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佛에서 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구체적인 숫자보다는 일반적으로 무수히 많다는 의미를 뜻하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천불은 불교가 시작된 초기부터 인도와 서역 그리고 중국에서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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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덕성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2012
學位論文(碩士) -- 德成女子大學校 一般大學院 , 文化財學科 , 2012. 8
2012
한국어
708 판사항(22)
서울
162 p. : 삽도 ; 26 cm
참고문헌 p. 10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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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佛에서 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구체적인 숫자보다는 일반적으로 무수히 많다는 의미를 뜻하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천불은 불교가 시작된 초기부터 인도와 서역 그리고 중국에서 회화 또는 조각으로 조성되어 많은 예가 남아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조성되었다. 이 논문에서 통일신라시대를 다루는 것은 이 시기 천불상이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로 그 시대만의 특수성이 잘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 천불상은 문헌자료 및 작품이 부족한 삼국시대 불교미술을 이해하고, 나아가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의 전체적인 불교미술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 중요하다.
우선 천불의 개념에 대해 정리하면 넓은 의미에서는 실질적으로 많은 불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다불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다불화현, 화불 등까지 포함하였다. 한편, 경전에서 많이 언급되는 ‘十方諸佛’ 또는 ‘무수히 많은 불’ 등의 경우와 불상의 형식 또는 시각화한 방식 등을 따지지 않고 수많은 불을 표현하였다면 좁은 의미로서의 천불로 보았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불교미술 중 천불상의 가장 이른 예로 중국 병령사 169굴 남벽에 남아있는 소조상(420년)이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1세경에 성립된 경전에서 이미 천불이 등장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 간다라 사원의 탑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는 소형 사당에 불상이 반복적으로 봉안된 것을 천불상의 시원으로 추정하였다. 간다라 사원에서 조성되기 시작한 천불상은 서역 사원에서도 나타나며, 중국이나 서역 석굴사원의 천불상은 벽면을 가득 채우다가 점차적으로 천정으로 배치되어 장엄적인 기능이 강조되었다.
천불신앙과 조상은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된 시기와 거의 동시에 함께 전달되어 우리나라 초기 불교미술에서부터 영향을 끼쳤는데, 이는 불교미술에서 最古의 기년명을 가진 연가7년명(539) 금동불입상이 천불신앙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불교가 전래된 고구려는 당시 밀접하게 교류했던 중국 전진 또는 동진의 영향으로 천불이 수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삼국시대 천불의 수용과 신앙은 통일신라시대 천불상이 활발하게 조성될 수 있었던 기반을 제공하게 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천불상의 조성은 삼국통일 과정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이루어졌으며, 초기 밀교, 화엄경, 유가유식 등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사상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구성에 따라 네 가지 형식으로 나누어 특징을 살펴보면, 佛像 형식은 불상만으로 나열되는 방식이고, 佛像과 文樣 형식은 불상이 나열된 사이사이에 문양이 배치된 형식으로 모든 작품이 탑 부재용이다. 佛像과 塔 형식은 불상과 탑이 교대로 배치되는 형식으로 지금까지 가장 많은 수량이 발견되었으며, 불상과 문양 형식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탑 부재용이다. 三尊佛像과 塔 형식은 중앙에 본존을 두고 양쪽으로 협시가 배치된 삼존불 양 끝에 각각 탑이 배치된 경우이다.
통일신라시대 천불상은 중국이나 서역의 천불상과 비교하여 예배적인 성격이 강하며, 대부분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중반에 집중적으로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경주를 중심으로 조성된 이유로는 경제적 능력을 지닌 지배층 세력의 뒷받침이 필요했기 때문이며, 이는 천불상과 관련된 사찰에서 모두 고신라의 기와가 출토된 점으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천불탑의 부재인 전돌도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와요지로부터 공급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경주지역을 비롯하여 울산과 청도지역에서 조성된 것은 울산이 당시 중요 항구로서 경주와 밀접하게 교류했으며, 청도는 주요 교통로로서 주민들이 왕경 내의 공사에 동원되기도 했던 점이 천불탑이 건립될 수 있었던 근거이다.
형식 분류를 통해 불상 중심에서 불상과 함께 문양 또는 탑이 나열되면서 복잡하고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되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가장 많은 수량이 발견된 불상과 탑 형식은 탑의 부재로서 7세기 후반부터 건립된 전탑의 도상으로 가장 전형적인 형식이며, 안동 지역의 전탑과 비교하여 뒤지지 않을 만큼 활발하게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불상과 문양, 불상과 탑 형식을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과 비교하여 초기 밀교 경전인 『관불삼매해경』과의 연관성에 대해 살펴봄으로서 통일신라시대 천불상은 초기 밀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천불상은 불교미술사에서 중요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소홀히 다루어진 주제로, 중국이나 서역의 석굴사원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세계 유일한 예로 통일신라미술의 독창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는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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