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 국립문서보관소 (Natioul Archive)는 2001년 4월 제37대 리처드 닉슨 (Richard M. Nixon) 대통령의 통치사료 가운데 1971, 1972년 진행된 닉슨과 닉슨의 안보담당보좌관 헨리 키신저 (Henry A. Kis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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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高麗大學校 政策大學院, 2004
학위논문(석사) --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 국제관계학과 , 2004. 8
2004
한국어
349 판사항(4)
서울
iv, 120p. : 삽도 ; 26cm.
참고문헌: p. 7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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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미국 정부 국립문서보관소 (Natioul Archive)는 2001년 4월 제37대 리처드 닉슨 (Richard M. Nixon) 대통령의 통치사료 가운데 1971, 1972년 진행된 닉슨과 닉슨의 안보담당보좌관 헨리 키신저 (Henry A. Kissing...
미국 정부 국립문서보관소 (Natioul Archive)는 2001년 4월 제37대 리처드 닉슨 (Richard M. Nixon) 대통령의 통치사료 가운데 1971, 1972년 진행된 닉슨과 닉슨의 안보담당보좌관 헨리 키신저 (Henry A. Kissinger)가 모택동(毛澤東·마오쩌등) 중국공산당 주석·주은래(周恩來·저우언라이) 국무원 총리사이에 진행된 비공개 회담 기록을 비밀해제했다. 백악관 1급비밀로 분류돼 30년 동안 역사의 커튼 뒤에 보관돼오던 이 회담기록은 1999년에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산하 민간단체인 ‘내셔널 시큐리티 아카이브(The National Security Archive)’가 발간한 『키신저 회고록(The Kissinger Transcript)』에는 포함돼 있지 않은, 美·中 최고 정치지도자들사이의 한반도 문제 협상부분을 거의 완벽하게 담고있다.
이 비밀문서에 따르면 1971년 7월 키신저와 주은래, 그리고 1971년 10월 다시 키신저와 주은래, 1972년 2월 닉슨·키신저·毛澤東·周恩來 사이에 진행된 회담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한반도 문제를 놓고 美·中사이에 비밀 홍정은 없었던 것이 아니라 회담 때마다 한반도 문제가 주요 의제였다. 이들 회담석상에서 중국측이 주로 한반도 문제에 관해 협상을 벌일 것을 적극적으로 제안했으며, 미국측은 수동적으로 응하긴 했으나 대체로 회담을 통해 궁극 적인 駐韓미군의 철수와 주한미군 철수후의 공백을 일본 자위대 군사력으로 메우지 않을 것, 그리고 유엔에서의 남북한 동등 대우 등이 양국 사이에 합의됐다.
특히 1971년 10월의 키신저·주은래 회담에서는 한반도 문제가 주의제였으며, 이 회담에서 주은래는 북한으로부터 전달받은 8개항, 즉 주한미군 완전 철수·남한에 대한 미국의 핵무기 등 제공 중단·북한에 대한 미국의 정찰 중단·한미일 군사합동 훈련 중단·일본군사력의 한반도 진출 반대·UNCURK 해체·미국의 남북한 협상 개입 중지·유엔에서의 남북한 동등 대우 등의 조항을 충실히 미국에 전하는 한편 이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했다. 미국측은 이 8개 항을 전면수용하지는 않았으나, 주한미군의 궁극적인 철수와 일본군사력의 한반도 진출 반대 및 유엔에서의 남북한 동등 대우에 대해 중국 측과 합의를 이뤘다.
회담 결과도 결과지만 1971∼1972년의 회담 이후 韓·美관계와 美·中관계에는 본질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회담기간 중에도 중국은 북한 최고지도부와 긴밀한 회담을 통해 사전협의와 사후통보를 철저히 해주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미 韓·美관계를 美·中관계의 종속변수로 간주하기 시작한 미국측은 미중 데탕트의 성공을 위해 회담과 관련 한국정부와 사전협의는 물론 사후통보도 제대 로 해주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당시 朴正熙 대통령이 여러 차례 요청한 韓·美정상회담도 거절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71∼1972년에 전개된 닉슨·키신저와 毛澤東·周恩來 사이의 데탕트 회담의 결과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韓·美동맹에는 중대한 질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 변화는 미국이 1949년 10월에 정부가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동아시아 정책의 가장 주요한 독립변수로 삼고, 韓·美관계는 그 종속변수로 간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韓·美관계와 美·中관계 사이에 일어난 이 같은 질적 변화의 결과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기조는 크게 바뀌었으나 한국정부는 이 같은 질적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韓美관계나 안보분야에서 정확한 정책수립을 못하는 현상을 빚었다. 회담 직후 朴正熙 정권은 질적 변화를 잘 반영한 대외정책을 수립하는 외교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핵무기 프로그램의 추진과 10월 유신을 통한 비정상적 통치체제의 수립이라는 파행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韓美관계가 美·中관계의 종속변수라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빚어지기 시작한 한국외교의 방향상실은 1972년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2000년대 들어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둘러싼 韓·美간의 불협화음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 같은 방향상실은 韓·美관계가 美·中관계의 종속변수라는 개념을 명확히 인식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 하겠다. 또 3개국 관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Balancing하려는 정책착오를 수정, 양국사이에서 Bandwagoning하려는 정책방향을 설정하는 것으로 연결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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