陆宣公奏议是由中唐德宗代陆贽所拟的制诰, 奏草, 中书奏议的总称. 其中奏草和中 书奏议论谏讥陈时病, 并且情理并重, 深受后代文人的高度评价. 高丽朝郑克永(1067~1127) 的「请延访朝臣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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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15
학위논문(석사) --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 古文獻管理學專攻 , 2015. 2
2015
한국어
911.002 판사항(5)
경기도
v, 124 p. : 도판(특수매수에 한함) ; 26 cm
참고문헌 : p. 10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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陆宣公奏议是由中唐德宗代陆贽所拟的制诰, 奏草, 中书奏议的总称. 其中奏草和中 书奏议论谏讥陈时病, 并且情理并重, 深受后代文人的高度评价. 高丽朝郑克永(1067~1127) 的「请延访朝臣表」,...
陆宣公奏议是由中唐德宗代陆贽所拟的制诰, 奏草, 中书奏议的总称. 其中奏草和中 书奏议论谏讥陈时病, 并且情理并重, 深受后代文人的高度评价. 高丽朝郑克永(1067~1127) 的「请延访朝臣表」, 最早的提论到陆宣公奏议. 朝鲜朝关于陆宣公奏议的很多刊本发 行并且流传至今. 本文对陆宣公奏议在朝鲜时期的受容与一系列的刊行过程进行了书 志学的考察.
在朝鲜1474~1475年, 庆尚道观察使金永濡刊行了『唐陆宣公集』22卷, 这是由当 时的朝廷长老郑麟趾入手明刊本『唐陆宣公集』之后命令金永濡进行飜刻的. 他所刊 行的『唐陆宣公集』不仅在1555年后刷, 且对其之后刊行的10行19字本『唐陆宣公集』 和改订本『唐陆宣公集』带来了一定的影响, 因此陆宣公奏议备受瞩目且大行于世.
朝鲜后期英祖和正祖刊行了『唐陆宣公奏议』. 英祖从当时在朝鲜通行的改订本『唐 陆宣公集』选出12卷奏议, 另刊行了戊申字本『唐陆宣公奏议』. 正祖把戊申字本『唐陆 宣公奏议』作为底本刊行了壬辰字本『唐陆宣奏议』. 把陆宣公奏议作为经筵的教本, 是 为了处理政事时得到帮助.
在朝鲜后期, 社会的认识随着战乱产生变化, 与此同时, 出现了以实用性的方向 重新构造陆宣公奏议的动向. 结果而言, 这一动向涉及到选集的编撰. 选集的编撰意 味着, 开始重构文献而不是仅仅翻刻中国收入版. 也就是说, 从此脱离了文献的被收 容阶段, 进入了重构文献的新阶段. 这对后代文人的奏议观念起了深刻的影响, 也成 为了编撰东人奏议的始初.
终上所述, 通过陆宣公奏议在朝鲜的受容, 普及, 和一系列重构的过程, 能显现 出文献的传播与利用, 具有相当的研究意义.
陸宣公奏議는 中唐 시기 덕종을 보좌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조한 陸贄 (754~805)의 制誥 · 奏草 · 中書奏議를 총칭하는 용어이다. 특히 주초와 중서주 의는 시무에 절실하고 사정에 곡진...
陸宣公奏議는 中唐 시기 덕종을 보좌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조한 陸贄 (754~805)의 制誥 · 奏草 · 中書奏議를 총칭하는 용어이다. 특히 주초와 중서주 의는 시무에 절실하고 사정에 곡진하다고 하여 후대의 지식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高麗朝 鄭克永(1067~1127)의 「請延訪朝臣表」에 육선공주의가 처음으로 언급되고, 朝鮮朝에 육선공주의와 관련하여 다양한 판본이 간행되어 현재까지도 실물이 전해진다. 본 논문은 이에 주목하여 육선공주의가 조선에 수용되고 간행되는 일련의 과정을 서지학적으로 고찰하였다.
조선에서는 1474~1475년에 경상도관찰사 金永濡가 『唐陸宣公集』 22권을 간행하는데, 이는 당시 조정의 원로였던 鄭麟趾가 明刊本 『당육선공집』을 입수하여 김영유에게 飜刻을 명한 것이었다. 그가 간행한 『당육선공집』은 1555년에 後 刷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간행되는 10行19字本 『당육선공집』과 改訂本 『당육선공집』에도 영향을 주는데, 이를 통해 육선공주의의 전반적인 보급이 이루어졌다.
조선후기에 英祖와 正祖는 『唐陸宣公奏議』를 간행하였는데, 영조는 당시 조선 에서 通行되고 있던 개정본 『당육선공집』에서 주의 12권을 뽑아 戊申字本 『당 육선공주의』를 간행하였으며, 정조는 무신자본 『당육선공주의』를 저본으로 삼아 壬辰字本 『당육선공주의』를 간행하였다. 이는 육선공주의를 經筵의 교본으로 삼음으로써, 政事에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전란에 따른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더불어 육선공주의를 보다 실용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選集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선집의 편찬은 중국본을 수입하고 번각하기만 했던 문헌의 수동적 수용에서 벗어나 문헌을 재구성하는 수준에 진입하였음을 의미하며, 이후 지식인들의 주의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켜 東人奏議 편찬의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육선공주의가 조선에 수용, 보급되고 재구성되는 일련의 전개 양상은 문헌의 전파와 그 활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