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장덕수라는 인물을 통해 한국 근현대 자유주의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졌던 1894년 출생한 장덕수는 식민지화와 해방 이후 국가건설 과정을 오롯이 겪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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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高麗大學校, 2014
2014
한국어
911.066 판사항(5)
951.903 판사항(21)
서울
v, 347 p. ; 26 cm
권말부록: 1910년대 在日本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 임원진 ; 북미주대한인유학생총회 역대 임원
참고문헌: p. 329-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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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장덕수라는 인물을 통해 한국 근현대 자유주의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졌던 1894년 출생한 장덕수는 식민지화와 해방 이후 국가건설 과정을 오롯이 겪으며 분투하다가 1947년 12월 영욕의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한 인물이었다. 결코 평탄하지 않았던 그의 삶을 통해 크게 정치활동과 사상이라는 두 측면에서 사회적 자유주의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제1장에서는 장덕수의 출생 이후 일본유학과 삼일운동에 참가하기까지로 식민지 시기 자유주의 지식인으로 성장과 초기 민족운동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먼저 1910년대 在日留學生들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사상의 두 흐름을 분석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자본주의 근대문명을 지향하던 재일유학생들 속에서 자유주의의 흐름을 대별해내고 그 차이점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서 각각의 자유주의가 갖는 의미를 짚어보며, 장덕수가 사회적 자유주의의 경향을 보이고 있음을분석하였다. 또 장덕수가 일본 유학 중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계기를 추적하였다. 그가 민족운동에 참가하기까지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본 논문에서는 일본 유학 전후 그의 행적을 복원하고, 그가 유학 초기 지향했던 식민지 관리라는 목표를 버리고 조선의 정치가로 성장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사상적으로는 1914년경 민족문제를 자각하는 동시에 에머슨의 超越主義(Transcendentalism)를 통해 사회적 실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자유주의 경향에 기초해 초보적이나마 자신의 입론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신아동맹당에 대해서도 이제까지 발굴된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여 그 전체적인 실상을 간략히 그려보았다. 신한청년당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기존 연구의 초점이 呂運亨에 집중되어 있어 장덕수의 역할이 과소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신한청년당의 전신인 소모임이 장덕수가 上海에 온 이후에야 비로소 조직될 만큼 그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신한청년당에서 장덕수의 비중을 재고하며, 또 본 논문을 통해 신한청년당이 조직된 정확한 시점을 확정하였다.
제2장에서는 삼일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방향을 이론적으로 모색하는 과정에서 장덕수가 독서회로서 社會革命黨을 조직하여 사회주의 이론을 학습하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 이 시기 장덕수는 동아일보사 부사장 겸 논설반 주필(주간)로 『동아일보』의 수많은 사설을 직접 집필하였는데, 그는 1910년대 수용한 초보적인 수준의 사회적 자유주의 사상에 기반하여 『동아일보』 사설을 작성하고 자유주의를 선전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동아일보』 사설에서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논조가 주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에 찬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주의에 비판적이었고, 대신 사회정책을 옹호하고 있었다. 그가 『동아일보』에서 선전하던 자유주의의 형태와 내용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사상의 자유라는 범주로 분석하였다. 思想史的인 검토와 함께 장덕수가 문화운동을 전개하는 양상을 파악하여 1920년대 전반기 자유주의 민족운동의 실태를 분석하였다. 민족주의 계열 내부에 자유주의를 사상적 근거로 자본주의 근대문명의 수립을 지향했던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실례가 바로 장덕수였다. 장덕수의 문화운동론은 정치, 경제, 사회의 세 방면에서 각각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립, 學의 독립’이라는 목표 하에 전개된 조선 민족사회의 정립을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제3장은 미국유학 시기 장덕수의 활동 및 학습 과정을 통해 일제시기 자유주의의 사상적 발전을 그려보았다. 먼저 미국에서 장덕수는 유학생이었던 만큼 기본적으로 미주 유학생들의 최대거점이었던 유학생총회에서 활동하였다. 부회장으로서 동부유학생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떠오른 장덕수는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大光이라는 비밀결사에도 가담하고 있었다. 대광은 동지회의 기원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이승만의 동지회와 갈등을 빚기도 한 비밀결사였다. 대광과 동지회의 관계는 곧 장덕수와 이승만의 일방적이지만은 않은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해방 후 이승만에 대한 그의 입장을 예견해준다. 미국유학시기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중심의 통합운동론을 설파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그는 ‘張德秀派’를 형성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일대 혁명당을 조직하자고 적극 주장했다. 유학생총회, 대광, 『三一申報』 등에서 줄곧 이런 주장을 관철시켰다.
다음으로 미국 유학 이후 장덕수가 제출한 석·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그의 사회적 자유주의가 지향하던 정치·경제 사상을 분석하였다. 「마르크스 국가 개념의 비판적 검토」라는 제목으로 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장덕수의 이 논문은 그가 처음으로 국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므로 심도 깊게 분석될 필요가 있다. 또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함으로써 그의 고려공산당 활동을 부정적으로 매듭짓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박사학위는 1936년 콜롬비아대학에서 『산업평화의 영국적 방법-노동쟁의에 관한 민주주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취득하였다. 여기서 그가 관심을 기울인 소재는 노동쟁의의 평화적 해결 기구였다. 영국에서는 노동쟁의가 발생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아지면, 문제가 되는 사안의 당사자인 노동자와 자본가는 물론이고 공익의 측면에서 정부 또한 調査, 調整, 仲裁 등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역사적 과정을 장덕수는 『산업평화의 영국적 방법』을 통해 설명하였다. 산업분규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한 장덕수의 결론은 노동과 자본이 상생하는 자유주의적 복지국가에 다다랐고, 이는 향후 독립할 민족국가에 관한 구상이었다.
제4장은 장덕수가 1936년 12월 귀국한 이후 일본의 파시즘적 思想統制에 저항하지 못하고 轉向과 친일로 굴절되는 모습을 서술하였다. 戰時體制期 일본의 파시즘적 사상통제에 장덕수를 위시한 자유주의자들은 전향하며 친일로 굴종하였다. 장덕수는 한때 사회주의운동에 동참하기도 했지만, 1938년 전향의 계기는 흥업구락부 사건이었다. 그의 전향은 사회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자로서의 전향이었다. 사회복지 체제를 지향하던 장덕수의 사회적 자유주의는 생산력 확충을 위해 ‘국민생활 안정’을 내걸었던 일본의 戰時統制政策에서 추진한 戰時社會政策의 ‘혁신적’ 측면과 접목될 여지가 존재했다. 전쟁을 위한 목적성 사회복지가 논의되는 역설적 상황에서 복지국가 체제를 지향하던 장덕수 역시 일본의 전시동원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충실한 선전원이 되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中日戰爭 이후 일본의 전향정책의 특징을 파악하여 장덕수가 전향한 당시의 時代像을 반추하고, 그의 전향과 친일활동을 정리하였다. 또 그의 사회적 자유주의가 일본의 전시사회정책과 맞물려 친일논리로 합리화되고, 결국은 전시동원이데올로기로 복무하는 양상을 분석하였다.
제5장에서는 해방 직후 눈앞으로 다가온 독립국가 건설의 희망 속에서 장덕수가 한민당을 매개로 자유주의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모색하였지만, 대립적인 좌우의 경쟁구도 속에 점차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해 가며 지향하고자 했던 자유주의를 형해화시키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먼저 한민당의 정책과 노선, 정치적 입장을 단순히 상황논리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을 채택하고 추진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장덕수를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 또 한민당의 과도정부 수립노선도 장덕수를 중심으로 분석하여, 한편에서는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통일전선을 결성해 ‘과도정부의 모체’를 수립하려는 움직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미군정의 협조 하에 ‘先 과도정부 수립 後 반탁’이라는 미소공위 대응전략이 일관되게 추진되고 있었음을 논증하였다. 해방 이후 과도정부 수립의 결정적 키를 쥐고 있던 미소공위에 대한 대응방안을 둘러싸고 한민당의 동향은 소위 반탁진영의 맹주였던 이승만 및 김구와 다른 나름의 논리와 일관된 노선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장덕수가 있었다.
다음으로 장덕수가 반공주의로 수렴되면서 자유주의적 가치들이 절차적·형식적 측면으로 형해화되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일제말기 친일 활동으로 ‘상처입은 자유주의’는 해방 이후 반공주의라는 友軍을 얻어 사회주의의 공격을 막아내며 재기하였다. 장덕수 역시 반공주의로 수렴되었지만 원래부터 반공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해방직후 국가건설 과정에서 원활한 과도정부 수립을 위해서는 좌파와의 합작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결과적으로 좌파와의 연대가 계속 결렬되고 좌우대립이 심해지면서, 결정적으로는 미소공위가 결렬되면서 반공주의에 기울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어쨌든 반공체제가 수립되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절차적·형식적 측면으로 축소되는 과정에서 장덕수의 사회적 자유주의 역시 반공주의에 전유되어 왜곡되었는데, 이를 당시 정세인식과 좌익에 대한 인식변화를 통해 추론하였다.
요컨대 본 논문에서는 한국 근현대 자유주의의 전개과정을 장덕수의 사례를 따라 분석하고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첫째, 1910년대 자유주의 지식인이 성장하며 자유주의는 식민지 민족주의의 일차적 이데올로기 중 하나로 작동하였고, 문화운동 형태로 외화되었음을 분석하였다. 둘째, 그 과정에서 1920년대 전반 사회주의와 갈등을 겪으며 분화된 자유주의는 자유주의 민족운동으로 문화운동을 전개하며 조선인 민족사회의 정립을 추구하였음을 논증하였다. 셋째, 1920년대 중반 영미 유학을 통해 선진 자유주의국가를 체험하며 자유주의적 산업민주주의와 사회복지 체제를 제시하는 등 知的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넷째, 중일전쟁 이후 일본 파시즘의 압력에 전향하면서 국책이데올로기로 동원된 자유주의는 식민지적 한계를 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째, 해방 이후 국가 건설의 과정에서 사회적 자유주의가 정책적 노선으로 표출되었지만, 반공에 전유되어 절차적 형식적 자유민주주의로 축소되면서 형해화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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