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불교문화재 정책의 역사적 실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현대의 ‘지정문화재’ 개념에 국한하지 않고, 사찰 토지를 포함한 건조물과 그에 속한 유형의 유물과 유적을 불...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불교문화재 정책의 역사적 실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현대의 ‘지정문화재’ 개념에 국한하지 않고, 사찰 토지를 포함한 건조물과 그에 속한 유형의 유물과 유적을 불교문화재로 규정하여, 불교문화재의 이식과정과 조사사업 및 사찰령 시행에 따른 조선총독부의 정책목적과 실현과정을 통한 문제점 및 불교계의 대응책을 살펴보았다.
메이지정부의 廢佛毁釋은 16세기 유럽문화를 통하여 성립한 洋學의 영향으로, 일본의 불교문화재가 구시대의 필요 없는 유물로 인식된 결과물이다. 폐불훼석은 일본의 불교문화재가 정의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 정책희생물이 되었고, 이에 대한 반성은 국가주도의 문화재 보존정책으로 전환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1871년 「고기구물보존방」을 비롯하여 1897년 「고사사보존법」이 시행되면서 ‘고사사보존회’라는 전문가 집단이 중심이 되어 문화재의 조사와 보호가 진행되었다. 1919년 「사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법」은 기념물 개념을 도입하여 문화재 지정의 범위를 확대하였으며, 1929년 「국보보존법」은 주요 문화재의 밀반출을 통제하는 법령이었다. 또한 1933년 「중요미술품 등에 관한 보존에 대한 법률」은 사유유물에 대한 법적 통제력을 강화한 것이 특징이다. 일제는 자국 내 불교문화재에 대한 보존과 보호의 수준을 조선에 그대로 이식하지 않고, 그들의 합법적 또는 편법적 반출과 도굴을 조장하여 식민지 지배의 합리화에 이용하였다.
일제는 1902년부터 불교문화재를 비롯한 각종 문화재 조사를 통하여 불교문화재의 보존실태를 파악하였으나, 실제로 보존을 위한 예산지원은 일제가 정책상 필요로 하는 몇몇 건에 불과하였다. 특히 고적조사를 실시하면서 발견한 많은 폐사지가 일방적으로 국유화되고 그에 따라 폐사지 내 유적과 유물은 임의처분, 불법매매 또는 移築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불교문화재의 원적지 이전으로 그 원형을 훼손하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또한 불교문화재의 조사를 통하여 발굴 또는 발견된 불교문화재는 단순히 창고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제가 內地에서 박람회 및 박물관을 개최하여 긍정적 효과를 거둔 점을 식민지에서도 적용하고자 하였다. 이에 박물관 건립과 전시를 통한 그들의 우수한 문화재 관련경력을 선전하고 동일문화권임을 세계에 알려 식민지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전시 유물의 대다수가 불교문화재인 것은 일본불교와 상통함을 위장하여 조선민족을 동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1911년 시행된 사찰령은 7개조의 간단한 법령이지만, 사찰운영 방식과 사찰재산 관리 등이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득해야 가능한 행정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고 있다. 사찰령은 시행 초기부터 폐지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막대한 사찰재산의 관리를 목적으로 사찰령 폐지를 검토하지 않고 개정하는데 그쳤다. 개정 사찰령의 주요 특징은 첫째, 사찰의 신설을 현상대로 억제한 것이다. 둘째, 사찰재산에 국한하여 개정을 단행하여 임의적 사찰재산처분을 강력하게 규제한 것이다. 셋째, 일제의 소위 공공사업, 목적사업 등에는 사찰재산의 처분에 조선총독의 재량권을 부기하였다. 즉 일본의 「국보보존법」이 역사적 고증과 미술의 모범이 되는 건조물과 보물의 밀반출을 통제하고 국보보존회를 설치하여 학술조사와 문화재의 본존대책을 마련하는 것에 주목적을 둔 것과 비교된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통하여 주지권한 강화정책을 실시하여 친일주지를 양성하였다. 本末寺體制의 전환은 본산 주지의 위상과 역할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켜, 전시동원 시기에는 불교문화재를 전쟁물자화하는 데 주지들을 이용하였다.
일제의 국가통제를 기반으로 하는 불교문화재 정책에 대하여 불교계는 寺刹令 철폐운동, 寺誌의 발간, 전통불교 수호에 의한 사찰재산 보전, 인쇄매체를 통한 불교문화재의 보급과 홍보로 대응하였다. 사찰령의 철폐운동은 최초의 적극적 저항이었으나, 보수적 주지들과의 내부적 마찰 속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불교계에 사찰령의 악영향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불교의 꾸준한 침투와 선진불교라는 미명하에 전통불교가 퇴색되는 과정에서 講院의 회복은 불교문화재를 보존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즉, 불교계의 새로운 포교 방식으로 사찰에 승려가 희박하여 사찰이 자연 퇴락하는 과정에서 전통불교의 수호는 ‘고적’이라는 문화재인식으로 불교문화재를 보전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사지 발간의 의미를 정리해보면 첫째, 불교계가 사찰령 체제에 대한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여 내적성찰의 계기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둘째, 불교문화재 보존의 토대를 정리한 것이다. 셋째, 불교기록물의 정리이다.
불교출판은 경전의 번역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경전 및 경판류의 보존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는 방대한 자료집 성격이며, 식민지 당시의 불교현황까지 서술하고 있어 후대에 1차적 사료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신문기사를 통한 불교문화재의 소개와 보급은 사찰유물이라는 인식을 민족 공동의 유산이라는 개념으로 확대하는 역할을 하였다. 1900년대 불교문화재를 ‘명소’라는 정의로 간략하게 소개하였고, 1920년대에는 다양한 기행 및 순례기 형태로 불교문화재의 우수성을 소개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근현대식 문화재 정의로서 불교문화재가 단절되지 않도록 연속기획으로 지면화하였다. 그러나 획일적 불교문화재 정책에 대한 반성과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일제강점기 불교문화재 정책은 국가 주도하의 일방적 ․ 특수적 종교관리 정책이었다. 일본 자국 내의 현실과 시행착오를 통하여 한반도에 독특한 법령을 시행하여 그들의 통치방식에 부합하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특히, 일제의 불교문화재 정책은 원형 훼손이라는 결정적인 오류를 지닌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즉, 일제의 불교문화재 정책은 사찰재산이라는 물적 개념의 관리 대상이었으며, 이를 통하여 불교계를 통제하고 그들의 식민정책을 선전하는 대상물로 이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