록 1장에서 보았던 인자의 환상이 된다. 따라서 1장에서 보았던 예수님과 2-3장의 예수님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일곱 교회의 맨 끝마다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이 있다. 이것은 전부 다 모으면 요한 계시록 마지막 부분인 21-22장의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과 관련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교회를 대표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요한 계시록 전체의 구도와 연관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 준다. 따라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는 메시지는 우주적인 천상의 교회와 연관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전투하는 지상의 교회와도 연관 관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상관 관계 속에서 요한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주님의 모습과 칭찬과 책망과 권면과 약속의 메시지를 통해서 예수님이 원하는 바른 교회상을 정립 할 수 있었다. 또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상징하는데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 전체 교회를 상징하고 더 나가서는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 따라서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모든 교회들은 이 일곱 교회를 통해서 자기의 모습을 재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본 논문의 IV장과 V장에 다양하게 그려진 바른 교회상은 바로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절박하게 다가오는 주님의 살아있는 메시지 이다.

      • 신앙발달 이론의 기독교교육 적용에 관한 연구 : James W. Fowler 이론을 중심으로

        하태오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1 국내석사

        RANK : 249631

        본 논문의 목적은 제임스 파울러(James W. Fowler)의 신앙발달 단계이론을 기독교교육에 적용하여 그 유용성을 밝히는데 있다. 기독교 교육의 구체적인 적용을 위하여 '성숙', '발달', '성장'등의 개념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발달 심리학이 기독교교육에 적용되기 시작한 때와 같이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신앙을 발달적인 관점에서 보기 시작한 것은 1981년 제임스 파울러가 의 "신앙의 발달 단계(Stage of Faith)"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파울러의 신앙발달 이론은 종교적 신학적 맥락에서는 스미드(Wilfred Cantwell Smith), 리챠드 리버(Richrd Niebuhr), 폴 틸리히(Paul Tillich)등에게서 영향을 받고 있으며, 발달 이론은 구조주의자인 삐아제(J Piaget)에 크게 의지하면서 동시에 콜버거(Lawrence Kohlberg)의 도덕발달 이론과 에릭슨(Erik. H. Erikson)의 심리사회학 이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서 그 독특한 이론적인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파울러는 신앙을 "본질적으로 삶에 대한 인간의 방향성이며 우리가 궁극적이라고 믿는 것에 대한 존재의 관계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상의 전 이해를 기초로 하여 파울러는 신앙의 특징을 보편성으로서의 신앙, 의미추구로서의 신앙, 관계적인 성격으로서의 신앙, 앎으로서의 신앙, 상상력으로서의 신앙, 인간적 차원에서의 신앙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이해를 바탕으로 7개의 단계이론을 펼치고 있다. 신앙발달의 단계이론의 주된 관심은 교육의 내용보다는 어떤 과정을 거쳐 교육하는가에 있다. 파울러가 시사하고 있는 신앙교육은 단계화되고, 선택되고, 다양성가 개별성을 인정하며, 인지적 측면만이 아니라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을 포함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은 이러한 신앙의 발전에 따라 교육이 행해져야 한다. 신앙발달 단계 이론이 기독교교육에 적용될 수 있는 유용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제한이 있다. 신앙의 개념을 지나치게 인지적이며 합리적인 차원에서만 정의하고 있는 점, 발달심리학자들의 여러 이론을 한데 묶어 '7가지 특수능력'을 성정한 뒤 이를 평가하여 객관적인 형태의 신앙이라고 규정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와 신앙을 분리시켜 놓고, 자아발달과 신앙의 개념을 거의 동일하게 정의한 점등이다. 오늘날 대부분 공과책들은 계단 공과이다. 이는 교육에 있어서 단계가 있으며 각 단계는 나름대로의 고유한 특성과 구조를 가지며 다른 단계와 질적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교육은 이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한다. 파울러의 신앙발달 단계 이론은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내용이 영아로부터 노인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으며, 한 신앙인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변 환경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나타내 주므로 기독교교육현장에 있어서 실용적인 성격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교육이 더욱 구체적이고 학습자의 단계에 맞게 계획, 실행되도록 하여 오늘날 교회교육의 유용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세례와 구원의 상관성 연구

        원영희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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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들은 세례가 신앙생활에 중요함에도 세례에 대한 인식은 상이한 이해를 갖고 있다. 세례와 구원과의 관계에 있어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은 세례를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입교 의식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막 16:16). 성경에 나타난 세례의 시기와 그 의미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사죄의 세례를 받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가 사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의 시기는 죄를 회개한 다음에 거행되는 것이며, 그 의미는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본 소고의 목적은 한국 개신교의 통일되지 않은 세례관을 성서적 관점에서 비평하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세례와 구원과의 상간관계를 살펴 봄으로써 올바른 세례관을 제시하는데 있다. 제II장에서는 세례에 대한 성경적인 고찰로서 세례의 어원과 그 의미에 대하여 살펴 보았고 구약성경에 나타난 세례에 대해 그리고 신약에 나타난 세례 요한의 세례, 예수의 세례, 초대교회의 세례에 대해 살펴보았으며, 더 나아가 침수세례의 성경적 근거 및 세례의 논쟁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세례의 논쟁점에 대해서는 세례는 구원얻는 세례임을 밝혔다. 따라서 세례는 입교의식에 필요한 세례도 아니다 또한 약식세례와 유아세례는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을 고찰하였다. 제III장에서는 인간의 본성과 구원에 대해서, 구원의 어원과 그 의미에 대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남자와 여자 공히,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으며 하나님의 창조물의 주인공이 되었다(창 1:26, 27).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다. 이 위대한 인간이 사탄의 유혹을 받게 된다. 창세기 3:6에 "나무를 본즉 먹음직하고 보암즉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리고 요한일서 2:16는 육신의 정육,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죄의 성격을 말한다. 죄의 본성은 예수를 시험하는 사탄의 그 삼중적 유혹에서도 드러난다. 그것은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것이요(육신의 정욕), 세상에서 권세를 행하기 위하여 세상을 바라보라는 것이요(눈의 즐거움), 성전 꼭대기에서 자신을 던지라(특별한 위치 또는 신과 같은 위치를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것이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인간은 모두 죽어야만 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 9:27). 심판 받아 죽어 마땅한 인간들을 위해 우리를 구하시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함이었고 부활하심은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 제IV장에서는 세례와 구원의 조건 및 구별성에서 본 논문의 핵심주제인 세례와 구원의 조건 및 구별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란 주제 아래 세례와 믿음, 세례와 죄 씻음, 세례와 연합, 세례와 양자됨, 세례와 새출생, 그리고 세례와 구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세례와 구원의 구별성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보편적으로 구원의 필수조건 속에 언제나 믿음이 항상 포함되어 있다(요 3:16; 행 16:31; 엡 2:8). 마가복음 16:16은 믿음과 세례를 연결시키고 있으며, 믿고 회개하면 구원 받는다(막 16:16). 따라서, 믿음과 세례는 구원 받는데 분리될 수 없는 동반자이다. 세례와 연합에 대해 바울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이 구절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세례와 양자됨에 관하여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이 말은 믿음으로 아들이 되고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양자됨을 알 수 있다. 세례와 새 출생에 대해 요한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새 출생은 두 성분의 한 출생이지 두 출생은 아니다. 물과 성령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물은 곧 세례이다. 새 출생은 물과 성령으로 즉 세례 받음으로 성령을 받게 되며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와 구원에 대해서 신약성경 많은 곳에서 세례와 구원이 동시적인 사건임을 제시하고 있다(마 28:19-20; 막 16:15-16; 요 3:3-5: 행 2:38-39; 행 22:26; 롬 6:3-4; 고전 12:13; 갈 3:26-27; 엡 5:25-27; 골 2:11-13; 딛 3:5; 벧전 3:31). 제V장의 결론에서 본 소고는 세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임을 밝히고 있다. 로마서 6:4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으로서, 요한복음 3:5은 물로부터 탄생을 에베소서 5:26은 물로서 씻어 정결케 되는 것으로, 골로새서 2:12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부활하는 것으로 디도서 3:5은 세례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세례는 구원의 선행적인 필수조건으로 요구하고 있다. 세례받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되며,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 제자훈련을 통한 교회갱신

        신유근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8 국내석사

        RANK : 249631

        한국 교회는 분명히 양적인 성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제자도-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제자의 정신-가 절실히 필요하다. 월터 헨릭슨(Walter Henrichsen)은 제자도가 약한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를 치르기를 싫어하는 신자를 보라. 그는 그것을 거절함으로써 신앙적으로 낮은 수준의 평범한 생을 산다. 그는 머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꼬리를 택했다. 예수의 말씀을 빌리자면 그는 맛을 잃은 소금이다. 이 사람 같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이는 현대교회의 실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해서는 목회사역에 제자훈련의 도입이 시급하다. 문제의 해결방안을 위해서는 교회성장이 가시적 성장에 멈추어서는 안되며, 교회론에 대한 일반적 고찰로서 신학자들과 성경적 원어의 의미를 찾아서 교회의 본질을 먼저 다루어야 한다. 마태복음 16:18에서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ε'κκλησι'α)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할 때의교회에 대한 칼 바르트(Karl Barth)의 견해로는 기구로서가 아닌 인격적인 신앙의 공동체임을 주장한다. 한스 큉(Hans Ku"ng)은 예수와 신앙공동체 사이에서 일어났던 인격적인 신뢰와 교제 그리고 제자들의 헌신에 의한 유기체적 교회였다고 한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만 약 250여회가 나오는 '제자'(μαθητη'ζ)는 예수를 따르는 자를 가리킨다. 마가복음 1:17절에 보면 제자들은 모든 경우에 한 인물에 소속되어 있고, '부르심'에 있어서 예수의 주도권이 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제자훈련은 예수의 정신을 갖고 예수의 삶을 배워 나가며, 성경의 진리를 적용하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베드로전서 2:9에서 말하는 제사장직의 소명을 깨달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서의 '제자'라는 말은 예수와 개인적인 제자를 말하기보다는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16:1, 13:52, 14:20, 18:23), 이는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어도 그 분의 말씀에 거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의 제자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과 제자를 같은 의미로 현대교회에 적용할 때, 제자로 부르심은 전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즉각적이고도 전적인 위탁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서 변화를 주며 그가 의도하는대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로 교회가 가득 차기를 원하신다(마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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