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諺文綴字法」 제정을 계기로 1930년대 전반기 식민지 조선에서는 철자법 정리·통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철자법 정리·통일운동은 민족어 규범형성의 가�...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https://www.riss.kr/link?id=T12291358
서울 :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1
2011
한국어
서울
i, 61 p. ; 26 cm
지도교수: 정태헌
참고문헌: p. 54-61
0
상세조회0
다운로드1930년 「諺文綴字法」 제정을 계기로 1930년대 전반기 식민지 조선에서는 철자법 정리·통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철자법 정리·통일운동은 민족어 규범형성의 가�...
1930년 「諺文綴字法」 제정을 계기로 1930년대 전반기 식민지 조선에서는 철자법 정리·통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철자법 정리·통일운동은 민족어 규범형성의 가장 기초적인 작업으로 민족어의 규범적 표상 성립과 관련된 문제였다. 본 논문에서는 1930년대 철자법 정리 통일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식민지 시기 민족어 규범이 어떻게 형성되어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식민지 시기 조선총독부의 조선어정책은 조선어의 민족적 성격을 탈각시켜 일본의 지방어로 만들고, ‘朝鮮語’를 일본어 보급 도구로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시경 제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어연구회(후에 조선어학회)가 1920년대 중반부터 조선총독부의 언문철자법을 비판하면서 철자법 정리·통일운동을 시작했다. 철자법 정리·통일운동은 박승빈을 중심으로 한 표음주의 학자들(후에 조선어학연구회)과의 논쟁으로 더욱 확산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철자법 정리·통일운동이 가져올 민족어 규범 형성을 경계했다. 따라서 조선어를 지방어로 활용하기 위해 형태주의와 표음주의가 혼재된 「諺文綴字法」을 개정했다.
「諺文綴字法」 개정 이후 조선어학회와 조선어학연구회는 다시 철자법 정리·통일운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어학회와 조선어학연구회는 민족어 규범의 성격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조선어학연구회는 당시 사용하던 7종성법의 표음주의 철자법이 조선어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지만 조선어학회는 현재의 철자법은 조선어의 본질이 훼손된 상태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조선어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 訓民正音 시대의 초성부용종성을 사용한 형태주의 철자법을 주장했다. 이것은 식민지 민족어 규범 형성이 단선적인 발전이 아니라 두 개의 다른 성격이 경쟁을 벌여나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어학회는 형태주의 철자법을 보급하기 위해서 강습회를 개최했다. 민중계몽운동과 결합되어 전개되었던 강습회는 교원과 학생을 대상으로 형태주의 철자법을 교육했고, 이들을 통해서 일반 민중들에게 형태주의 철자법을 보급시키고자 했다. 조선어학연구회도 강습회를 전개했다. 그러나 강습회를 통해서 조선어학회의 철자법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교원과 학생들을 결집시키기는 했지만 대중적인 운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조선어학연구회는 조선총독부에 대한 청원운동을 전개해 표음주의 원칙을 「諺文綴字法」에 반영시키려고 했다. 이렇게 활동에 차이가 있었던 것은 첫 번째는 각 학회를 지지했던 지지층의 성격 차이였고, 두 번째는 「諺文綴字法」의 개정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다.
1930년 전반기 철자법 정리·통일운동이 전개되는 속에서 조선어학회의 철자법이 지식인 계층들에게 지지를 받으며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표준화된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일반민들에게 더 친숙했던 조선어학연구회의 표음주의 철자법이 아닌 난해한 형태주의 철자법이 현재의 철자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식민지 시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표준화된 규범으로 자리 잡았던 조선어학회의 철자법은 일반 대중들에게 표준화된 규범으로 보급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해방이후 근대 국민/민족국가(Nation-State) 건설 과정에서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던 조선어학회의 철자법이 단일한 민족어의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현재의 철자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목차 (Table of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