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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ㆍ契丹의 압록강 지역 영토분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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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286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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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거란과 경계를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 고려의 현실적인 영역은 鴨綠江 邊까지였다. 崔承老의 時務28條의 내용 중에, 馬歇灘으로 경계를 삼은 것은 太祖의 뜻이고, 鴨綠江 변의 石城으로 경계를 삼은 것은 大朝 즉, 光宗의 정한 바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란 협공을 위해 985년 고려에 온 한국화의 활동을 담은 󰡔한국화신도비󰡕에도 당시 고려의 限界가 압록강의 다른 이름인 浿江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양국 간에 영토분쟁이 발생한 것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경계를 접하게 된 이후부터였다. 거란은 高麗와 宋의 軍事的, 政治的 연합을 방지하고 상하관계 설립을 통해 고려에 거란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993년(成宗 12)에 고려 침입을 단행하였다. 당시 거란의 전쟁 책임자는 東京留守인 蕭遜寧으로, 주축병력은 東京遼陽府 일대의 鄕丁이었다. 東京留守와 같이 특정 지방관에게 명하여 주변 지역을 공격하도록 하는 경우에는 적국의 경계를 넘어 깊이 들어가지 않고, 경계로부터 대략 300리 정도 내에서 활동하면서 적에게 경제적 손실을 입혀 방비태세를 약화시키거나 외교적 압력을 가하는 제한적인 목적을 지닌 군사행동이었다. 따라서 거란의 1차 침입은 접경지대에서 전개되는 국지전의 성격을 띠었을 뿐, 전면전을 염두에 둔 병력 동원은 아니었다.
      소손녕은 거란이 소유인 고구려의 땅을 고려가 침식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거란이 사방을 통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귀부하지 않은 채 송과의 교류가 침입의 명분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그러면서, 고려가 땅을 떼어 바치고 朝聘을 한다면 더 이상 전쟁이 확대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거란의 군사행동은 전면전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는 영토문제가 거란 침입의 핵심이라기보다는 고려로부터 우위를 확인받고 송과의 단교에 목적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거란과 고려는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각각 역사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소손녕은 고려가 고구려가 아닌 신라를 계승했다는 논리를 펴자, 서희는 國號를 ‘高麗’로 하고, 평양을 都邑로 삼았다는 점을 근거로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주장하였다. 결국 소손녕도 서희의 반박논리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양국은 994년 2월에 고려가 거란에 조공을 하고 송과 외교관계 단절을 약속하면서 강화를 하였는데, 양국 간에는 이후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경계를 명료하게 할 필요를 느꼈고, 徐熙와 蕭遜寧 간의 협상을 통해 이를 확정하였다.
      고려와 거란은 당시 여진이 고려와 거란 사이의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양국이 모두 완벽하게 그 지역을 통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이 지역을 완충지대로 삼아 영토협상을 마무리하였다. 이 협상에서 거란은 ‘天皇鶴柱之城’ 즉, 遼東지역의 서쪽을 자국의 영역으로 정하고 고려에게는 鴨綠江으로 합류하는 ‘日子鼈橋之水’를 기준으로 동쪽을 고려의 경계로 삼았다. 아울러 고려는 거란의 우위를 인정해주는 대신 압록강 유역의 지배에 있어 고려가 우선권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이는 고려의 실리주의적 대외정책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거란이 압록강 유역 女眞에 대한 고려의 지배권을 보장해준 데에는, 이 지역이 상대적으로 거란보다는 고려의 세력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고려가 압록강 밖의 여진 지역을 수복한 다음에 거란에 조근을 하기로 약속했는데, 이는 무조건적으로 사대관계를 맺어야 하는 굴복이 아닌 대등한 협상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은 협상과정에서 서희가 소손녕과 남북으로 앉지 않고 동서로 앉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서희가 신속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양국의 관계가 대등한 입장이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려는 성종대 거란과 책봉-조공관계를 맺었지만, 999년(穆宗 2)과 1003년 송에 원병을 청하는 등 거란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거란은 康兆의 弑逆을 명분으로 삼아, 1010년(顯宗 원년) 고려를 다시 침입하였다. 이때는 거란 聖宗이 親征을 하였는데, 거란에서 황제의 친정은 원정 대상이 되는 지역을 정복해 영토로 차지하거나, 속국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병력동원이었다. 실제로 거란은 1010년 12월 開城을 함락시키기도 전에 이미 政事舍人 馬保佑를 거란의 지방관직인 留守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거란이 1010년 침공을 단순한 복속이 아닌 영토 정복에 초점을 맞춘 군사행동이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고려는 현종의 親朝를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거란의 군대를 돌리는데 성공을 했는데, 승천황태후 사망 후 親征까지 해가며 심혈을 기울였던 고려와의 전쟁에서 정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거란 聖宗은 그 권위에 상처를 입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한 수단으로, 현종의 親朝를 요구하였다. 친조는 유목민족에게는 실질적인 복속을 의미하는 행위였고 이를 통해 표면적으로나마 聖宗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는 현종의 신병을 핑계로 이를 거부하였다. 친조를 통해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던 거란 聖宗은 분노하여 成宗代 협상에서 고려에 넘겨주었다고 여긴 興化․通州․龍州․鐵州․郭州․龜州 등 6성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994년 9월 초순부터 10월 상순까지 서희가 쌓은 성이 長興鎭․歸化鎭․郭州․龜州 등의 4성이었다는 점에서 거란의 6성 요구는 합당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고려가 거란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서북방의 유목부족들과의 무력 충돌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자, 거란은 고려에 다시 무력 충돌을 감행하였다. 그 본격적인 시작은 압록강에 浮橋를 설치하고 그 이동을 점유하는 1015년 정월부터였다. 거란의 압록강 이동 점유는 최전방에서 천연 방어막 역할을 해주던 압록강이 그 역할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려는 언제든지 거란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기를 느낀 고려는 사신 파견 등을 통해 외교적으로 해결을 모색하던 기존의 태도를 버리고, 거란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군사적으로 맞대응을 하는 강경책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이로 인해 양국 간에는 대규모 무력충돌이 이어졌는데, 蕭排押이 龜州에서 고려군에 참패를 당하는 1019년 正月까지 지속되었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고려가 1120년에 그 동안 억류시켰던 사신 耶律行平을 돌려보내고 稱藩과 納貢을 거란에 약속하면서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고려는 이 과정에서 압록강 이동의 거란 점유지 반환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이 지역이 거란 멸망 직전까지 양국 갈등의 핵심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일처리였다. 1015년 이후 거란이 점유한 지역은 鴨淥江 동쪽 8리에 위치한 黃土嶺까지였다. 반면 고려의 최전방은 평안북도 피현군 당후리 쏙새산에 위치한 ‘걸망성’이라 불리는 興化鎭이었다. 황토령은 의주와 걸망성 사이에 있는 전문령과 가로령으로 비정되는데, 成宗代 요동과 압록강 지류를 완충지대로 삼던 경계대가 현종대 전쟁 이후 압록강 이동으로 후퇴해서 황토령을 완충지대로 삼아 다시 경계가 설정되었고, 이후 103년 동안 황토령이 경계의 역할을 담당했다.
      거란이 멸망할 때까지 양국 간에는 대규모 무력충돌은 다시 발생하지 않았지만, 거란은 압록강 이동에 점유한 지역인 抱州를 적극 활용하여 고려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황토령이 완충지대로 놓여 있기는 하였지만, 成宗代의 ‘天皇鶴柱之城’과 ‘日子鼈橋之水’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와는 고려가 느끼는 압박감은 차원이 달랐다. 자연방어막이었던 압록강이 갖는 이점을 누릴 수 없게 된 고려는 언제 거란의 침입을 당할지 모르는 처지에 항상 놓이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는 거란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의 침략 가능성을 높게 본 고려는 德宗이 즉위한 해인 1031년에 압록강 동안 지역의 반환을 거란 聖宗의 장례식에 참여한 金行恭을 통해 제기하였다. 이 요청을 거란이 받아들이지 않자, 고려는 賀正使 파견을 정지하고 새 황제 興宗의 연호대신 전 황제 聖宗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면서 거란과 대립각을 세웠다. 아울러 來遠城에 이른 거란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거나, 朔州․寧仁鎭․波川 등에 성을 쌓고 北境에 關城을 創置하는 등 전쟁까지 염두에 둔 강경 대응으로 전환하였다.
      고려의 강경대응은 1039년(靖宗 5)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阻卜과의 충돌을 해결한 거란이 다시 선병을 동원해 압록강을 침입하거나 압록강 이동에 城堡를 加築하여 고려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면서 상황에 변화가 일었다. 고려 내부적으로도 강경 대응을 주장하던 이들의 死去가 이어지고, 온건 성향을 가진 이들로 정치세력이 교체되면서 거란과의 화친으로 정책이 변하였다. 이후 양국의 관계는 거란 멸망 직전까지 커다란 변화를 겪지 않고 유지되었다.
      고려가 화친으로 정책 변화를 주었지만, 여전히 압록강 이동의 영토문제로 인한 갈등요소는 남아 있었다. 거란의 움직임을 고려 침입과 관련해 우려를 가지고 있던 고려는 1039년(靖宗 5) 庾先을 파견하여 압록강 동쪽에 加築한 城堡를 파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거란은 고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거란은 宋에 關南 10성을 요구하여 歲幣를 증액 받기로 하는 등 동아시아의 정세를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고려는 이에 대해서 더 이상 문제제기를 할 수는 없었다. 거란이 주변에 있던 모든 세력들을 복속시키는 등 국력이 한참 강해진 상황에서 城堡문제를 제기했다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고, 무력 충돌까지 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거란도 고려와의 앞선 연속된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고려와의 무력 충돌에 부담을 가지고 있었고 성보 가축은 군사적 목적이 아닌 농사용으로 쓰일 것임을 강조하며 고려에 타협책을 제시하며, 일단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1054년(文宗 8)이후 거란은 다시 抱州 동쪽들에 弓口門欄을 설치하거나, 郵亭을 설치하면서 고려의 옛 경계선을 침범하며, 고려를 압박하였다. 고려는 시설물 설치에 대해, 영토를 침삭당하는 근심이 있다거나, 또는 장차 고려의 강토를 침략하려는 것이라는 우려를 거란에 토로하며 설치 철회를 요구하였다. 당시 고려가 거란에 점유지 반환을 요청한 것은 成宗代 거란 昇天皇太后와의 협상 내용을 그 근거로 들었다. 고려는 ‘거란의 前 太后皇帝가 詔書로 鴨江 동쪽으로 우리나라 경계를 봉해 주었다’거나, ‘前 皇太后陛下께서 압록강으로 한계를 그었다’ 또는 ‘前 太后皇帝가 鴨江으로 한계를 삼았다는 國書를 보냈다’는 등 내용을 전제로 하여 반환을 요구했다. 이러한 고려의 태도는 현종대 이후에 황토령을 완충지대로 삼게 된 현실을 인정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거란에 불쾌감을 주지 않으면서도 자연방어선인 압록강선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행동이었다.
      1056년 고려는 압록강 이동에 설치한 각종 시설물을 철거해 줄 것을 거란에 요청하여, 압록강 전면의 정자를 부분 철거하게 하는 성과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거란은 1057년에는 松嶺 동북의 토지를 개간하고 암자를 설치하였으며, 1062년에는 義宣軍 남쪽에 賣買院을, 1074년에는 定戎城 북쪽에 探守庵을 세우는 등 지속적으로 고려에 압박을 가하였다.
      고려는 궁구문란이나 우정 등의 설치를 거란이 군사시설을 확대하려는 행동으로 인식하고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하며, 거란에 철거를 계속 요청하였다. 반면에 거란은 고려의 요구를 완전히 거절하지도, 그렇다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도 않는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고려의 움직임을 제어하려고 했다.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거란의 입장에서 보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압록강 이동지역을 굳이 고려에 돌려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 지역에서 갈등 조장은 고려가 송과 교류를 하는 것을 제어하는 효과를 노린 측면도 있다. 1058년에 내사문하성이 송과의 교류가 거란과의 불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문종의 국교재개 시도를 반대한 사실에서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거란은 靖宗代부터 고려와의 관계에서 효과를 보던 압록강 이동지역에서 갈등을 조장해 자국에 유리하게 양국관계를 이어가려는 정책을 문종대까지 유지해 왔는데, 이러한 정책은 1068년부터 고려와 송이 국교재개를 시도하면서 용도가 폐기되었다. 거란에 압박을 받은 고려와 송이 1068년부터 국교재개를 시도해 거란과 세력균형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당시 고려와 송은 공통적으로 거란의 위협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견제해 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양국의 교류는 1078년에 성사되었는데, 고려와 송의 국교재개 움직임이 보이자, 거란은 1072년부터 1075년까지 송과 영토문제를 일으켰고, 1075년에는 고려에 영토반환을 제안하며, 양국의 국교재개를 막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송을 매개로 고려와 거란이 세력균형을 이룬 후, 고려와 거란 사이에 영토분쟁으로 인한 갈등은 더 이상 불거지지 않았다. 거란이 포주지역에서 군사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 고려와 송이 사신 왕래를 시작한 이상 양국의 교류를 견제하기 위한 경계지역에서 군사행동은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도 더 이상 시설물 제거와 영토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거란과 세력균형을 이룬 이상 굳이 영토문제를 거론해 거란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宣宗代에 가서 고려와 거란 사이에 鴨綠江 越境문제가 아닌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설치된 榷場 설치 문제가 잠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거란의 각장 설치 계획이 고려의 반대로 무산된 이후, 肅宗․睿宗代는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영토문제로 인한 충돌사태는 나타나지 않았다.
      睿宗代에 들어서서 遼東지역에서 女眞이 급성장하였는데, 來遠城과 抱州(把州)까지 그 영향을 미쳤는데, 이로 인해 1116년부터 1117년 사이에 고려의 주된 관심사는 내원성과 포주문제였다. 포주 지역은 거란이 압록강 이동에 점유한 지역으로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 요동지역을 여진이 차지하면서 거란이 점유하고 있던 來遠과 抱州가 장기간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고려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來遠과 抱州의 고려 귀속을 꾀하였다. 고려는 현실적으로 압록강 이서 지역에 대한 진출이 1037년 이후 힘들어졌다고는 하지만, 고구려 고토 회복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숙종․예종대의 여진 정벌 과정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했다는 예종의 언급이나, 여진의 흥기로 거란이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의 옛 땅인 遼陽지역까지 영토로 귀속될 것을 바라는 김부일의 致語에서 확인이 된다. 고려는 내원성과 포주가 식량부족과 금 공격으로 고립되는 상황을 잘 파악하여, 자연스럽게 귀속을 유도하였다. 거란과 金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거리 이중외교’를 펼친 고려는 1117년(睿宗 12) 3월에 무력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내원과 포주를 영토로 귀속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鴨綠江으로 경계를 다시 삼게 되었는데, 이는 외부세력의 침입으로부터 고려가 방어에 있어 시간과 방어에 여유를 되찾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원과 포주의 고려 귀속과정에서 보여준 고려의 등거리 이중외교는 국제 분쟁에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실리를 추구하려는 고려 외교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고려와 거란의 영토문제는 크게 성종~현종대와 정종~문종대로 구분이 가능하다. 성종~현종대는 거란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무력충돌과 함께 영토문제가 제기되었다면, 정종~문종대는 거란이 압록강 이동의 점유지인 포주에서 군사행동을 취하고 이에 고려가 군사시설 철거와 점유지 반환을 요청하는 형태가 정착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037년(정종 3)을 전후해서 일어났는데, 1037년은 고려가 거란에 대한 강경대응에서 온건책으로 바꾼 해이다. 이 해를 기점으로 덕종대까지 단절되었던 거란과의 외교가 재개되었다. 거란이 압록강 이동에 가축성보를 설치하며 고려를 압박해 얻어낸 결과였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성종대의 영토협상 내용이 문종대에 이르러, 변화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993년에 협상을 통해 遼東의 天皇鶴柱之城과 鴨綠江의 支流인 日子鼈橋之水의 사이를 완충지대로 삼아 경계가 설정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994년에 고려가 약속했던 사행로를 확보하기 위해 고려와 거란은 鴨江을 기준으로 각각 성보를 축성하였는데, 압강은 사행의 안전을 책임지는 성보 축성의 기준선으로의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고려와 거란의 협상은 1010년에 고려를 침입하고, 1015년에 압록강 이동의 抱州 지역을 차지하면서 그 의미가 퇴색하였다. 현실에서의 경계가 의주의 黃土嶺으로 옮겨졌고, 전쟁 이후에 거란이 이 지역을 장기간 점거하면서 황토령을 기준으로 하는 경계가 고착된 것이다. 포주는 고려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고려는 안전 확보를 위해서 당장 회복이 필요했다. 덕종대에 고려는 무력 충돌까지 고려하며 회복을 고심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거란이 부정할 수 없는 명분이 필요했고, 그것이 成宗代 승천황태후와의 협상 내용이었다.
      그런데 문종대인 1055년(문종 9) 7월의 기록을 보면, 고려 스스로 성종대 영토 협상에서 합의한 경계를 ‘天皇鶴柱之城’과 ‘日子鼈橋之水’가 아닌 ‘압강’으로 이해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이후 문종대 외교문서들에서는 압록강을 승천황태후와 합의한 경계로 거론하며 포주의 반환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성종대 협상 내용에 대한 이해에 변화가 발생했음을 뜻한다. 포주를 반환받는 것이 급했던 고려는 그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고, 이러한 인식변화는 압록강 서쪽의 지배권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종대의 이러한 태도는 선종대 각장문제와 예종대의 내원과 포주 귀속과정에서도 드러난다. 문종대의 인식변화가 예종대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으며, 고려 스스로 압록강을 경계로 한다는 인식이 굳어졌던 것이다.
      이어 포주지역이 정종대 이후의 고려와 거란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란은 성종대와 현종대에 걸쳐 무력을 동원해 고려를 굴복시키려 했지만 실패하자, 정종대부터는 포주문제를 일으켜 거란의 요구대로 고려가 움직이도록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와 같이 영토분쟁을 야기한 후, 이득을 취하는 전략은 거란이 1004년에 송에 사용했던 수법이었다. 거란은 1004년에 關南地의 수복을 명분으로 삼아 澶淵之盟을 맺었는데, 당시 거란은 송에 영토문제를 제기해 연운 16주를 수복하려는 각종 행동을 포기하게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전략은 1042년과 1074년의 송과의 영토분쟁에서도 거란이 동일하게 사용한 전략이었다. 거란은 송에 사용하던 방법을 고려에 그대로 옮겨와 점령하고 있던 포주지역을 분쟁지역화 했던 것이다. 거란은 정종대에는 ‘加築城堡’를, 문종대에는 궁구란자 등의 군사시설물을 설치하며 고려를 압박하였고, 고려는 거란의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대응하며, 거란의 요구대로 움직였다. 고려는 사신을 파견해 포주의 반환을 요구했는데, 거란의 침입을 막고 포주를 반환받기 위해서 거란이 요구하는 사대관계를 충실하게 이행해야만 했으며, 송 또는 여진과의 연합을 맺고 거란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문종대에는 고려의 경계를 압록강으로 한정하여, 成宗代 협상에서 압록강 서쪽의 여진 지배에 대한 권리 행사를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었다.
      고려와 거란의 영토분쟁은 거란이 국제관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발생하다보니, 거란이 주도하고 고려는 이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고려와 거란은 사대관계를 맺었다는 점에서 고려가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거란이 군사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고려를 압도하는 상황은 되지 못했다. 고려가 일방적으로 거란의 의도대로 끌려가는 입장은 아니었으며, 거란도 고려를 무력으로 복속시킬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고려가 成宗代 협상에서는 대등한 입장에서 영토협상을 이끌어냈으며, 현종대에도 거란의 6성 반환과 친조 요구를 거절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덕종대에는 고려가 먼저 포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외교관계를 단절하며 양국 관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물론 정종대와 송과 국교재개를 하기 전의 문종대에는 거란이 포주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고려를 제어하며 주도권을 행사한 것도 사실이다. 국제정세의 흐름에 따라 양국 관계도 변화되었다는 점은 분명히 확인된다. 즉, 때에 따라서는 거란뿐만 아니라, 고려 또한 양국 관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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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과 경계를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 고려의 현실적인 영역은 鴨綠江 邊까지였다. 崔承老의 時務28條의 내용 중에, 馬歇灘으로 경계를 삼은 것은 太祖의 뜻이고, 鴨綠江 변의 石城으로 경계...

      거란과 경계를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 고려의 현실적인 영역은 鴨綠江 邊까지였다. 崔承老의 時務28條의 내용 중에, 馬歇灘으로 경계를 삼은 것은 太祖의 뜻이고, 鴨綠江 변의 石城으로 경계를 삼은 것은 大朝 즉, 光宗의 정한 바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란 협공을 위해 985년 고려에 온 한국화의 활동을 담은 󰡔한국화신도비󰡕에도 당시 고려의 限界가 압록강의 다른 이름인 浿江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양국 간에 영토분쟁이 발생한 것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경계를 접하게 된 이후부터였다. 거란은 高麗와 宋의 軍事的, 政治的 연합을 방지하고 상하관계 설립을 통해 고려에 거란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993년(成宗 12)에 고려 침입을 단행하였다. 당시 거란의 전쟁 책임자는 東京留守인 蕭遜寧으로, 주축병력은 東京遼陽府 일대의 鄕丁이었다. 東京留守와 같이 특정 지방관에게 명하여 주변 지역을 공격하도록 하는 경우에는 적국의 경계를 넘어 깊이 들어가지 않고, 경계로부터 대략 300리 정도 내에서 활동하면서 적에게 경제적 손실을 입혀 방비태세를 약화시키거나 외교적 압력을 가하는 제한적인 목적을 지닌 군사행동이었다. 따라서 거란의 1차 침입은 접경지대에서 전개되는 국지전의 성격을 띠었을 뿐, 전면전을 염두에 둔 병력 동원은 아니었다.
      소손녕은 거란이 소유인 고구려의 땅을 고려가 침식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거란이 사방을 통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귀부하지 않은 채 송과의 교류가 침입의 명분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그러면서, 고려가 땅을 떼어 바치고 朝聘을 한다면 더 이상 전쟁이 확대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거란의 군사행동은 전면전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는 영토문제가 거란 침입의 핵심이라기보다는 고려로부터 우위를 확인받고 송과의 단교에 목적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거란과 고려는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각각 역사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소손녕은 고려가 고구려가 아닌 신라를 계승했다는 논리를 펴자, 서희는 國號를 ‘高麗’로 하고, 평양을 都邑로 삼았다는 점을 근거로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주장하였다. 결국 소손녕도 서희의 반박논리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양국은 994년 2월에 고려가 거란에 조공을 하고 송과 외교관계 단절을 약속하면서 강화를 하였는데, 양국 간에는 이후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경계를 명료하게 할 필요를 느꼈고, 徐熙와 蕭遜寧 간의 협상을 통해 이를 확정하였다.
      고려와 거란은 당시 여진이 고려와 거란 사이의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양국이 모두 완벽하게 그 지역을 통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이 지역을 완충지대로 삼아 영토협상을 마무리하였다. 이 협상에서 거란은 ‘天皇鶴柱之城’ 즉, 遼東지역의 서쪽을 자국의 영역으로 정하고 고려에게는 鴨綠江으로 합류하는 ‘日子鼈橋之水’를 기준으로 동쪽을 고려의 경계로 삼았다. 아울러 고려는 거란의 우위를 인정해주는 대신 압록강 유역의 지배에 있어 고려가 우선권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이는 고려의 실리주의적 대외정책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거란이 압록강 유역 女眞에 대한 고려의 지배권을 보장해준 데에는, 이 지역이 상대적으로 거란보다는 고려의 세력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고려가 압록강 밖의 여진 지역을 수복한 다음에 거란에 조근을 하기로 약속했는데, 이는 무조건적으로 사대관계를 맺어야 하는 굴복이 아닌 대등한 협상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은 협상과정에서 서희가 소손녕과 남북으로 앉지 않고 동서로 앉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서희가 신속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양국의 관계가 대등한 입장이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려는 성종대 거란과 책봉-조공관계를 맺었지만, 999년(穆宗 2)과 1003년 송에 원병을 청하는 등 거란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거란은 康兆의 弑逆을 명분으로 삼아, 1010년(顯宗 원년) 고려를 다시 침입하였다. 이때는 거란 聖宗이 親征을 하였는데, 거란에서 황제의 친정은 원정 대상이 되는 지역을 정복해 영토로 차지하거나, 속국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병력동원이었다. 실제로 거란은 1010년 12월 開城을 함락시키기도 전에 이미 政事舍人 馬保佑를 거란의 지방관직인 留守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거란이 1010년 침공을 단순한 복속이 아닌 영토 정복에 초점을 맞춘 군사행동이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고려는 현종의 親朝를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거란의 군대를 돌리는데 성공을 했는데, 승천황태후 사망 후 親征까지 해가며 심혈을 기울였던 고려와의 전쟁에서 정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거란 聖宗은 그 권위에 상처를 입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한 수단으로, 현종의 親朝를 요구하였다. 친조는 유목민족에게는 실질적인 복속을 의미하는 행위였고 이를 통해 표면적으로나마 聖宗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는 현종의 신병을 핑계로 이를 거부하였다. 친조를 통해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던 거란 聖宗은 분노하여 成宗代 협상에서 고려에 넘겨주었다고 여긴 興化․通州․龍州․鐵州․郭州․龜州 등 6성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994년 9월 초순부터 10월 상순까지 서희가 쌓은 성이 長興鎭․歸化鎭․郭州․龜州 등의 4성이었다는 점에서 거란의 6성 요구는 합당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고려가 거란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서북방의 유목부족들과의 무력 충돌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자, 거란은 고려에 다시 무력 충돌을 감행하였다. 그 본격적인 시작은 압록강에 浮橋를 설치하고 그 이동을 점유하는 1015년 정월부터였다. 거란의 압록강 이동 점유는 최전방에서 천연 방어막 역할을 해주던 압록강이 그 역할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려는 언제든지 거란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기를 느낀 고려는 사신 파견 등을 통해 외교적으로 해결을 모색하던 기존의 태도를 버리고, 거란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군사적으로 맞대응을 하는 강경책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이로 인해 양국 간에는 대규모 무력충돌이 이어졌는데, 蕭排押이 龜州에서 고려군에 참패를 당하는 1019년 正月까지 지속되었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고려가 1120년에 그 동안 억류시켰던 사신 耶律行平을 돌려보내고 稱藩과 納貢을 거란에 약속하면서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고려는 이 과정에서 압록강 이동의 거란 점유지 반환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이 지역이 거란 멸망 직전까지 양국 갈등의 핵심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일처리였다. 1015년 이후 거란이 점유한 지역은 鴨淥江 동쪽 8리에 위치한 黃土嶺까지였다. 반면 고려의 최전방은 평안북도 피현군 당후리 쏙새산에 위치한 ‘걸망성’이라 불리는 興化鎭이었다. 황토령은 의주와 걸망성 사이에 있는 전문령과 가로령으로 비정되는데, 成宗代 요동과 압록강 지류를 완충지대로 삼던 경계대가 현종대 전쟁 이후 압록강 이동으로 후퇴해서 황토령을 완충지대로 삼아 다시 경계가 설정되었고, 이후 103년 동안 황토령이 경계의 역할을 담당했다.
      거란이 멸망할 때까지 양국 간에는 대규모 무력충돌은 다시 발생하지 않았지만, 거란은 압록강 이동에 점유한 지역인 抱州를 적극 활용하여 고려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황토령이 완충지대로 놓여 있기는 하였지만, 成宗代의 ‘天皇鶴柱之城’과 ‘日子鼈橋之水’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와는 고려가 느끼는 압박감은 차원이 달랐다. 자연방어막이었던 압록강이 갖는 이점을 누릴 수 없게 된 고려는 언제 거란의 침입을 당할지 모르는 처지에 항상 놓이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는 거란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의 침략 가능성을 높게 본 고려는 德宗이 즉위한 해인 1031년에 압록강 동안 지역의 반환을 거란 聖宗의 장례식에 참여한 金行恭을 통해 제기하였다. 이 요청을 거란이 받아들이지 않자, 고려는 賀正使 파견을 정지하고 새 황제 興宗의 연호대신 전 황제 聖宗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면서 거란과 대립각을 세웠다. 아울러 來遠城에 이른 거란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거나, 朔州․寧仁鎭․波川 등에 성을 쌓고 北境에 關城을 創置하는 등 전쟁까지 염두에 둔 강경 대응으로 전환하였다.
      고려의 강경대응은 1039년(靖宗 5)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阻卜과의 충돌을 해결한 거란이 다시 선병을 동원해 압록강을 침입하거나 압록강 이동에 城堡를 加築하여 고려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면서 상황에 변화가 일었다. 고려 내부적으로도 강경 대응을 주장하던 이들의 死去가 이어지고, 온건 성향을 가진 이들로 정치세력이 교체되면서 거란과의 화친으로 정책이 변하였다. 이후 양국의 관계는 거란 멸망 직전까지 커다란 변화를 겪지 않고 유지되었다.
      고려가 화친으로 정책 변화를 주었지만, 여전히 압록강 이동의 영토문제로 인한 갈등요소는 남아 있었다. 거란의 움직임을 고려 침입과 관련해 우려를 가지고 있던 고려는 1039년(靖宗 5) 庾先을 파견하여 압록강 동쪽에 加築한 城堡를 파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거란은 고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거란은 宋에 關南 10성을 요구하여 歲幣를 증액 받기로 하는 등 동아시아의 정세를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고려는 이에 대해서 더 이상 문제제기를 할 수는 없었다. 거란이 주변에 있던 모든 세력들을 복속시키는 등 국력이 한참 강해진 상황에서 城堡문제를 제기했다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고, 무력 충돌까지 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거란도 고려와의 앞선 연속된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고려와의 무력 충돌에 부담을 가지고 있었고 성보 가축은 군사적 목적이 아닌 농사용으로 쓰일 것임을 강조하며 고려에 타협책을 제시하며, 일단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1054년(文宗 8)이후 거란은 다시 抱州 동쪽들에 弓口門欄을 설치하거나, 郵亭을 설치하면서 고려의 옛 경계선을 침범하며, 고려를 압박하였다. 고려는 시설물 설치에 대해, 영토를 침삭당하는 근심이 있다거나, 또는 장차 고려의 강토를 침략하려는 것이라는 우려를 거란에 토로하며 설치 철회를 요구하였다. 당시 고려가 거란에 점유지 반환을 요청한 것은 成宗代 거란 昇天皇太后와의 협상 내용을 그 근거로 들었다. 고려는 ‘거란의 前 太后皇帝가 詔書로 鴨江 동쪽으로 우리나라 경계를 봉해 주었다’거나, ‘前 皇太后陛下께서 압록강으로 한계를 그었다’ 또는 ‘前 太后皇帝가 鴨江으로 한계를 삼았다는 國書를 보냈다’는 등 내용을 전제로 하여 반환을 요구했다. 이러한 고려의 태도는 현종대 이후에 황토령을 완충지대로 삼게 된 현실을 인정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거란에 불쾌감을 주지 않으면서도 자연방어선인 압록강선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행동이었다.
      1056년 고려는 압록강 이동에 설치한 각종 시설물을 철거해 줄 것을 거란에 요청하여, 압록강 전면의 정자를 부분 철거하게 하는 성과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거란은 1057년에는 松嶺 동북의 토지를 개간하고 암자를 설치하였으며, 1062년에는 義宣軍 남쪽에 賣買院을, 1074년에는 定戎城 북쪽에 探守庵을 세우는 등 지속적으로 고려에 압박을 가하였다.
      고려는 궁구문란이나 우정 등의 설치를 거란이 군사시설을 확대하려는 행동으로 인식하고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하며, 거란에 철거를 계속 요청하였다. 반면에 거란은 고려의 요구를 완전히 거절하지도, 그렇다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도 않는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고려의 움직임을 제어하려고 했다.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거란의 입장에서 보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압록강 이동지역을 굳이 고려에 돌려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 지역에서 갈등 조장은 고려가 송과 교류를 하는 것을 제어하는 효과를 노린 측면도 있다. 1058년에 내사문하성이 송과의 교류가 거란과의 불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문종의 국교재개 시도를 반대한 사실에서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거란은 靖宗代부터 고려와의 관계에서 효과를 보던 압록강 이동지역에서 갈등을 조장해 자국에 유리하게 양국관계를 이어가려는 정책을 문종대까지 유지해 왔는데, 이러한 정책은 1068년부터 고려와 송이 국교재개를 시도하면서 용도가 폐기되었다. 거란에 압박을 받은 고려와 송이 1068년부터 국교재개를 시도해 거란과 세력균형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당시 고려와 송은 공통적으로 거란의 위협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견제해 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양국의 교류는 1078년에 성사되었는데, 고려와 송의 국교재개 움직임이 보이자, 거란은 1072년부터 1075년까지 송과 영토문제를 일으켰고, 1075년에는 고려에 영토반환을 제안하며, 양국의 국교재개를 막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송을 매개로 고려와 거란이 세력균형을 이룬 후, 고려와 거란 사이에 영토분쟁으로 인한 갈등은 더 이상 불거지지 않았다. 거란이 포주지역에서 군사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 고려와 송이 사신 왕래를 시작한 이상 양국의 교류를 견제하기 위한 경계지역에서 군사행동은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도 더 이상 시설물 제거와 영토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거란과 세력균형을 이룬 이상 굳이 영토문제를 거론해 거란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宣宗代에 가서 고려와 거란 사이에 鴨綠江 越境문제가 아닌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설치된 榷場 설치 문제가 잠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거란의 각장 설치 계획이 고려의 반대로 무산된 이후, 肅宗․睿宗代는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영토문제로 인한 충돌사태는 나타나지 않았다.
      睿宗代에 들어서서 遼東지역에서 女眞이 급성장하였는데, 來遠城과 抱州(把州)까지 그 영향을 미쳤는데, 이로 인해 1116년부터 1117년 사이에 고려의 주된 관심사는 내원성과 포주문제였다. 포주 지역은 거란이 압록강 이동에 점유한 지역으로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 요동지역을 여진이 차지하면서 거란이 점유하고 있던 來遠과 抱州가 장기간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고려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來遠과 抱州의 고려 귀속을 꾀하였다. 고려는 현실적으로 압록강 이서 지역에 대한 진출이 1037년 이후 힘들어졌다고는 하지만, 고구려 고토 회복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숙종․예종대의 여진 정벌 과정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했다는 예종의 언급이나, 여진의 흥기로 거란이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의 옛 땅인 遼陽지역까지 영토로 귀속될 것을 바라는 김부일의 致語에서 확인이 된다. 고려는 내원성과 포주가 식량부족과 금 공격으로 고립되는 상황을 잘 파악하여, 자연스럽게 귀속을 유도하였다. 거란과 金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거리 이중외교’를 펼친 고려는 1117년(睿宗 12) 3월에 무력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내원과 포주를 영토로 귀속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鴨綠江으로 경계를 다시 삼게 되었는데, 이는 외부세력의 침입으로부터 고려가 방어에 있어 시간과 방어에 여유를 되찾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원과 포주의 고려 귀속과정에서 보여준 고려의 등거리 이중외교는 국제 분쟁에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실리를 추구하려는 고려 외교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고려와 거란의 영토문제는 크게 성종~현종대와 정종~문종대로 구분이 가능하다. 성종~현종대는 거란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무력충돌과 함께 영토문제가 제기되었다면, 정종~문종대는 거란이 압록강 이동의 점유지인 포주에서 군사행동을 취하고 이에 고려가 군사시설 철거와 점유지 반환을 요청하는 형태가 정착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037년(정종 3)을 전후해서 일어났는데, 1037년은 고려가 거란에 대한 강경대응에서 온건책으로 바꾼 해이다. 이 해를 기점으로 덕종대까지 단절되었던 거란과의 외교가 재개되었다. 거란이 압록강 이동에 가축성보를 설치하며 고려를 압박해 얻어낸 결과였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성종대의 영토협상 내용이 문종대에 이르러, 변화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993년에 협상을 통해 遼東의 天皇鶴柱之城과 鴨綠江의 支流인 日子鼈橋之水의 사이를 완충지대로 삼아 경계가 설정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994년에 고려가 약속했던 사행로를 확보하기 위해 고려와 거란은 鴨江을 기준으로 각각 성보를 축성하였는데, 압강은 사행의 안전을 책임지는 성보 축성의 기준선으로의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고려와 거란의 협상은 1010년에 고려를 침입하고, 1015년에 압록강 이동의 抱州 지역을 차지하면서 그 의미가 퇴색하였다. 현실에서의 경계가 의주의 黃土嶺으로 옮겨졌고, 전쟁 이후에 거란이 이 지역을 장기간 점거하면서 황토령을 기준으로 하는 경계가 고착된 것이다. 포주는 고려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고려는 안전 확보를 위해서 당장 회복이 필요했다. 덕종대에 고려는 무력 충돌까지 고려하며 회복을 고심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거란이 부정할 수 없는 명분이 필요했고, 그것이 成宗代 승천황태후와의 협상 내용이었다.
      그런데 문종대인 1055년(문종 9) 7월의 기록을 보면, 고려 스스로 성종대 영토 협상에서 합의한 경계를 ‘天皇鶴柱之城’과 ‘日子鼈橋之水’가 아닌 ‘압강’으로 이해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이후 문종대 외교문서들에서는 압록강을 승천황태후와 합의한 경계로 거론하며 포주의 반환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성종대 협상 내용에 대한 이해에 변화가 발생했음을 뜻한다. 포주를 반환받는 것이 급했던 고려는 그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고, 이러한 인식변화는 압록강 서쪽의 지배권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종대의 이러한 태도는 선종대 각장문제와 예종대의 내원과 포주 귀속과정에서도 드러난다. 문종대의 인식변화가 예종대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으며, 고려 스스로 압록강을 경계로 한다는 인식이 굳어졌던 것이다.
      이어 포주지역이 정종대 이후의 고려와 거란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란은 성종대와 현종대에 걸쳐 무력을 동원해 고려를 굴복시키려 했지만 실패하자, 정종대부터는 포주문제를 일으켜 거란의 요구대로 고려가 움직이도록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와 같이 영토분쟁을 야기한 후, 이득을 취하는 전략은 거란이 1004년에 송에 사용했던 수법이었다. 거란은 1004년에 關南地의 수복을 명분으로 삼아 澶淵之盟을 맺었는데, 당시 거란은 송에 영토문제를 제기해 연운 16주를 수복하려는 각종 행동을 포기하게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전략은 1042년과 1074년의 송과의 영토분쟁에서도 거란이 동일하게 사용한 전략이었다. 거란은 송에 사용하던 방법을 고려에 그대로 옮겨와 점령하고 있던 포주지역을 분쟁지역화 했던 것이다. 거란은 정종대에는 ‘加築城堡’를, 문종대에는 궁구란자 등의 군사시설물을 설치하며 고려를 압박하였고, 고려는 거란의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대응하며, 거란의 요구대로 움직였다. 고려는 사신을 파견해 포주의 반환을 요구했는데, 거란의 침입을 막고 포주를 반환받기 위해서 거란이 요구하는 사대관계를 충실하게 이행해야만 했으며, 송 또는 여진과의 연합을 맺고 거란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문종대에는 고려의 경계를 압록강으로 한정하여, 成宗代 협상에서 압록강 서쪽의 여진 지배에 대한 권리 행사를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었다.
      고려와 거란의 영토분쟁은 거란이 국제관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발생하다보니, 거란이 주도하고 고려는 이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고려와 거란은 사대관계를 맺었다는 점에서 고려가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거란이 군사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고려를 압도하는 상황은 되지 못했다. 고려가 일방적으로 거란의 의도대로 끌려가는 입장은 아니었으며, 거란도 고려를 무력으로 복속시킬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고려가 成宗代 협상에서는 대등한 입장에서 영토협상을 이끌어냈으며, 현종대에도 거란의 6성 반환과 친조 요구를 거절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덕종대에는 고려가 먼저 포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외교관계를 단절하며 양국 관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물론 정종대와 송과 국교재개를 하기 전의 문종대에는 거란이 포주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고려를 제어하며 주도권을 행사한 것도 사실이다. 국제정세의 흐름에 따라 양국 관계도 변화되었다는 점은 분명히 확인된다. 즉, 때에 따라서는 거란뿐만 아니라, 고려 또한 양국 관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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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序論 1
      • 1. 연구사 검토와 문제제기 2
      • 2. 연구 방법 10
      • Ⅰ. 成宗代 거란의 고려 침입과 영토획정 16
      • 序論 1
      • 1. 연구사 검토와 문제제기 2
      • 2. 연구 방법 10
      • Ⅰ. 成宗代 거란의 고려 침입과 영토획정 16
      • 1. 거란 침입이전 고려의 경계 16
      • 2. 거란의 고려 1차 침입과 그 원인 24
      • 3. 양국의 경계획정 과정과 ‘鴨江’ 33
      • 4. 고려․거란 간 경계대의 설정 42
      • Ⅱ. 顯宗代 6성문제와 고려의 대응 53
      • 1. 거란의 고려 침입과 6성문제의 대두 53
      • 2. 거란의 鴨綠江 동안 城堡축성과 고려의 위기의식 65
      • Ⅲ. 德宗․靖宗代의 압록강 城橋․城堡문제 82
      • 1. 고려의 城橋 철거 요구와 강경대응 82
      • 2. 고려의 政策 전환과 양국관계의 변화 94
      • Ⅳ. 文宗代 거란의 弓口門欄․郵亭 설치와 영토획정논의 109
      • 1. 契丹의 弓口門欄․郵亭 설치와 고려의 철거 요청 109
      • 2. 1075년의 영토획정논의와 고려의 대송외교 재개 124
      • Ⅴ. 睿宗代 來遠․抱州의 高麗 歸屬 137
      • 1. 고려의 女眞 정벌과 국제정세의 변화 137
      • 2. 來遠․抱州의 귀속과 고려의 대응 149
      • 結論 159
      • 參考文獻 167
      • 國文要約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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