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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芬皇寺石塔 硏究 = Study on the stone pagoda of the Bunhwang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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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3481831

      • 저자
      • 발행사항

        경산 : 嶺南大學校, 2014

      • 학위논문사항
      • 발행연도

        2014

      • 작성언어

        한국어

      • KDC

        612.2 판사항(5)

      • DDC

        726.143 판사항(21)

      • 발행국(도시)

        경상북도

      • 형태사항

        xii, 165 p. : 삽화 ; 26 cm

      • 일반주기명

        참고문헌: p. 138-157

      • 소장기관
        •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우편복사 서비스
        • 영남대학교 도서관 소장기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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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본 논문은 인도에서 보이는 ‘전축식 석탑’이 어떻게 신라에 전래되었으며,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분황사(芬皇寺)라고 하는 신라 왕실사원의 불탑으로 계획·조성되어 신라석탑의 시원양식이 되었는가에 대한 연구이다.
      분황사는 종래에는 선덕여왕이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2년이라는 사찰의 건립기간은 발원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현실적인 측면을 무시한 것으로서 이는 여왕이 즉위한지 2년 후에 완성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분황사는 여왕이 발원한 사찰이라기보다 부왕이었던 진평왕의 의지로 창건한 사찰이라 하겠다.
      한편 분황사석탑은 선덕여왕대에 완성된 것만큼은 분명하고 분황사가 완성 또는 낙성된 선덕여왕 3년 정월을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분황사는 진평왕대에 건립이 시작되어 여왕 3년(634) 정월에 석탑을 포함한 사찰건립공사가 완료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는 사원창건 계획 아래 이미 마련되어 있었을 계획에 따라 불탑이 조성된 것으로 봐야 하겠다.
      분황사의 창건은 황룡사와의 관계, 그리고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相經)』의 전륜성왕 관념 등을 바탕으로 성골왕실의 정통성과 여왕후계의 당위성을 표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고기 신라의 사상적 기저를 형성하고 있던 불국토와의 인연, 즉 서축에 비견되는 또 하나의 천축 ‘동축신라’라고 하는 새로운 불국토를 구현하기 위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결국 분황사의 건립은 여왕 후계구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진평왕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자 성골왕실의 바탕을 이루는 전륜성왕 관념의 신앙적 권위를 빌어 여왕체제에 안녕을 기원한 진평왕의 바램이 담긴 산물이라 하겠다.
      분황사석탑은 임란(壬亂)을 거치면서 초층탑신과 기단부만 유지되었으며 17세기에 저술된 『퇴우당집(退憂堂集)』을 비롯한 여러 문집에서 그것이 묘사된 내용과 비교하면 현재의 모습과 거의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붕괴된 상층부에서 사리구를 발견하여 이것을 백률사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 내역은 1915년 수리 중 탑신에서 발견한 사리함내의 사리구의 내용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백률사에 모셔져 있던 사리구가 17세기 말 이후 어느 시기에 사리구가 재납(再納)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사리구를 재납하면서 탑을 수축한 것이 ‘『조선고적도』 권3’의 수리전 모습으로 생각되며 최소한 분황사석탑의 1층 탑신과 기단부 만큼은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분황사석탑의 형식 요소들은 기존에 중국 전탑과 목조건축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기보다 인도 스투파의 특징에서 그 기원을 추정할 수 있었다.
      특히 폐쇄형의 사면감실과 이를 염두에 두고 외부의례를 전제한 듯한 넓은 방형의 감실, 적출식 기법의 옥개부 표현, 그리고 사자상의 배치 등에서 고탑형(高塔形)의 당시 인도불탑의 새로운 경향을 당시의 고층목탑 형식을 빌어 표현하려던 조형의지를 살필 수 있었다. 즉 고식(古式)이 아닌 새로운 천축식(天竺式)의 불탑을 건립하기 위해 기존의 목조탑을 활용함으로써 전축식 석탑 조축법과 고탑형의 새로운 인도불탑 형식, 그리고 이를 위해 기존의 고탑식 중층형의 목조탑이 절충된 모습을 띄고 있다. 따라서 분황사 석탑은 천축식 불탑에 대한 조형의식이 반영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당서역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도 스투파는 방형의 석재로 만든다는 기본적인 인식 아래 각 지역의 기후·자연환경에 맞추어 이와 유사한 외관과 물성을 지니는 재료와 공법으로 대체·활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표적인 것이 소성벽돌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인도의 불탑이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중국에서도 방형의 석재를 이용한 불탑이 제작되었는데 적어도 7세기까지는 이러한 가공석재를 ‘塼石’이라 칭했으며, 이와는 별개로 ‘甎石’은 소성벽돌을 의미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7세기 중엽의 대안탑(大雁塔)은 원래 현장이 인도에서 돌아와 당시 인도에서의 새로운 건축법으로 5층 규모의 석탑을 조성하려다 당시의 여러 현실적 문제 때문에 전탑으로 건립되었다. 이를 통해 7세기 중엽까지 중국에서는 고층(高層)의 석탑을 건립할 기술력이 확보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塼石’을 이용한 탑형은 예외 없이 단층 또는 2층 규모에 한정되어 있다. 이것이 규모의 건축에 대한 반동적(反動的) 현상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6세기에 들어와 석조 건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남해로(南海路)를 통해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이미 석굴사원의 벽화와 조각 등을 통해 중국에도 전해져 있었던 인도식의 단층형 불탑건축에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산동지방은 7세기 초 남인도에서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연결되는 남해로의 종착지였고 특히 수양제(隋煬帝) 대에는 이 지역을 통해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불교문화와 문물들이 전래되었다. 그리고 신라는 이 지역을 통한 대 중국 교섭과정에서 많은 외래 문물과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이 무렵 진평왕은 신라왕실과 석가왕실과의 일체화를 강조함으로써 왕실의 권위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고 이 당시는 이를 위해 인도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던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인도와 서역 출신의 승려들이 신라에 들어와 왕실의 지원 아래 역경사업에 종사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인도에서 시작된 전축식 석탑에 대한 인식이 중국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인적 교류를 통해 신라에 직접 전해지기도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황룡사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과 장륙(丈六) 아육왕상(阿育王像)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신라 왕실은 이미 진흥왕대부터 불교와의 직접적인 인연이 강조되었으며,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신라에도 진평왕 대에는 이미 아육왕상과 아육왕탑 관념이 전해져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전륜성왕 관념을 지배이념으로 삼았던 신라 성골왕실에게 아육왕과 관련된 상징은 곧 전륜성왕 관념과 결합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전륜성왕 관념을 진평왕 이후 여왕체제의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구축하려 했던 신라 성골왕실은 여왕체제의 정당성과 여왕후계자의 정치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전륜성왕과의 동질성을 강조했다. 전륜성왕관념을 통해 여왕후계체제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안정적인 왕권을 과시하고자 했던 신라 왕실은 당시 중국과의 교섭 그리고 인도 승려들의 유입을 통해 전축식 석탑과 인도 불탑에 대한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신라의 불탑 조형자는 중국 석탑과는 달리 인도 스투파의 형식적 특징이 더 강조된 불탑을 여왕후계자를 위한 왕실사원에 조성했는데 이것은 조형주체의 불탑 원류에 대한 동경이자 불교와 신라의 인연을 강조하고 또 과거불과의 인연이 있는 곳의 기념탑으로서 아육왕탑의 이념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결국 분황사석탑은 순수한 종교적 의미에서의 불탑이었다기보다는 전륜성왕 관념을 지배이념으로 삼은 여왕후계체제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한 상징(Symbol)이자 기념비(Monument)로서의 의미가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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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인도에서 보이는 ‘전축식 석탑’이 어떻게 신라에 전래되었으며,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분황사(芬皇寺)라고 하는 신라 왕실사원의 불탑으로 계획·조성되어 신라석탑의 시원양...

      본 논문은 인도에서 보이는 ‘전축식 석탑’이 어떻게 신라에 전래되었으며,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분황사(芬皇寺)라고 하는 신라 왕실사원의 불탑으로 계획·조성되어 신라석탑의 시원양식이 되었는가에 대한 연구이다.
      분황사는 종래에는 선덕여왕이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2년이라는 사찰의 건립기간은 발원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현실적인 측면을 무시한 것으로서 이는 여왕이 즉위한지 2년 후에 완성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분황사는 여왕이 발원한 사찰이라기보다 부왕이었던 진평왕의 의지로 창건한 사찰이라 하겠다.
      한편 분황사석탑은 선덕여왕대에 완성된 것만큼은 분명하고 분황사가 완성 또는 낙성된 선덕여왕 3년 정월을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분황사는 진평왕대에 건립이 시작되어 여왕 3년(634) 정월에 석탑을 포함한 사찰건립공사가 완료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는 사원창건 계획 아래 이미 마련되어 있었을 계획에 따라 불탑이 조성된 것으로 봐야 하겠다.
      분황사의 창건은 황룡사와의 관계, 그리고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相經)』의 전륜성왕 관념 등을 바탕으로 성골왕실의 정통성과 여왕후계의 당위성을 표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고기 신라의 사상적 기저를 형성하고 있던 불국토와의 인연, 즉 서축에 비견되는 또 하나의 천축 ‘동축신라’라고 하는 새로운 불국토를 구현하기 위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결국 분황사의 건립은 여왕 후계구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진평왕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자 성골왕실의 바탕을 이루는 전륜성왕 관념의 신앙적 권위를 빌어 여왕체제에 안녕을 기원한 진평왕의 바램이 담긴 산물이라 하겠다.
      분황사석탑은 임란(壬亂)을 거치면서 초층탑신과 기단부만 유지되었으며 17세기에 저술된 『퇴우당집(退憂堂集)』을 비롯한 여러 문집에서 그것이 묘사된 내용과 비교하면 현재의 모습과 거의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붕괴된 상층부에서 사리구를 발견하여 이것을 백률사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 내역은 1915년 수리 중 탑신에서 발견한 사리함내의 사리구의 내용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백률사에 모셔져 있던 사리구가 17세기 말 이후 어느 시기에 사리구가 재납(再納)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사리구를 재납하면서 탑을 수축한 것이 ‘『조선고적도』 권3’의 수리전 모습으로 생각되며 최소한 분황사석탑의 1층 탑신과 기단부 만큼은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분황사석탑의 형식 요소들은 기존에 중국 전탑과 목조건축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기보다 인도 스투파의 특징에서 그 기원을 추정할 수 있었다.
      특히 폐쇄형의 사면감실과 이를 염두에 두고 외부의례를 전제한 듯한 넓은 방형의 감실, 적출식 기법의 옥개부 표현, 그리고 사자상의 배치 등에서 고탑형(高塔形)의 당시 인도불탑의 새로운 경향을 당시의 고층목탑 형식을 빌어 표현하려던 조형의지를 살필 수 있었다. 즉 고식(古式)이 아닌 새로운 천축식(天竺式)의 불탑을 건립하기 위해 기존의 목조탑을 활용함으로써 전축식 석탑 조축법과 고탑형의 새로운 인도불탑 형식, 그리고 이를 위해 기존의 고탑식 중층형의 목조탑이 절충된 모습을 띄고 있다. 따라서 분황사 석탑은 천축식 불탑에 대한 조형의식이 반영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당서역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도 스투파는 방형의 석재로 만든다는 기본적인 인식 아래 각 지역의 기후·자연환경에 맞추어 이와 유사한 외관과 물성을 지니는 재료와 공법으로 대체·활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표적인 것이 소성벽돌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인도의 불탑이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중국에서도 방형의 석재를 이용한 불탑이 제작되었는데 적어도 7세기까지는 이러한 가공석재를 ‘塼石’이라 칭했으며, 이와는 별개로 ‘甎石’은 소성벽돌을 의미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7세기 중엽의 대안탑(大雁塔)은 원래 현장이 인도에서 돌아와 당시 인도에서의 새로운 건축법으로 5층 규모의 석탑을 조성하려다 당시의 여러 현실적 문제 때문에 전탑으로 건립되었다. 이를 통해 7세기 중엽까지 중국에서는 고층(高層)의 석탑을 건립할 기술력이 확보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塼石’을 이용한 탑형은 예외 없이 단층 또는 2층 규모에 한정되어 있다. 이것이 규모의 건축에 대한 반동적(反動的) 현상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6세기에 들어와 석조 건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남해로(南海路)를 통해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이미 석굴사원의 벽화와 조각 등을 통해 중국에도 전해져 있었던 인도식의 단층형 불탑건축에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산동지방은 7세기 초 남인도에서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연결되는 남해로의 종착지였고 특히 수양제(隋煬帝) 대에는 이 지역을 통해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불교문화와 문물들이 전래되었다. 그리고 신라는 이 지역을 통한 대 중국 교섭과정에서 많은 외래 문물과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이 무렵 진평왕은 신라왕실과 석가왕실과의 일체화를 강조함으로써 왕실의 권위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고 이 당시는 이를 위해 인도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던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인도와 서역 출신의 승려들이 신라에 들어와 왕실의 지원 아래 역경사업에 종사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인도에서 시작된 전축식 석탑에 대한 인식이 중국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인적 교류를 통해 신라에 직접 전해지기도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황룡사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과 장륙(丈六) 아육왕상(阿育王像)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신라 왕실은 이미 진흥왕대부터 불교와의 직접적인 인연이 강조되었으며,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신라에도 진평왕 대에는 이미 아육왕상과 아육왕탑 관념이 전해져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전륜성왕 관념을 지배이념으로 삼았던 신라 성골왕실에게 아육왕과 관련된 상징은 곧 전륜성왕 관념과 결합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전륜성왕 관념을 진평왕 이후 여왕체제의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구축하려 했던 신라 성골왕실은 여왕체제의 정당성과 여왕후계자의 정치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전륜성왕과의 동질성을 강조했다. 전륜성왕관념을 통해 여왕후계체제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안정적인 왕권을 과시하고자 했던 신라 왕실은 당시 중국과의 교섭 그리고 인도 승려들의 유입을 통해 전축식 석탑과 인도 불탑에 대한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신라의 불탑 조형자는 중국 석탑과는 달리 인도 스투파의 형식적 특징이 더 강조된 불탑을 여왕후계자를 위한 왕실사원에 조성했는데 이것은 조형주체의 불탑 원류에 대한 동경이자 불교와 신라의 인연을 강조하고 또 과거불과의 인연이 있는 곳의 기념탑으로서 아육왕탑의 이념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결국 분황사석탑은 순수한 종교적 의미에서의 불탑이었다기보다는 전륜성왕 관념을 지배이념으로 삼은 여왕후계체제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한 상징(Symbol)이자 기념비(Monument)로서의 의미가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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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서론 1
      • 1.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1
      • 2. 기존 연구성과 검토 7
      • 3. 연구방법 16
      • Ⅰ. 서론 1
      • 1.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1
      • 2. 기존 연구성과 검토 7
      • 3. 연구방법 16
      • Ⅱ. 분황사의 창건 배경 19
      • 1. 분황사의 창건시기에 대한 재고(再考) 19
      • 2. 진평왕 말기의 정국과 후계문제 27
      • 3. 여왕후계의 사상적 배경과 분황사 32
      • Ⅲ. 분황사석탑의 현상(現狀)과 원형 검토 46
      • 1. 분황사석탑의 현상 46
      • 2. 1915년 수축(修築) 이전의 분황사석탑 50
      • 3. 분황사석탑의 원형(原形) 문제 53
      • Ⅳ. 분황사석탑의 형식 57
      • 1. 기단부(基壇部) 57
      • ⑴ 방형단층기단(方形單層基壇) 57
      • ⑵ 남면 기단 대석(臺石) 65
      • ⑶ 석사자상(石獅子像) 66
      • 2. 탑신부(塔身部) 71
      • ⑴ 사면감실(四面龕室) 및 문비(門扉) 71
      • ⑵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 80
      • ⑶ 옥개(屋蓋) 85
      • 3.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92
      • Ⅴ. ‘전축식석탑(塼築式石塔)’의 중국 전래 97
      • 1. 『대당서역기』로 살펴 본 인도 불탑 97
      • 2. ‘塼石’과 ‘甎石’의 의미 102
      • 3. 중국의 ‘전축식(塼築式) 석탑’에 대한 인식 110
      • Ⅵ. 새로운 조탑법(造塔法)의 수용과 분황사석탑 건립 121
      • 1. 신라의 대중국(對中國) 교섭과 ‘전축식’ 석탑의 전래 121
      • 2. 신라의 아육왕탑(阿育王塔) 관념과 전축식 석탑 129
      • 3. 분황사석탑의 조형의식과 조형의지 136
      • Ⅶ. 결론 143
      • 참고문헌 149
      • Abstract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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