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산성은 전술적·전략적 가치가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 조선후기 방어체제에 따라 역할과 위상이 변화하였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방어체제 변화에 유의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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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성은 전술적·전략적 가치가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 조선후기 방어체제에 따라 역할과 위상이 변화하였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방어체제 변화에 유의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기능�...
독산성은 전술적·전략적 가치가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 조선후기 방어체제에 따라 역할과 위상이 변화하였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방어체제 변화에 유의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기능이 재생된 독산성의 역할과 위상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 경기 방어체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독산성의 역사적 의미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독산성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고성(古城)인 형태로 유지되다가, 왜란 중 여러 지휘관의 독산성 활용으로, 전술적·전략적 가치가 있는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게 되었다. 전란 중 한양의 수비를 보완하기 위해 독산성을 포함한 경기 요충지의 방비를 강화하고 한양을 보호하게 했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은 지방군 강화를 위해 영장(營將)을 신설하고 방어사(防禦使)를 정례화하였다. 이에 독산성에도 영장이 파견되어 군사 훈련을 진행하고, 수성장(守城將)을 겸하여 독산성을 관리하였다. 이후 영장을 수원판관(水原判官)으로 삼아,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중심으로 한 독산성 관리와 방어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경기병사(京畿兵使)의 시범적 운용을 위해 수원부사가 방어사를 겸직하게 되면서 독산성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했다. 수원 방어영의 절목이 남아 있지 않아 편제를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파주 방어영의 예를 적용하면 최대 2,500여 명의 병력을 거느렸던 것으로 보인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을 계기로 경기도의 군정을 강화하고자 총융청(摠戎廳)을 설치했다, 수원은 총융사(摠戎使)의 순시(巡視)를 받으면서, 독산성의 관리를 이어 나갔다. 정묘호란(丁卯胡亂)·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했을 때, 당시 수원부사는 왕을 호종(扈從)하러 떠나고, 독산성은 수원 일대의 청야입보성(淸野入保城) 역할을 했다. 1637년(인조 15) 정축조약(丁丑條約)에 의해 산성의 보수가 불가능해지자, 독산성 역시 쇠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독산성은 폐지되지 않고 관리체제 변화와 별파진(別破陣)을 활용한 재용 마련, 유방(留防)의 법제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여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했다.
1793년(정조 17) 수원이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된 이후 독산성은 현륭원(顯隆園)을 수호하는 임무와 화성(華城)과 협수(協守)체제를 이루고자, 방비 강화 및 관리체제에 변화를 주었다. 또한 건릉(健陵)이 조성되자 독산성은 능과 원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게 되어 위상이 더욱 특별해졌으며, 관리체제 개편과 성조(城操) 훈련을 조선후기까지 진행하여 한양을 수호하는 경기 남부의 관방 역할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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