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는 동아시아에 있어서도 고구려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기였다. 중국에 수와 당이라는 통일제국이 형성되면서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어졌으며, 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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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2014
학위논문 (박사) --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한국사전공 , 2014.8
2014
한국어
951 판사항(22)
서울
The study of Koguryeo(高句麗)'s foreign relation in the 7th centery
vi, 238 p. : 삽화 ; 26 cm
지도교수: 정병삼
참고문헌: p. 22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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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는 동아시아에 있어서도 고구려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기였다. 중국에 수와 당이라는 통일제국이 형성되면서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어졌으며, 동아시아 여러 민족과 국가들은 이들 통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제질서로의 편입이 자국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모색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재편의 시기에 고구려는 수와 당이라는 통일 중국의 일원적 국제질서로의 강요에 맞서 자국의 독립과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내부 권력을 집중시키고 대외관계를 다각화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이전까지 지속되어 온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고구려 나름의 구상의 표출이었다.
수가 건국한 후 중원을 통일하기 전까지 고구려는 돌궐이라는 견제 세력을 사이에 두고 수와 우호적인 관계로 시작했다. 그러나 돌궐이 분열되고 약화된 이후 요하 일대 유목 민족들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두고 고구려와 수는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동돌궐이 완전히 수에 신속한 이후 고구려는 수의 견제 세력을 찾는 한편 남방 쪽의 긴장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남방 쪽에 대한 공세를 강화한다. 이 과정에서 바다 건너 왜까지 교섭의 대상에 포함시켰고 왜에 대한 우호적 교섭의 과정에서 승려를 통한 백제와의 인적 연계망이 구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시기 고구려의 주된 교섭국은 수였고 고구려는 수에 대한 온건책과 강경책을 반복적으로 구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다원적인 연계망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다원적 연계망의 비활성화로 인해 고구려와 수가 충돌했을 때도 교전 지역에 속해 있던 몇몇 민족이나 국가 정도만 전쟁에 휩쓸렸을 뿐 아직 양자의 충돌이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당 역시 건국 직후에는 대내외적으로 수 말의 군웅 세력 및 돌궐의 강성으로 인해 四夷에 대한 일원적 통제를 관철하지는 못하였다. 고구려도 수와의 계속된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당과의 관계가 악화되기를 원치 않았다. 이에 고구려는 당에 대한 적극적인 유화책을 구사하였으며 그 결과 수대와 달리 僚河 일대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당에게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쉽게 내주게 되었다. 이렇듯 서북방 변경 지대에서 당에게 말갈을 제외한 주요 유목민족들에 대한 영향력을 내주게 되자 상대적으로 남방 지역에 대한 중요도가 커지게 되었다. 특히 몽골초원 방면으로 당을 견제해 줄 세력들이 모두 당에 복속되어가고 당 태종의 즉위와 함께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한 간섭이 강화되자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쌓고 당에 대한 사신 파견을 중지하는 등 강경책으로 선회하는 한편 남방 전선에 대한 안정을 위해 백제와의 우호적 연계를 모색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수대에 왜를 매개로 형성시킨 인적 연결망을 토대로 보다 진전된 형태의 사신 교환이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당에 대외정책은 설연타의 대두와 당의 사이 정책 변화 등으로 잠시 온건책으로 선회하는 듯 했으나, 연개소문 정변과 함께 당의 고구려 공격이 가시화 되면서 지속적인 긴장 상태가 유지되었고, 결국 645년 당 태종의 親征으로 양국관계는 전쟁의 시기로 돌입한다. 당 태종은 안시성의 굳건한 방어와 보급 문제, 설연타의 이반 등으로 결국 군대를 되돌리게 되지만 지속적이고 국지적인 공격을 통해 고구려의 전력을 소모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지전 역시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당은 신라와의 연합을 통해 고구려 남방으로부터의 협공과 보급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당 태종의 죽음으로 고구려와 당 양국의 충돌은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듯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양국 간 긴장이 지속되고 있었고, 결국 요하 상류 일대에서의 충돌과 남쪽으로 고구려‧백제‧말갈병에 의한 신라 공격으로 고구려와 당 양국의 충돌이 재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신라의 편을 드는 당의 태도로 인해 백제가 완전히 고구려 쪽으로 돌아섰으며 이에 당은 고구려에 대한 공격의 일환으로 백제에 대한 공격을 먼저 진행하였다. 예상치 못한 신라‧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는 빠르게 멸망하였으나 고구려‧백제‧왜의 군사적 연계는 오히려 백제부흥운동 과정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고, 고구려의 꾸준한 외교 교섭의 결과 거란과 해, 철륵 등 몽골초원 방면의 여러 유목민족들이 당에서 이반하여 고구려와 연계를 맺는다. 그 결과 신라‧당 연합군은 고구려 공격에 집중하지 못한 채 이들 고구려 연계 세력과의 전투에 전력을 소모해야만 했고, 이는 고구려와 당의 전쟁이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고구려에 의한 다원적 군사 연계는 당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 군사 연합에 의해 패배하게 되지만 당 역시 전쟁 과정에서 국력의 소모로 인해 서쪽 지역의 토번의 흥기를 막지 못했고, 그 결과 신라에게 대한 일원적인 통제 정책조차 강제할 수 없었다. 이렇듯 고구려와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당은 중원을 중심으로 한 초기 구상한 만큼의 강력한 일원적 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없었다. 이는 고구려가 구상한 다원적인 세계질서가 수와 당이 추구하고자 했던 일원적 동아시아 세계 구상에 영향을 미쳐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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