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는 한국인에게 있어 애증의 시기이다. 한일병합 이후의 식민지 생활에 대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은 수탈과 핍박의 역사로 표현한다. 하지만 이시기에 근대 문물의 유입과 함께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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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군 :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1
학위논문(석사) --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 사회과교육학과지리교육전공 , 2011. 2
2011
한국어
915.1 판사항(22)
충청북도
viii, 142 p. : 삽도 ; 26 cm
한국교원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지도교수 : 류제헌
참고문헌 : p.117-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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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는 한국인에게 있어 애증의 시기이다. 한일병합 이후의 식민지 생활에 대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은 수탈과 핍박의 역사로 표현한다. 하지만 이시기에 근대 문물의 유입과 함께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 중에 하나가 관광(tourism)이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관광에 대한 지리학계의 연구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에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한반도 관광의 특징을 알아본다는 목표 아래 세 가지 세부 연구 주제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첫째는, 일제 강점기에 새롭게 발달한 관광지와 관광 행위를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는 대표적 관광지로 손꼽히던 금강산 지역이 관광지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추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금강산 관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조선시대와 비교하고, 금강산이 당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1920년에서 1940년 사이의 동아일보 및 잡지 기사, 철도 통계 그리고 문학작품 등의 자료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밝혀진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한반도 관광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철도 노선을 중심으로 관광지가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철도회사와 철도국은 관광지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거나 홍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꽃구경지, 해수욕장, 온천, 산지, 동굴, 문화유적지, 월미도 조탕, 창경원 등이 새로운 관광지로 등장하였다.
둘째, 새로운 관광 행위가 나타났다. 우선 정해진 기간(일요일과 공휴일)을 이용한 관광이 나타났다. 또한 봄 꽃구경, 여름 피서, 가을 단풍놀이, 겨울 스키로 이어지는 계절별 관광이 관습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벚꽃구경, 온천욕, 해수욕, 스키 같은 조선시대에는 없었던 관광 형태와 관광통신인과 관광스탬프를 이용하는 관광 방식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마지막으로 탐승관광이 성행하였는데, 특히 금강산 탐승관광이 가장 활발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금강산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셋째, 과거부터 그 기기묘묘한 지형 때문에 명산으로 이름 높았던 금강산은 철도노선의 확충에 따라 관광지로 크게 성장하였다. 경원선(1914), 금강산전기철도(1931), 동해북부선(1932)이 확충된 1930년대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관광객의 증가 함께 숙박시설 및 기반 시설이 확충되었으며, 각종 관광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넷째, 금강산 개발 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일본 정부와 철도회사였다. 이는 제국주의 정부의 정치적 이유와 기업의 이윤추구라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금강산 주변지역인 온정리와 말휘리는 상업지역으로 변모하였다. 이후 금강산 개발 및 보호를 위하여 국립공원 지정이 추진되었으나 중석광산의 개발 필요성에 따라 취소되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금강산 개발의 처음부터 끝은 제국주의 논리에서 비롯되었다.
다섯째, 일제강점기 금강산 관광비용은 평준화, 규격화 되었다. 이에 따라 중상류층까지 관광이 확대되었으며 관광을 할 수 있는 지역적 범위 역시 넓어졌다. 또한 일본인보다 많은 조선인들이 금강산을 관광하였으며 여성들의 관광 참여 역시 증가되었다.
여섯째, 과거 사대부들의 유람에 성리학적 사유가 내포되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금강산 관광은 순수하게 자연을 즐기는 위락적 행위였다. 또한 금강산 관광 일정은 일상생활 때문에 제약되었다. 이에 따라 관광경로는 장안사-만폭동-구룡폭포-온정리로 대표되는 핵심 관광노선으로 단순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외금강의 관광거점은 유점사에서 온정리로 이동하였다. 또한 외금강 남부지역의 관광이 쇠퇴된 반면 만물상, 비로봉은 중요 관광지점으로 새롭게 등장하였다.
일곱째, 금강산에서의 관광행위가 변화되었다. 과거 사대부들이 무료로 이용했던 남녀(藍輿)는 비용 지불을 통한 교자(較子)로 바뀌었으며 관광객 대부분은 도보로 이동하였다. 과거 관광 중 필수적이었던 제명(題銘) 활동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하나 비판의 강도가 더욱 강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선인들의 기록을 읽고 이를 인용하는 와유(臥遊)가 성행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충실한 관광으로 변모하였다. 조선시대 신분적 제약으로 일탈행위가 제한되었다면 일제강점기에는 성적유희, 자유연애, 자살 등 일탈이 확대되었다. 또한 온천욕과 목욕이 관광의 중요 요소로 등장하였으며, 비로봉 등반은 일제강점기 금강산 관광의 필수 사항이 되었다.
여덟째,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금강산의 신성성이 약화되었다. 과거 금강산이 종교적 상징 혹은 성리학 이념의 표출 장소였지만 일제강점기 금강산은 인간의 위락지에 불과하였다. 신성성을 강화하기 위한 일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접근성의 향상, 관광객의 증가, 서구철학 및 학문의 도입은 이를 상쇄하였다.
아홉 번째, 금강산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관광과정에서 금강산, 지역주민, 자신들에 대한 사유하였다. 관광객들은 지역 주민들을 금강산 경관의 일부로 배치하거나 이질적 요소로 여겨 배재하였다. 하지만 금강산 관광은 식민지 체제를 인식하는 중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금강산 관광은 일제가 구축한 관광 인프라 속에서 발달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배체제와 도시발달에 대한 반발로서 국토와 자연에 대한 향수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중성을 갖는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철도 발전에 따라 새로운 관광지가 다수 등장하고 조선시대와는 다른 관광 행태가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금강산은 일제에 의해 관광지로 크게 성장하였다. 이렇게 성장한 관광지 금강산을 다수의 조선인들이 관광을 통해 즐겼으나 이들의 모습은 과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람과는 다른 형태였다. 그리고 그들의 관광행위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발과 수용이라는 양면성을 모두 갖고 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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