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명확하게 밝히려 한 것은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이 일상적인 시간의식을 넘어 죽음과 맞닿아 있는 문제이며, 이러한 시간의식의 분석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단초와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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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 부산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10
학위논문(석사) -- 부산가톨릭대학교 대학원 , 신학과 종교철학 전공 , 2010. 2
2010
한국어
부산
124, viii p. ; 26cm
지도교수:홍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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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이 글에서 명확하게 밝히려 한 것은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이 일상적인 시간의식을 넘어 죽음과 맞닿아 있는 문제이며, 이러한 시간의식의 분석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단초와 한계...
이 글에서 명확하게 밝히려 한 것은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이 일상적인 시간의식을 넘어 죽음과 맞닿아 있는 문제이며, 이러한 시간의식의 분석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단초와 한계를 찾아보는 것’이다. 논의의 전면에 등장하는 문제는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이며, 그 주체는 언제나 인간이다. 이 말은 시간의식이 인간의 존재양식과 결부되어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맥락을 꿰뚫고 있는 철학자가 바로 하이데거이다. 그의 주저(主著) 『존재와 시간』은 현존재의 존재양식이 가지는 시간적 구조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의 일환이다.
시간은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막상 그것에 대해 말하려 하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난해한 개념이 아니다. 이 글은 인간과 시간과의 관계적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인간과 관계적 차원에서 시간을 논의한다는 문제는 달리 말하면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논의의 출발에 앞서 서구 철학사 안에서 시간이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지 살펴보았다. 플라톤이 이해한 시간은 ‘수에 따라서 천체가 규칙적으로 순환하는 운동’, 혹은 ‘측정되는 지속’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시간은 ‘무한히 다가오는 지금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사물의 운동으로 지각되는 헤아리지는 수’를 일컫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해한 시간은 영혼이 ‘기억하고, 기다리고, 목격하는 시간’으로 인간 내면에 있는 ‘시간적 흐름’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시간의 흐름은 아직 없는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로 흐르는 일련의 ‘아니 있음에로의 흐름’인 것이다. 후설은 이 점에 착안해서 시간의 흐름을 의식할 수 있는 이유를 규명하려 했다. 그의 탐구에 의하면, 우리가 시간을 의식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외부의 시간적 흐름을 지각할 수 있는 내재적 시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시간에 대한 철학사적 논의는 저마다 풀어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적어도 ‘시간이 지속한다’는 점에서는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철학사에서 살펴본 전통적인 시간이해는 ‘시간이 흐른다’는 차원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통속적 시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 ‘통속적 시간’은 일상적 삶의 차원에서 쉽게 이해되고 관찰되기에 ‘일상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의식하는 것을 ‘일상적 시간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일상적인 시간의식이 시간의 본래적인 측면에서 의식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본래적 존재양식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근원적인 시간에 대한 의식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간의식의 본래적 측면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일상적 시간 이해에서 어떻게 간과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일상에서 이해되고 있는 시간은 ‘~할 시간’, 의미 없는 시간, 시간의 길이, 기계적 시간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일상적 시간의식의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시간이 일상의 한가운데를 파고들어 때로는 인간행위를 요구하고, 의미를 가지기도 하며, 주관적으로 의식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시간은 인간의 삶의 양식마저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일상적으로 의식하는 시간이 시간의식의 심층적인 차원을 은폐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근원적인 시간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일상에 몰두하는 모양새를 ‘빠져있음’이라고 불렀다. 현존재는 자신의 실존을 직시하지 않고, 불특정 다수를 뜻하는 ‘그들’이 제시하는 평균적인 이해에 빠져있다. ‘그들’은 현존재가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지 못하도록 ‘호기심’, ‘잡담’, ‘애매함’으로 현존재를 몰아넣는다. ‘호기심’은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가능에 관계하지 못하도록 언제나 새롭고 흥미로운 것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고, 그들이 나누는 ‘잡담’은 현존재를 평균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가능성에 의존하게 만들어 주체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도록 ‘애매하게’ 만든다. 그들에게 빠져있다는 말은 현존재가 그들 안으로 편입되어 그들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그럴수록 현존재는 본래적인 자신에게서 더욱더 멀어진다.
현존재의 일상적 존재양식 중에 하나인 호기심은 일종의 시간적 구조를 내재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자를 ‘마주 대하려는’ ‘기대’를 가지게 되고, 동시에 기존의 것을 ‘망각하는’ 구조를 뜻한다. 이것을 일상에서 의식하는 시간적 구조라고 부를 수 있다(기대-망각 안에서의 마주대함). 하이데거는 이러한 시간적 구조를 시간성이라고 부른다. 시간성은 시간의 의식 구조로 인해 나타나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일컫는 말이다. 일상에서 ‘기대하고 망각하면서 마주대함’이라는 시간적 구조는 결국 일상적인 시간성 내지는 ‘빠져있음의 시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이데거의 시간성은 근원적인 시간이지만, ‘빠져있음의 시간성’은 근원적인 시간성으로 보기 힘들다. 그 이유는 근원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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