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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濟 泗沘期 新羅와의 전쟁과 영역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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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5944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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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百濟 泗沘期의 역사에서 新羅와의 전쟁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당시의 전쟁이 백제의 흥망성쇠에 직결되기도 했고, 정치·외교 등 국가 운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와의 전쟁에 대한 연구는 백제 사비기의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사비기 對신라 전쟁의 흐름과 성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그 결과로서 파생되는 영역의 변천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나아가 7세기 중엽 새롭게 확보했던 加耶故地에 대한 백제의 지배체제 문제를 다루는 한편, 멸망기 영역 관련 기록의 실상 및 작성 배경에 대해서도 나름의 분석을 시도해보았다.
      538년 泗沘遷都 이후 백제는 신라와 우호를 회복하여 高句麗의 침공에 함께 대응했고, 551년에는 공동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옛 수도 漢城을 수복했다. 하지만 신라가 고구려와의 通好를 바탕으로 553년에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취하자, 백제는 그 보복을 위해 신라의 管山城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聖王이 전사하는 등 크게 참패하였다. 불과 2~3년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백제와 신라는 동맹국에서 적대적 관계로 돌아서게 되었다.
      양국 관계의 급변으로 백제의 北界 및 東界는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最前線이 되었는데, 당시 아산만-진천-청주-문의-대전-금산-무주 일대에서 신라와 접경지대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562년 신라가 大加耶를 병합하고 경남 서부지역을 장악함에 따라, 백제의 南東界 방면에서는 장수-남원-지리산 및 섬진강 일대에서 양국의 접경이 형성되었다.
      당시 접경 일대의 상황을 보면, 신라가 소백산맥의 주요 고개를 장악하고 그 以西의 핵심거점까지 선점함으로써 前線 상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반면 백제의 입장에서 신라 王京 방향의 진군로는 소백산맥 일대의 화령로·추풍령로·덕산재로·육십령로·여원치로 5개 정도로 한정되며, 이들 교통로는 모두 신라의 지방거점(州)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공격 목표는 1차적으로 소백산맥 고개를 넘는 교두보 확보, 2차적으로는 신라의 지방거점(州) 공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사비기 對新羅戰의 방향을 신라 上州·下州·新州 세 권역으로 구분하여 정리하는 한편, 전쟁의 목표 및 전개과정을 ‘소백산맥 以東 지역 진출 교두보 확보-신라 州 治所 장악-신라 왕경 함락’이라는 세 단계로 설정해보았다.
      威德王代에는 관산성 전투의 여파로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보다는 주로 내정 안정 및 對中國 외교에 주력했다. 당시 신라도 제도 및 행정관서 정비 등 內治에 힘쓰는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신라 眞智王 재위 때 두 차례 교전을 제외하면, 양국 간의 대규모 군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백제의 본격적인 전쟁은 武王 즉위 후 602년 阿莫城 전투로 시작되었다. 당시 전투의 전개과정을 분석한 결과, 전투의 발발 원인은 신라의 小陀 등 4城 축조 및 백제 영역 침범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백제는 신라의 섬진강 수계권 진출 위협을 제거하고 신라 下州 방면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아막성을 침공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4만 대병을 동원한 백제의 공격은 신라의 방어에 막혔고, 백제의 신라 下州 방면 진출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아막성 전투의 참패 후 백제는 공격 방향을 바꾸어 椵岑城 공략을 시도했다. 가잠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한데, 684년 報德城 반란군의 設陣 장소 및 가잠성의 지리적 환경을 분석한 결과, 가잠성의 위치를 충남 금산군 추부면 일대로 비정해볼 수 있었다. 이에 백제의 가잠성 침공 목적은 신라의 논산·익산 방면 진출 위협을 제거하고 신라 管山城 및 上州 방면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해보았다. 백제는 611년 백일동안 포위 끝에 가잠성을 함락했지만, 618년에 침공을 받고 다시 신라에게 가잠성을 내주었다. 이렇듯 무왕 전기에는 불리하게 조성된 前線 속에서 신라의 진출 위협을 제거하고 신라 上·下州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아막성과 가잠성을 공략했으나, 양 방향으로의 진출 모두 좌절되고 말았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본격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무왕 후기부터였다. 백제는 624년 경남 함양에 위치했던 速含城을 함락하고 마침내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 下州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당시 백제의 진군은 육십령로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안의와 함양 일대를 장악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속함성 함락을 기점으로 백제는 신라를 일방적으로 공격하면서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왔고, 加耶故地 방면에서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다.
      무왕대 對新羅戰의 양상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623년 勒努縣 전투를 제외한 모든 공격이 신라 上州와 下州 방면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공격의 방향성은 對신라 정책의 결과로 이해되는데, 당시 백제는 新州 방면에 집중된 신라의 군사력과 방어체계·진출 후 고구려와의 군사적 대치 등을 고려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신라 新州 방면에서는 군사적 긴장감을 조성하여 신라의 관심을 돌리고, 신라 上·下州 방면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실리적인 전략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義慈王 즉위 후 백제의 신라 下州 방면 공세는 더욱 강화되었다. 642년 7월에 獼猴城 등 40성을 함락시켰고, 8월에는 신라 下州의 거점이었던 大耶城마저 함락함으로써 加耶故地의 상당 지역을 차지했다. 645년 양국의 戰場이었던 加兮城과 買利浦城의 위치로 볼 때, 당시 백제는 낙동강 서안 및 남강 하류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 후 金庾信이 본격적으로 활약함에 따라,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공방전이 加耶故地 방면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백제가 신라에게 빼앗긴 곳을 다시 수복하는 등 사실상 前線의 큰 변화는 없었다. 게다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기록된 648년 전투 기사를 분석한 결과, 김유신의 전과는 매우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대야성 일대가 신라에 넘어간 정황도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는 성주·고령 일대에서 신라와 공방전을 벌이는 가운데, 합천·의령의 以西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649년 이후에는 加耶故地 방면에서 양국 간 전투가 보이지 않으므로, 백제가 660년 멸망 때까지 加耶故地 서남부 일대를 계속 영유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백제 사비기의 공격은 대부분 신라 下州 방면에 집중되었고, 영역의 확대 또한 그곳 加耶故地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새로 확보한 지역에 대한 영역화 작업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와 관련하여 唐書의 6方 기사를 주목하였다. 여기에 6~7개 郡이 분포했던 광범위한 규모·20~35년의 영유 기간·南方城과의 지리적 격절·군사적 중요도 등을 근거로, 백제가 새로 확보한 加耶故地를 원활하게 지배하기 위해 方을 추가로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해보았다.
      기록상 백제 멸망 당시 지방통치구조는 5方 37郡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중 37郡의 범위를 검토해보면, 소백산맥 以西의 충청도·전라도 일대에 해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록과 달리, 660년 멸망 때까지 백제는 소백산맥을 넘어 加耶故地 서남부 지역까지 영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록과 실상의 괴리는 신라의 加耶故地 영유권 주장 및 羅唐의 합의에서 비롯되었다고 파악해보았다. 당시 신라는 唐에게 加耶故地의 영유권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청했는데, 그 결과 백제 멸망 직후 전후처리협상에서 본래 백제의 땅이었던 加耶故地 서남부 지역이 신라에 귀속되었고, 加耶故地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이 기록상의 ‘백제강역’으로 정리된 것이라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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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濟 泗沘期의 역사에서 新羅와의 전쟁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당시의 전쟁이 백제의 흥망성쇠에 직결되기도 했고, 정치·외교 등 국가 운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요인이었기 때...

      百濟 泗沘期의 역사에서 新羅와의 전쟁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당시의 전쟁이 백제의 흥망성쇠에 직결되기도 했고, 정치·외교 등 국가 운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와의 전쟁에 대한 연구는 백제 사비기의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사비기 對신라 전쟁의 흐름과 성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그 결과로서 파생되는 영역의 변천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나아가 7세기 중엽 새롭게 확보했던 加耶故地에 대한 백제의 지배체제 문제를 다루는 한편, 멸망기 영역 관련 기록의 실상 및 작성 배경에 대해서도 나름의 분석을 시도해보았다.
      538년 泗沘遷都 이후 백제는 신라와 우호를 회복하여 高句麗의 침공에 함께 대응했고, 551년에는 공동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옛 수도 漢城을 수복했다. 하지만 신라가 고구려와의 通好를 바탕으로 553년에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취하자, 백제는 그 보복을 위해 신라의 管山城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聖王이 전사하는 등 크게 참패하였다. 불과 2~3년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백제와 신라는 동맹국에서 적대적 관계로 돌아서게 되었다.
      양국 관계의 급변으로 백제의 北界 및 東界는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最前線이 되었는데, 당시 아산만-진천-청주-문의-대전-금산-무주 일대에서 신라와 접경지대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562년 신라가 大加耶를 병합하고 경남 서부지역을 장악함에 따라, 백제의 南東界 방면에서는 장수-남원-지리산 및 섬진강 일대에서 양국의 접경이 형성되었다.
      당시 접경 일대의 상황을 보면, 신라가 소백산맥의 주요 고개를 장악하고 그 以西의 핵심거점까지 선점함으로써 前線 상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반면 백제의 입장에서 신라 王京 방향의 진군로는 소백산맥 일대의 화령로·추풍령로·덕산재로·육십령로·여원치로 5개 정도로 한정되며, 이들 교통로는 모두 신라의 지방거점(州)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공격 목표는 1차적으로 소백산맥 고개를 넘는 교두보 확보, 2차적으로는 신라의 지방거점(州) 공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사비기 對新羅戰의 방향을 신라 上州·下州·新州 세 권역으로 구분하여 정리하는 한편, 전쟁의 목표 및 전개과정을 ‘소백산맥 以東 지역 진출 교두보 확보-신라 州 治所 장악-신라 왕경 함락’이라는 세 단계로 설정해보았다.
      威德王代에는 관산성 전투의 여파로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보다는 주로 내정 안정 및 對中國 외교에 주력했다. 당시 신라도 제도 및 행정관서 정비 등 內治에 힘쓰는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신라 眞智王 재위 때 두 차례 교전을 제외하면, 양국 간의 대규모 군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백제의 본격적인 전쟁은 武王 즉위 후 602년 阿莫城 전투로 시작되었다. 당시 전투의 전개과정을 분석한 결과, 전투의 발발 원인은 신라의 小陀 등 4城 축조 및 백제 영역 침범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백제는 신라의 섬진강 수계권 진출 위협을 제거하고 신라 下州 방면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아막성을 침공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4만 대병을 동원한 백제의 공격은 신라의 방어에 막혔고, 백제의 신라 下州 방면 진출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아막성 전투의 참패 후 백제는 공격 방향을 바꾸어 椵岑城 공략을 시도했다. 가잠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한데, 684년 報德城 반란군의 設陣 장소 및 가잠성의 지리적 환경을 분석한 결과, 가잠성의 위치를 충남 금산군 추부면 일대로 비정해볼 수 있었다. 이에 백제의 가잠성 침공 목적은 신라의 논산·익산 방면 진출 위협을 제거하고 신라 管山城 및 上州 방면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해보았다. 백제는 611년 백일동안 포위 끝에 가잠성을 함락했지만, 618년에 침공을 받고 다시 신라에게 가잠성을 내주었다. 이렇듯 무왕 전기에는 불리하게 조성된 前線 속에서 신라의 진출 위협을 제거하고 신라 上·下州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아막성과 가잠성을 공략했으나, 양 방향으로의 진출 모두 좌절되고 말았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본격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무왕 후기부터였다. 백제는 624년 경남 함양에 위치했던 速含城을 함락하고 마침내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 下州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당시 백제의 진군은 육십령로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안의와 함양 일대를 장악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속함성 함락을 기점으로 백제는 신라를 일방적으로 공격하면서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왔고, 加耶故地 방면에서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다.
      무왕대 對新羅戰의 양상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623년 勒努縣 전투를 제외한 모든 공격이 신라 上州와 下州 방면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공격의 방향성은 對신라 정책의 결과로 이해되는데, 당시 백제는 新州 방면에 집중된 신라의 군사력과 방어체계·진출 후 고구려와의 군사적 대치 등을 고려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신라 新州 방면에서는 군사적 긴장감을 조성하여 신라의 관심을 돌리고, 신라 上·下州 방면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실리적인 전략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義慈王 즉위 후 백제의 신라 下州 방면 공세는 더욱 강화되었다. 642년 7월에 獼猴城 등 40성을 함락시켰고, 8월에는 신라 下州의 거점이었던 大耶城마저 함락함으로써 加耶故地의 상당 지역을 차지했다. 645년 양국의 戰場이었던 加兮城과 買利浦城의 위치로 볼 때, 당시 백제는 낙동강 서안 및 남강 하류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 후 金庾信이 본격적으로 활약함에 따라,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공방전이 加耶故地 방면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백제가 신라에게 빼앗긴 곳을 다시 수복하는 등 사실상 前線의 큰 변화는 없었다. 게다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기록된 648년 전투 기사를 분석한 결과, 김유신의 전과는 매우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대야성 일대가 신라에 넘어간 정황도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는 성주·고령 일대에서 신라와 공방전을 벌이는 가운데, 합천·의령의 以西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649년 이후에는 加耶故地 방면에서 양국 간 전투가 보이지 않으므로, 백제가 660년 멸망 때까지 加耶故地 서남부 일대를 계속 영유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백제 사비기의 공격은 대부분 신라 下州 방면에 집중되었고, 영역의 확대 또한 그곳 加耶故地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새로 확보한 지역에 대한 영역화 작업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와 관련하여 唐書의 6方 기사를 주목하였다. 여기에 6~7개 郡이 분포했던 광범위한 규모·20~35년의 영유 기간·南方城과의 지리적 격절·군사적 중요도 등을 근거로, 백제가 새로 확보한 加耶故地를 원활하게 지배하기 위해 方을 추가로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해보았다.
      기록상 백제 멸망 당시 지방통치구조는 5方 37郡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중 37郡의 범위를 검토해보면, 소백산맥 以西의 충청도·전라도 일대에 해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록과 달리, 660년 멸망 때까지 백제는 소백산맥을 넘어 加耶故地 서남부 지역까지 영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록과 실상의 괴리는 신라의 加耶故地 영유권 주장 및 羅唐의 합의에서 비롯되었다고 파악해보았다. 당시 신라는 唐에게 加耶故地의 영유권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청했는데, 그 결과 백제 멸망 직후 전후처리협상에서 본래 백제의 땅이었던 加耶故地 서남부 지역이 신라에 귀속되었고, 加耶故地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이 기록상의 ‘백제강역’으로 정리된 것이라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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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目 次
      • 國文要約
      • 序 論
      • 目 次
      • 國文要約
      • 序 論
      • 1. 연구목적 1
      • 2. 선행연구 검토 5
      • 3. 연구방법 및 연구방향 9
      • Ⅰ. 聖王·威德王代 백제·신라 관계와 接境의 형성
      • 1. 管山城 전투와 백제·신라 관계의 파국 13
      • 2. 백제·신라 간 接境의 형성과 교통로 31
      • 3. 威德王代 국내 정세와 신라와의 관계 53
      • Ⅱ. 武王 전기(600~622) 신라 서변 공략 실패와 前線의 교착
      • 1. 阿莫城 전투와 신라 下州 방면 진출 좌절 63
      • 2. 椵岑城 전투와 신라 上州 방면 진출 좌절 88
      • Ⅲ. 武王 후기(623~641) 신라 下州 방면 진출과 영역 확장
      • 1. 速含城 공취와 교두보 확보 110
      • 2. 신라 下州 방면 공세 및 上州 방면 진출 모색 120
      • 3. 武王代 對新羅 정책과 성과 139
      • Ⅳ. 義慈王代 신라 大耶州 장악과 영역의 변동
      • 1. 大耶城 공취와 加耶故地 장악 149
      • 2. 加耶故地에서의 攻防과 前線의 변동 158
      • Ⅴ. 百濟의 加耶故地 西南部 지배와 ‘백제강역’의 劃定
      • 1. 加耶故地 西南部 지배와 6方制 시행 180
      • 2. 멸망기 백제의 영역과 加耶故地 198
      • 結 論 214
      • 參考文獻 220
      • Abstract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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