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의 취지는 1860년대부터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까지의 시기에 있어서 종래의 歷史像이 <세계정세의 변화를 무시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관철-조선정부 관료의 안이한 대외관-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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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 : お茶の水女子大學, 1995
Thesis(doctoral) -- お茶の水女子大學 , 人間文化硏究科 [東洋史專攻] , 1995
1995
일본어
910 판사항(4)
일본
274, 15 p. : ill. ; 2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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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이 논문의 취지는 1860년대부터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까지의 시기에 있어서 종래의 歷史像이 <세계정세의 변화를 무시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관철-조선정부 관료의 안이한 대외관-민비...
이 논문의 취지는 1860년대부터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까지의 시기에 있어서 종래의 歷史像이 <세계정세의 변화를 무시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관철-조선정부 관료의 안이한 대외관-민비 등의 정권욕에 기인한 정변발생(1873년 계유정변)-민비 등의 정권 유지를 위한 대일 외교의 비주체적인 대응-일본에 강요당한 강화도조약(1876)>이라고 하여 주로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온 한국근대정치사를 재조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주목한 인물은 당시의 실학사상가이며 정치가로서 대원군 정권 초기부터 중용되었던 박규수(1817-1876)이다.
박규수에 관해서는 1960년대에 강재언씨가 김옥균 등의 개화파를 배출한 사상가로써 주목한 이래 많은 연구가 있었다. 특히 일본의 하라다 다마끼씨의「박규수의 대일개국론」(교또대학『인문학보』1979)이라는 논문은 박규수의 주체적인 대일개국론을 다루어 강화도조약에 있어서 조선측의 주체적인 대응이 존재하였음을 밝혀 일찌기 강화도조약의 재조명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 있어서는 사료적 부족도 있어서 박규수가 1861년 이래 가져왔던 대외적 위기의식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발전하여 강화도조약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 하는 점은 규명되지 못하였다.
본고는 필자가 새로이 발견한『東津御侮輯要』『東津日記』를 구사하는 한편 당시의 청국, 일본, 미국의 대조선정책 등을 비교검토하므로서 박규수를 중심으로 조선의 대외적 위기의식의 내용과 그 발전과정을 규명하여 강화도조약의 체결이 조선의 주체적인 개국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第一步로서 적극적인 의미르 갖고 있음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본 논문은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장은 1860년대를 전후한 시기의 조선의 대외적위기의식의 내용에 대하여 분석하고 아울러 청국 일본의 대외적 위기의식과 비교를 통하여 조선의 특징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제2장과 제3장은 1860년대 70년대의 대외적 交戰을 거듭하면서 박규수의 대외위기의식의 변화와 대미통상조약체결의 필요를 통감해 가는 과정을 조명하였다.
제4장은 박규수도 관계하였다고 보이는 계유정변의 動因과 이후의 정책을 재조명하여 계유정변이 대원군의 국내외정책의 한계와 정책전환의 필요를 느끼고 이루어진 측면을 부각시켰다. (박규수는 정변후 우의정에 발탁됨.)
제5장은 계유정변 후 변화한 대일정책을 검토하였다. 특히 일본의 대조선정책의 전개와 비교하므로서 당시 조선의 대응의 타당성 여부를 규명하였다.
제6장은 강화도조약 체결의 과정과 국제적인 조건을 검토하여 박규수 등이 대일개국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종래의 쇄국정책을 탈피하고 당시의 세계정세의 변화에 적응해 가고자 하였다는 점을 밝히고 아울러 이 조약에서 일본이 사상으로서의 征韓論을 관철시켰다는 단순한 이해를 떠나서 일본은 현실에서의 주도면밀한 국제적 여론 조성을 통하여 조약을 이루고자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조약체결을 위한 적극적인 대응이 있으므로 해서 체결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규명하였다.
강화도조약은 조선측의 근대적 조약 체결의 규범에 무지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원안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는 불평등조약이었으나 당시 조선의 관계자들은 조약의 내용보다도 조약의 체결 자체가 쇄국정책을 탈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점에서 강화도조약은 조선의 외압(웨스턴 임팩트)에 직면한 이래 이에 대한 위기의식과 새로운 대외정책의 모색과정에서 쇄국정책을 탈피하고 개국정책을 지향해 나가는데에 있어서 일획을 긋는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