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17세기 조선후기부터 20세기 ‘만주국’ 시기까지 한국인의 만주에 관한 담론을 분석하였다. 만주는 한국인에게 무엇이었고, 이것이 현실의 한국인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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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한양대학교 대학원, 2014
학위논문(박사) -- 한양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한국사 전공 , 2014. 2
2014
한국어
서울
xii, 249 p. : 삽도 ; 26 cm.
지도교수: 박찬승
권두에 국문요지, 권말에 Abstract 수록
참고문헌: p. 23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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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이 논문은 17세기 조선후기부터 20세기 ‘만주국’ 시기까지 한국인의 만주에 관한 담론을 분석하였다. 만주는 한국인에게 무엇이었고, 이것이 현실의 한국인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
이 논문은 17세기 조선후기부터 20세기 ‘만주국’ 시기까지 한국인의 만주에 관한 담론을 분석하였다. 만주는 한국인에게 무엇이었고, 이것이 현실의 한국인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한국인은 만주라는 타자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다양한 현실적 과제를 해결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17세기 이래 한국인의 만주 인식은 다음과 같이 다섯 시기의 질적 차이를 보이며 전개하였다. 첫 번째는 조선후기로서 만주에 대한 기본적 표상인 ‘만주=故土’ 의식이 형성된 시기이다. 17세기 중엽 이후 조선에서는 ‘조선=中華’ 의식과 함께 만주를 기자의 강역로 보는 ‘만주=고토’ 의식이 대두하였다. 유형원 이후 요동일대를 기자강역으로 보았고, 허목은 ‘선춘령 두만강 이북설’도 주장하였다. 이익은 단군강역의 중심을 遼瀋으로 보았고, 기자의 강역이 요서까지 미쳤다고 보았다. 기자강역 요서설은 안정복, 이긍익, 이종휘 등에게로 전승되었다. 대체로 ‘만주=고토’ 의식은 숙종 대에 북벌론이 퇴조하고 폐사군 복치 주장이 대두하면서 발전하였고, 영·정조 대에 이르러서는 고토회복 의식으로까지 진전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만주족=夷狄’ 의식이 북벌론 퇴조 이후에 ‘만주=고토’ 의식과 결합하여 나타난 결과였다. 예컨대 ‘만주족=이적’ 의식과 ‘만주=고토’ 의식이 누구보다도 강하였던 이종휘는 「取遼瀋」이란 글에서 만주를 취할 것을 적극 주장했다. ‘만주=고토’ 의식의 성장은 18세기 말에는 두만강 너머에 있는 분계강이 조선의 국경이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두만강 대안으로 이주자가 증가하면서 분계강론은 1885년과 1887년 간도영토문제가 발생하는 사상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두 번째 대한제국기에는 만주이주가 본격화되면서 간도영토론과 ‘만주=단군강역’론이 등장하였다. 간도영토론은 조선후기에 있었던 ‘선춘령 두만강 이북설’과 ‘분계강론’에 입각하여 전개되었다. 간도영토론은 영토로 주장하는 경계선이 일정하지 않고, 불명확한 지리 지식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고 취약한 영토의식이었다. 통감부시기에는 일진회가 통감부간도파출소와 함께 간도영토론을 강력히 주장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진회와 통감부가 간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군사적 긴장만을 고조시킨다고 비판하였고, 간도 소속을 청국의 주권으로 승인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이러한 태도는 일제의 간도침략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영토주권에 대한 현실성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1908년 중반 이후 간도가 청국 영토로 인정되자,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을 중심으로 만주 인식의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단군의 발상지를 백두산으로 보는 동시에 만주를 단군의 강역으로 비정하면서, 또한 만주족을 단군의 후예로 간주하는 견해가 그것이다. ‘만주=단군강역’론과 ‘만주족=단군후예’론은 만주를 민족 주권회복의 역사적 근거지로 표상하였다. 특히 ‘만주족=단군후예’론은 조선후기 夷狄視하던 만주족을 한민족과 동일시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와 동시에 만주를 민족의 이주지나 상품시장으로 보는 견해도 나타났다. 이런 인식에는 만주에서 일본 등 열강과 경쟁하여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주권을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세 번째로 ‘합병’ 전후 조선인의 만주이주가 급증하는 가운데, 만주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만주=단군강역’론과 ‘만주족=단군후예’론이 공유되기에 이르렀고, 국내에서는 매일신보를 중심으로 ‘만주식민’론이 대두하였다. 신채호, 박은식, 이상룡 등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히 ‘백두산=단군발상지’론과 ‘만주=단군강역’론이나 ‘만주=단군후예’론을 주창하였다. 만주가 독립운동근거지로서 유리한 지리적 조건과 인적 기반을 갖춘 곳이라는 점을 역사적으로 입증하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신채호와 이상룡은 만주가 기자조선의 강역이었다는 설을 부정하였다. 기자조선설이나 소중화 사상에 대한 비판은 ‘만주=단군강역’론이나 ‘만주=단군후예’론이 보여준 특징이었다.
1915년 이후 매일신보는 조선인의 만주이주를 ‘고토회복’에 비유하고, 만주가 ‘조선 민족의 발원지’이자 ‘발전의 책원지’라고 하면서, 만주이주를 장려하였다. 장지연은 만주가 고조선과 고구려의 ‘故地’이므로 조선인이 ‘移植’하면 해롭지 않다고 했고, 1918년경 만주와 시베리아는 이미 ‘조선인 殖民地’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만주 일대가 기자조선의 강역이었다고 인정하였다. 장지연이나 매일신보의 만주 인식은 1915년 일본이 滿蒙의 ‘특수권익’을 획득하기 위해 중국과 체결한 ‘남만주 및 동몽고에 관한 조약’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네 번째 1920년대 만주 인식의 양상은 이제 국내에서도 ‘백두산=단군발상지’론이나 ‘만주=단군강역’론과 ‘만주족=단군후예’론이 일반적으로 확립되었다. 기자조선설은 일부 한학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식인들에게서 부정되었고, 이제 만주는 한국 민족의 역사적 요람지이자 개척지로서 정립되었다.
한편으로 만주로 이주해 온 조선인들이 1927년부터 중국 관헌으로부터 박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인들은 대개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으로 궁핍화된 빈농 출신이었다. 이제 현실의 만주에서는 단군 대신에 ‘무산자’라는 일반 빈농이 관심의 초점이 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이 박해당한 방법으로는 토지·가옥 대차의 거절, 소작료와 집세 인상, 학교 해산과 폐쇄, 퇴거 명령, 구타나 폭행 등뿐만 아니라 학살을 당한 경우도 많았다.
조선일보는 재만조선인에 대한 박해가 격심해진 사태는 중국인의 반일운동, 중국 군벌의 탄압정치, 일제의 만몽 침탈정책이 동시에 어우러져 빚어낸 결과라고 말했다. 재만조선인에게는 ‘시민적 안전 생활’과 ‘일정한 自治互助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기본적 과제라면서, 재만조선인이 집단적으로 중국입적을 단행하여, 중국 법령 하에 “民族同權의 원칙에 의하여 一市民으로서의 정치적·경제적 및 기타 일반의 법익을 확보하기를 기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주문하였다. 이로써 재만조선인 ‘무산자’는 만주에 대한 적대적 타자인식의 지양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담당하게 되었다.
다섯 번째 ‘만주사변’과 ‘만주국’ 시기 국내 언론에서 재만조선인의 생활안정과 자치구 설립 문제는 재만조선인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적 과제로 인식되었다. 이 점은 국내에서 재만조선인문제에 대한 인식이 분화하는 핵심적 요인이 되었다. 1931년 만보산사건과 ‘만주사변’으로 국내에서 재만조선인의 자치구 설립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민족주의 계열의 잡지 『동광』에서는 재만조선인이 중국인과 잡거하거나 구역을 정하여 조선인의 자치부락을 만드는 것이 당면과제라고 말하였다. 사회주의 계열의 잡지 『비판』에서는 재만조선인이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하에 민족 발전과 평등을 수립하기 위해 투쟁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만주사변’을 전후하여 국내외 좌우의 운동진영에서는 재만조선인 자치권 획득의 방안에 대해 각각 다른 방략으로 분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재만조선인의 민족평등권을 확립하고 자치구를 설립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1932년 ‘만주국’ 성립 이후에도 국내의 비판적 언론들은 재만조선인의 과업은 생활안정과 자치의 확보에 있다고 보았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만주국’의 ‘자작농 창정’ 정책, ‘만주화’ 교육정책, ‘민족협화’ 정책 등이 재만조선인의 안정적 생활을 확보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자작농 창정’ 정책, 토지매수나 수전개척, 집단이민 정책, ‘만주화’ 교육정책보다는 조선인의 생활안정과 정치·문화생활의 자치를 확보하는 일이 기본 과제라고 하였다. 한편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만주국’ 정책에 협력을 종용하는 지식인의 글들이 다수 발표되었다. ‘만주국’과 중일전쟁을 옹호한 최남선의 경우 조선인의 만주이주를 ‘역사적 고향으로의 귀환’이라며 ‘만주국’을 조선인의 발전지라고 하였다. 만선일보 사장 이성재도 조선인의 만주이주를 조상의 향토에 귀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만주국’ 명예총영사인 김연수는 ‘만주국’에서 재만조선인의 장래는 유망하다면서 조선인의 ‘만주국’으로 이주를 장려하였다. ‘만주국’에 협력한 지식인들은 거의 모두가 재만조선인의 장래를 미화하며 조선인의 만주이주와 ‘만주국’에의 충성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재만조선인의 생활안정이나 민족평등의 자치 확립보다 ‘만주국’ 구성분자로서 조선인 위상을 우선시하였다.
이상과 같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한국인은 자신의 다양한 현실적 과제에 따라 만주를 인식하여 왔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변화와 이로 인해 만주로 이주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다. 만주 땅에 대한 인식으로 만주고토 의식, 간도영토 의식, 단군강역 의식, 독립근거지 의식, 이주식민지 의식, 민족자치구 의식 등이 전개하였고, 만주의 사람에 대한 인식으로는 夷狄 의식, 단군동족 의식, 民族同權 의식 등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의식들은 시대에 따라 복수설치, 주권회복, 독립운동, 농민궁핍화, 조선인 박해 등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상적 실천의 결과이었다. 특히 민족동권 의식이나 민족자치구 의식은 1920년대 말 재만조선인 박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인과 상호이해를 지향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었다. 만주에서 중국인에 대하여 민족평등주의를 지향하고서야 비로소 식민지 조선인은 자신의 정치경제적 모순의 산물인 재만조선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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