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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시기 鄭文孚의 의병 활동 연구 = A Study on the Volunteer activities of Jeong Mun-bu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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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정문부는 임진왜란 시기 함경북도병마평사(이하: 북평사, 정6품)의 지위로 의병 대장에 추대되어 종성부사(종3품) 등의 상관들을 거느리고서 북관대첩의 공적을 세운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본 논문은 의병장으로 기억되는 정문부의 일생 중 임진왜란 시기 북관대첩 으로 널리 알려진 의병 활동에서 그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진행되었던 사건들 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북관대첩이 가능할 수 있었던 정문부의 의병 활동 기반 및 의병의 의의와 성과를 고찰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 함경도에서 조선군 의 와해와 함경도 민심의 변화, 왜군의 정세를 살펴보았다. 아울러 기록에서 찾아지는 정문부의 감정 발현을 통하여 그의 성품을 도출하려고 하였다. 정문부는 문과로 급제하여 문신의 길을 걷다 북평사의 임무를 맡았는데, 임 지인 함경북도(이하: 북관)에서 임진왜란을 맞아 인생의 여정이 바뀐 인물이 다. 정문부는 24세에 출사하여 27세에 북평사가 되고 28세에 의병장이 되었 다. 정문부는 출사한 지 4년 만에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맞았다. 임 진왜란은 조선의 왕과 백성 모두에게 큰 전환점의 시기였겠지만, 정문부에게 있어서 1592년 임진왜란은 인생의 전환기였다. 정문부는 조선에서 사대부의 자손으로 태어나 일찍이 붕당의 폐해를 경험하 였으며 정계에 발을 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의 소용돌이에 내몰렸다. 정 문부는 타고난 품성과 개인의 자질로써 북관에서 참신한 젊은 관료로서의 입 지를 다지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은 그에게 새로운 운명을 안겨주었다. 북관의 민심은 북평사라는 하위 관료에게 의병장이라는 전시 최고 지휘관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상관으로 모시던 부사들을 휘하에 두고 지휘하면서 왜군과 싸우게 하였다. 정문부가 의병대장에 추대된 결정적인 이유는 평소 그가 북관 에서 청렴한 관료의 모습을 보여온 것에 기인한 결과였다. 정문부는 의병장으로서 반적 및 함경도의 요충지를 점령하여 통치하던 왜군 과 싸우는 한편, 상급자의 압력과 반발에 부딪히면서도 애국충정의 일념으로 전투의 승리를 위해서 매진하였다. 그러나 왕명과도 같은 순찰사의 공문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조선의 관료였으므로 한때는 설한의 북방으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이때 선조는 의주에서 함경도의 반란으로 풍패의 땅을 잃고 가족과 가신까 지 왜군의 포로가 된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정문부의 경성 수복과 창의 소식은 가뭄에 단비와 같은 일이었다. 선조는 감격의 눈물을 보이며 희망 을 발견하고 정문부를 격려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총신 함경감사 겸 순찰사 윤탁연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장계를 받게 되었다. 그 이후 정문부와 윤탁연의 ‘같은 사건’에 ‘다른 내용’의 장계를 보고 난 후 선조는 정문부를 불신하게 되 었다. 선조의 정문부 불신은 신진보다는 총신을 더 신뢰하는 성격과 새로운 민 심의 형성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이유이다. 그렇지만, 정문부가 다시 의병장으로 활약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선조였다. 윤탁연의 시기로 쫓겨난 정문부를 재빨리 의병장에 복귀시켜 정문부 를 공식적인 북관의 최고 지휘관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 일은 선조와 정문부, 윤탁연 세 사람 모두에게 최선의 방책이었다. 선조에게는 정문부가 북관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전세를 바꾸게 하였으며, 정문부는 윤탁연의 추고와 간섭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윤탁연은 선조의 신임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 적으로 선조의 선택은 최선의 묘수가 되었다. 선조는 정문부의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공적은 인정하지 않았다. 인재의 천거 에 정문부가 거론되어도 못 들은 척했으며, 자신이 정문부를 추천하면서도 험 담과 함께 이름을 거명하였다. 이에 정문부는 나라에서 크게 쓰이지 못하고 외 관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시기의 북관대첩은 조선군이 와해된 시기에 패전장이 오합지졸의 병력을 다시 모아 왜군과 대적하여 승리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북관 전투의 승 리 요인으로 불의에 타협하지 않던 젊은 관료의 등장, 조선 백성의 유교적 사 상, 선조의 판단력이 어우러져 만든 결과였다. 정문부는 북평사로 해정창에서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기고, 의병장이라는 새로운 운명을 맞아 쉬운 길은 아니 었지만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였다. 정문부의 임진왜란 초기 행적에서 드러난 감정들은 유교적 본성론에 기반한 감정으로써 사단의 감정(四端之心)과 강한 감정인 애국심, 즉 ‘忠’과 ‘義’의 감 정이었다. 정문부는 어려서부터 부친 정신(鄭愼)의 지도하에 올바른 인성을 함 양하였다. 그 본성의 발현이 북관에서 백성을 위한 행정을 펼치고 임금에 대한 충성으로 한 몸을 바치고 왜군과 싸워 끝내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공적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곧 사라지고 북관대첩 이후 외직을 떠 돌던 정문부는 말년에 억울한 모함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가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도 결백을 주장한 기개는 진정한 장수의 모습이었다. 조선은 통치 이념이자 윤리 정신인 성리학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관군이 무너진 자리에 의로운 자들이 앞다투어 창의하고, 초개처럼 목숨을 바 쳐서 돌아선 민심을 되돌리고, 몽진에 나선 임금을 다시 용상에 앉힌 자들은 바로 조선의 유학자들이었다. 그들의 행적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선조에겐 호 종한 환관보다도 못한 공적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후일 정문부와 북관 의병 들은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면서 북관대첩의 공훈을 인정받았으며 명예가 회 복되었다. 그러나 정문부는 끝내 붕당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정문부는 사후 후손들과 함경도 선비들의 끊임없는 청원으로 명예가 회복되 었다. 신원과 복권이 이루어지고 시호를 추증받았다. 그리고 부조전(不祧典)과 사당들이 세워져 배향되고 북관대첩비와 신도비가 세워졌다. 북관대첩의 공적 들이 그림과 글로써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져 왔다. 정문부의 신원과 복권은 그와 함께 북관대첩의 전장에서 피 흘린 북관 의병 들의 명예 회복에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하여 북관 의병들의 공적도 인정받으 면서 정문부와 함께 사당에 배향되었다. 정문부는 임진왜란 중 아주 짧은 기간에 자기 능력을 꽃피웠고, 미처 발휘하 지 못한 능력은 쓸 기회조차 없었다. 인재의 능력을 사장한 선조의 패착이 못 내 아쉬운 대목이다. 정문부는 유교적 본성이 충만한 인물로 유장으로서 큰일 을 할 수 있었으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그를 쉬게 하였다. 주제어: 정문부, 임진왜란, 북관대첩, 북평사, 의병장, 이원적 지위, 역 계급 군사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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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문부는 임진왜란 시기 함경북도병마평사(이하: 북평사, 정6품)의 지위로 의병 대장에 추대되어 종성부사(종3품) 등의 상관들을 거느리고서 북관대첩의 공적을 세운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

      정문부는 임진왜란 시기 함경북도병마평사(이하: 북평사, 정6품)의 지위로 의병 대장에 추대되어 종성부사(종3품) 등의 상관들을 거느리고서 북관대첩의 공적을 세운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본 논문은 의병장으로 기억되는 정문부의 일생 중 임진왜란 시기 북관대첩 으로 널리 알려진 의병 활동에서 그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진행되었던 사건들 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북관대첩이 가능할 수 있었던 정문부의 의병 활동 기반 및 의병의 의의와 성과를 고찰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 함경도에서 조선군 의 와해와 함경도 민심의 변화, 왜군의 정세를 살펴보았다. 아울러 기록에서 찾아지는 정문부의 감정 발현을 통하여 그의 성품을 도출하려고 하였다. 정문부는 문과로 급제하여 문신의 길을 걷다 북평사의 임무를 맡았는데, 임 지인 함경북도(이하: 북관)에서 임진왜란을 맞아 인생의 여정이 바뀐 인물이 다. 정문부는 24세에 출사하여 27세에 북평사가 되고 28세에 의병장이 되었 다. 정문부는 출사한 지 4년 만에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맞았다. 임 진왜란은 조선의 왕과 백성 모두에게 큰 전환점의 시기였겠지만, 정문부에게 있어서 1592년 임진왜란은 인생의 전환기였다. 정문부는 조선에서 사대부의 자손으로 태어나 일찍이 붕당의 폐해를 경험하 였으며 정계에 발을 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의 소용돌이에 내몰렸다. 정 문부는 타고난 품성과 개인의 자질로써 북관에서 참신한 젊은 관료로서의 입 지를 다지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은 그에게 새로운 운명을 안겨주었다. 북관의 민심은 북평사라는 하위 관료에게 의병장이라는 전시 최고 지휘관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상관으로 모시던 부사들을 휘하에 두고 지휘하면서 왜군과 싸우게 하였다. 정문부가 의병대장에 추대된 결정적인 이유는 평소 그가 북관 에서 청렴한 관료의 모습을 보여온 것에 기인한 결과였다. 정문부는 의병장으로서 반적 및 함경도의 요충지를 점령하여 통치하던 왜군 과 싸우는 한편, 상급자의 압력과 반발에 부딪히면서도 애국충정의 일념으로 전투의 승리를 위해서 매진하였다. 그러나 왕명과도 같은 순찰사의 공문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조선의 관료였으므로 한때는 설한의 북방으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이때 선조는 의주에서 함경도의 반란으로 풍패의 땅을 잃고 가족과 가신까 지 왜군의 포로가 된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정문부의 경성 수복과 창의 소식은 가뭄에 단비와 같은 일이었다. 선조는 감격의 눈물을 보이며 희망 을 발견하고 정문부를 격려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총신 함경감사 겸 순찰사 윤탁연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장계를 받게 되었다. 그 이후 정문부와 윤탁연의 ‘같은 사건’에 ‘다른 내용’의 장계를 보고 난 후 선조는 정문부를 불신하게 되 었다. 선조의 정문부 불신은 신진보다는 총신을 더 신뢰하는 성격과 새로운 민 심의 형성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이유이다. 그렇지만, 정문부가 다시 의병장으로 활약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선조였다. 윤탁연의 시기로 쫓겨난 정문부를 재빨리 의병장에 복귀시켜 정문부 를 공식적인 북관의 최고 지휘관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 일은 선조와 정문부, 윤탁연 세 사람 모두에게 최선의 방책이었다. 선조에게는 정문부가 북관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전세를 바꾸게 하였으며, 정문부는 윤탁연의 추고와 간섭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윤탁연은 선조의 신임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 적으로 선조의 선택은 최선의 묘수가 되었다. 선조는 정문부의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공적은 인정하지 않았다. 인재의 천거 에 정문부가 거론되어도 못 들은 척했으며, 자신이 정문부를 추천하면서도 험 담과 함께 이름을 거명하였다. 이에 정문부는 나라에서 크게 쓰이지 못하고 외 관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시기의 북관대첩은 조선군이 와해된 시기에 패전장이 오합지졸의 병력을 다시 모아 왜군과 대적하여 승리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북관 전투의 승 리 요인으로 불의에 타협하지 않던 젊은 관료의 등장, 조선 백성의 유교적 사 상, 선조의 판단력이 어우러져 만든 결과였다. 정문부는 북평사로 해정창에서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기고, 의병장이라는 새로운 운명을 맞아 쉬운 길은 아니 었지만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였다. 정문부의 임진왜란 초기 행적에서 드러난 감정들은 유교적 본성론에 기반한 감정으로써 사단의 감정(四端之心)과 강한 감정인 애국심, 즉 ‘忠’과 ‘義’의 감 정이었다. 정문부는 어려서부터 부친 정신(鄭愼)의 지도하에 올바른 인성을 함 양하였다. 그 본성의 발현이 북관에서 백성을 위한 행정을 펼치고 임금에 대한 충성으로 한 몸을 바치고 왜군과 싸워 끝내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공적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곧 사라지고 북관대첩 이후 외직을 떠 돌던 정문부는 말년에 억울한 모함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가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도 결백을 주장한 기개는 진정한 장수의 모습이었다. 조선은 통치 이념이자 윤리 정신인 성리학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관군이 무너진 자리에 의로운 자들이 앞다투어 창의하고, 초개처럼 목숨을 바 쳐서 돌아선 민심을 되돌리고, 몽진에 나선 임금을 다시 용상에 앉힌 자들은 바로 조선의 유학자들이었다. 그들의 행적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선조에겐 호 종한 환관보다도 못한 공적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후일 정문부와 북관 의병 들은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면서 북관대첩의 공훈을 인정받았으며 명예가 회 복되었다. 그러나 정문부는 끝내 붕당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정문부는 사후 후손들과 함경도 선비들의 끊임없는 청원으로 명예가 회복되 었다. 신원과 복권이 이루어지고 시호를 추증받았다. 그리고 부조전(不祧典)과 사당들이 세워져 배향되고 북관대첩비와 신도비가 세워졌다. 북관대첩의 공적 들이 그림과 글로써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져 왔다. 정문부의 신원과 복권은 그와 함께 북관대첩의 전장에서 피 흘린 북관 의병 들의 명예 회복에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하여 북관 의병들의 공적도 인정받으 면서 정문부와 함께 사당에 배향되었다. 정문부는 임진왜란 중 아주 짧은 기간에 자기 능력을 꽃피웠고, 미처 발휘하 지 못한 능력은 쓸 기회조차 없었다. 인재의 능력을 사장한 선조의 패착이 못 내 아쉬운 대목이다. 정문부는 유교적 본성이 충만한 인물로 유장으로서 큰일 을 할 수 있었으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그를 쉬게 하였다. 주제어: 정문부, 임진왜란, 북관대첩, 북평사, 의병장, 이원적 지위, 역 계급 군사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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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제Ⅰ장 서론 1
      • 1. 연구목적 1
      • 2. 선행연구 8
      • 3. 연구방법 14
      • 제Ⅱ장 정문부의 의병 기반 18
      • 제Ⅰ장 서론 1
      • 1. 연구목적 1
      • 2. 선행연구 8
      • 3. 연구방법 14
      • 제Ⅱ장 정문부의 의병 기반 18
      • 1. 가계(家系)와 수학(修學) 18
      • 1) 생애와 가계 18
      • 2) 수학 과정 31
      • 2. 사상적 기반 34
      • 3. 사회적 기반 39
      • 4. 경제적 기반 44
      • 제Ⅲ장 정문부의 의병 활동 51
      • 1. 함경도의 정세와 군대 동향 51
      • 1) 창의 전 함경도 정세 52
      • 2) 반군 67
      • 3) 북관 의병 72
      • 4) 토병 73
      • 5) 왜군 77
      • 6) 번호(藩胡: 여진족) 79
      • 2. 북관대첩 81
      • 1) 경성전투 83
      • 2) 길주전투 86
      • (1) 장평·장덕산전투 86
      • (2) 임명(쌍포 부근)전투 93
      • (3) 남문전투 95
      • 3) 단천전투 96
      • 4) 백탑교전투 98
      • 5) 여진족 토벌 102
      • 3. 북관대첩의 성과와 의의 104
      • 1) 북관 의병의 성격 104
      • 2) 북관대첩의 성과 107
      • 3) 북관대첩의 의의 110
      • 제Ⅳ장 의병 활동 중 정문부의 갈등 113
      • 1. 관군과의 갈등 양상 113
      • 1) 윤탁연과의 갈등 113
      • 2) 정현룡과의 대립 130
      • 2. 관료 체계의 구조적 문제 140
      • 1) 선조의 정문부 불신 140
      • 2) 이원적 지위의 문제 159
      • 3. 선조의 정문부 인식 164
      • 제Ⅴ장. 북관 의병의 기억과 추모 168
      • 1. 임진왜란 공신 선정 168
      • 1) 임진왜란 공신 녹훈 168
      • 2) 신원과 복권 175
      • 3) 시호(諡號) 추증 179
      • 2. 정문부 사후 추모 양상 182
      • 1) 사당과 서원 182
      • 2) 정문부신도비(鄭文孚神道碑) 191
      • 3) 북관대첩비 192
      • 4) 창의토왜도 196
      • 5) 쌍포파왜도 198
      • 6) 의려록(義旅錄) 200
      • 7) 농포집 200
      • 제Ⅵ장. 결론 205
      • 참고문헌 211
      • 부록 224
      • Abstract 227
      • 日文抄錄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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