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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서북지역 개신교 발전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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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지금까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서북지방에서 개신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본 고에서는 이를 위해 우선 서북지역이 가지고 있는 정치·사회적인 배경을 연구하였는데 고려조부터 이어져 내려온 서북지역에 대한 정치적 소외와 차별이 서북지역의 신흥중간 계급들이 개신교를 수용하는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앞서 이미 지적했듯이 서북지역은 고려조와 조선조를 거치면서 문화의 불모현상을 빚었을 뿐만 아니라 농경 중심이었던 조선사회에 부합되지 않게 (황해도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산악지대였기에 농업에 온 힘을 기울일 환경도 되지못했다. 이처럼 서북지역은 벼슬할 기회도 없었고, 농업에 종사할 수도 없이 오히려 북쪽 외적들의 끊임없는 분쟁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기에 이곳 주민들의 생활상은 피폐할 수 밖에 없었고 자연히 이곳 주민들은 끊임없이 다른 지방으로 옮겨 살았기에 서북지역의 고을 중에는 텅텅 비다시피 한 곳이 많았다. 그러자 조선중앙정부에서는 변방을 충실히 해야 한다는 정책으로 이들의 이주를 금지하였고, 심지어 다른 도(道)의 죄인이나 일반 양민까지도 이곳으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으로 하여 이곳 주민들은 일찍부터 여진 및 중국과의 밀무역으로 생계를 타개하려 하였고 이런 배경에서 서북지역인들이 관직보다는 조선에서 천대받던 상업에 종사하며 자유 사상가적인 기질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러면서 이들 중에는 청과의 교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많이 생겨났고 이들이 조선사회에서 새로운 신흥중간 계급을 형성하였다. 이들 신흥중간 계급은 대개 중국어와 만주어에 능한 독서층이었고, 개방적이고 독립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새로운 문화와 질서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서북지역에 대한 소외와 차별이 타지역에 비해 상업에 종사하는 부유한 신흥중간 계급을 형성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고 이들이 개신교를 수용함으로써 서북지역 개신교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서북지역 신흥중간 계급의 개신교 수용은 자신들의 사회적 처지와 이해를 대변해줄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과정과 맞물려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북지역 개신교 형성의 주도층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곧 서북지역 개신교의 성격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서북지역 개신교 세력이 공산주의와 대립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즉 서북지역 개신교 신자들은 일찍부터 신흥중간 계급이라 불릴만할 상인층과 민족자본가층·중농(中農) 이상의 농민층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해방이후 북한에서 우파적 성격을 가진 조직으로 정치적 성향을 드러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사와 마사히코의 지적처럼 “북한에서 개신교 신자들의 사회계층은 부르주아에 가깝고” 북의 체제가 새로운 계급으로 규정한 “노동자·농민에는 개신교의 뿌리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북한에서의 토지개혁이 소작인과 빈농에게 인기정책이었던 반면에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자신들을 탄압하는 정책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북한에서 이들 서북지역 개신교 세력은 어떤 정치적 위치에 있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1946년 현재 북한인구 925만 7천명을 기준으로 할 때 당시의 북한 개신교 인구는 약2~3%밖에 되지 않았지만, 개신교 교회는 북한내의 지식층이 집결된 곳이었고 단순한 수치 이상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집단이었다. 실제로 해방이후 남한에서도 비록 개신교인들의 활발한 정치참여가 이루어졌지만, 개신교 정당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발견되지 않는 반면 북한에서는 서북지역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사회민주당, 기독교자유당과 같은 기독교정당이 두차례나 시도되었다. 이런 사실에서 서북개신교의 정치적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개신교 정당은 아니었지만 개신교인들이 확고하게 주도한 조선민주당은 북한내에서 우익민족주의자와 반공주의자들의 피난처 역할을 하였는데 1946년 1월초부터 신탁통치문제를 둘러싸고 우파민족주자들이 공산당의 대립상황 가운데 조만식 등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축출을 당하게 되면서 이때 축출된 조선민주당의 간부들이 월남하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월남한 서북지역 개신교는 북한내에서도 정치적 활동이 활발했던 조직이었으며 그 개개인중에는 매우 지도자적인 인물들이 많았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배경을 놓고 볼 때 월남한 서북지역 개신교가 이후 한국사회에서 반공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구축하는데 매우 조직적이고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서북지역이 가지고 있는 정치·사회적인 배경과 관련하여 개신교 성장에 보다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1894년에 있었던 청일전쟁이다. 청일전쟁으로 황폐화된 서북지역 사람들은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던 선교사들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종교적으로 위안을 받고자 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자세에도 인간적인 신뢰를 가지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청일전쟁으로 하여금 선교의 무대가 도시에서 지방 곳곳까지 넓혀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 서북지역 개신교 성장의 가장 큰 요인은 서북지역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비서북지역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던 조선인 사역자들의 헌신과 그들이 배포한 로스역 성서이다. 로스역은 종래(從來)에 문체와 번역의 이유로 비서북지역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본 고는 이러한 로스역에 비하(卑下)는 언더우드를 중심으로한 다수의 내한선교사들과 ABS가 조장한 거대담론이라 평가한다. 오히려 이런 잘못된 거대담론에 따라 로스역을 소홀히 대했던 ABS 중심의 비서북지역은 로스역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후원했던 BFBS의 사역이 집중되었던 서북지역과 비교할 때 개신교 성장의 기회를 놓쳤고, 반면에 서북지역의 개신교는 놀라운 성장을 실현했다. 여기서 로스역 성서과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가 로스역 성서를 배포했던 조선인 권서를 대하는 ABS와 BFBS의 상반된 태도이인데, ABS는 로스역 성서뿐만 아니라 조선인 권서 역시 신뢰하지 못할 존재로 비하하는 반면 BFBS는 조선인 권서들의 활동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기에 비서북지역과 서북지역 개신교 성장의 차이는 로스역 성서와 조선인 권서를 바라보는 ABS와 BFBS의 차이와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연구가, 특히 권서의 활동과 관련하여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되겠다. 다시말해 위의 연구에서 소개한 서북지역에서 개신교 성장의 원인은 꼭 서북지역만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특징은 아니었다. 가령 위 연구에서 비중있게 다룬 조선인 사역자와 성경배포만 두고 살펴보더라도 이것은 한국 개신교 선교지 전역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상도 대구 선교와 관련하여 아담스의 선교사역을 살펴보더라도 그는 1897년 대구에 도착하자마자 노방전도와 함께 쪽 복음을 팔고 사랑방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시장으로 나가서는 성경 700권을 팔았다. 하지만 이런 사역에는 아담스 혼자만의 노력이 아닌 조선인 사역자 김기원(일명 김재수)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후에도 김기원은 아담스와 함께 경상도 선교를 함께했고, 1902년 3월에는 안동 지역에서 한 달 이상 장날을 따라다니며 1천 권 이상의 신앙서적을 팔고 설교했다. 이후 안동 지역의 기독교 선교는 빠른 속도로 진행이 되었는데 그 선교 상황을 살펴보면, 1903년에 7개 마을에 기독교인 총 12명이 있었고, 1904년에 12개 마을에 예배처소 6곳과 학습교인 7명 및 신입교인 33, 1905년에는 20개 마을에 예배처소 8곳과 학습교인 19명 및 신입교인 79명, 1906년에는 기독교인이 약 200명, 1907년에는 약 600명, 1908년에는 약 1,000명으로 늘어났다. 중요한 것은 이런 선교의 확장이 아직 안동 선교부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후 안동지역에서는 일반 교인들과 조선인 권서들의 협력 속에서 1913년 이래로 5년 동안 약 65,000권의 성경이 팔렸고, 이와 함께 여러 마음에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임희국의 지적처럼 안동 지역의 교회는 서북지역 개신교와 같이 성경개신교로 정착이 되었다. 그런데 성경개신교라는 표현은 사실 사경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한국 전지역 교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서북지역에서 개신교 선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중에 하나였던 성경배포와 조선인 사역자와 관련된 부분은 비단 서북지역만의 특징이라 할 수는 없다. 다만 이 논문에서는 서북지역이 비서북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초기 로스역 성서 발행때부터 시작하여 성경배포에 더욱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는 점과 조선인 사역자 역시 상대적인 측면에서 초기부터 선교사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활약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여기서 서북지역 개신교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조선인 권서들이 특히 서북지역에서 더욱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원인으로 보부상과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고려조와 조선조로부터 정치·사회적으로 차별받던 서북지역의 배경과 관련하여 이미 살펴보았듯이 서북지역은 일찍부터 상업문화가 큰 비중을 차지했고 새로운 신흥중간 계급을 형성하기까지 했다. 이런 배경에서 조선 후기 정치적인 조직력과 백성들의 환대를 받았던 보부상과 권서의 관계는 밝히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할 중요한 연구이다. 간단히 외관상으로 볼 때 조선인들이 보부상과 권서를 동일한 상인으로 여겼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고 만약 조선인들이 권서를 보부상으로 간주했다면 이들이 권서들을 함부로 대했을 리가 없으며 권서의 한마디 한마디를 쉽게 무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권서는 조선에서 보부상의 옷을 입고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대화할수 있었으며 마침내 그들의 복음짐까지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부상과 권서는 단순히 외관상으로만 유사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권서들 중에는 말 그대로 ‘보상’이나 ‘부상’을 하면서 성경과 개신교 서적을 팔며 전도했던 인물들이 상당히 있었다. 이런 사례들을 종합해보면 권서와 보부상의 관계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러기에 이 논문 수확중 하나는 아직 미진하나 권서와 보부상의 활동을 연계하여 살펴보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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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서북지방에서 개신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본 고에서는 이를 위해 우선 서북지역이 가지고 있는 정치·사회적인 배경을 연...

    지금까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서북지방에서 개신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본 고에서는 이를 위해 우선 서북지역이 가지고 있는 정치·사회적인 배경을 연구하였는데 고려조부터 이어져 내려온 서북지역에 대한 정치적 소외와 차별이 서북지역의 신흥중간 계급들이 개신교를 수용하는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앞서 이미 지적했듯이 서북지역은 고려조와 조선조를 거치면서 문화의 불모현상을 빚었을 뿐만 아니라 농경 중심이었던 조선사회에 부합되지 않게 (황해도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산악지대였기에 농업에 온 힘을 기울일 환경도 되지못했다. 이처럼 서북지역은 벼슬할 기회도 없었고, 농업에 종사할 수도 없이 오히려 북쪽 외적들의 끊임없는 분쟁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기에 이곳 주민들의 생활상은 피폐할 수 밖에 없었고 자연히 이곳 주민들은 끊임없이 다른 지방으로 옮겨 살았기에 서북지역의 고을 중에는 텅텅 비다시피 한 곳이 많았다. 그러자 조선중앙정부에서는 변방을 충실히 해야 한다는 정책으로 이들의 이주를 금지하였고, 심지어 다른 도(道)의 죄인이나 일반 양민까지도 이곳으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으로 하여 이곳 주민들은 일찍부터 여진 및 중국과의 밀무역으로 생계를 타개하려 하였고 이런 배경에서 서북지역인들이 관직보다는 조선에서 천대받던 상업에 종사하며 자유 사상가적인 기질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러면서 이들 중에는 청과의 교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많이 생겨났고 이들이 조선사회에서 새로운 신흥중간 계급을 형성하였다. 이들 신흥중간 계급은 대개 중국어와 만주어에 능한 독서층이었고, 개방적이고 독립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새로운 문화와 질서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서북지역에 대한 소외와 차별이 타지역에 비해 상업에 종사하는 부유한 신흥중간 계급을 형성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고 이들이 개신교를 수용함으로써 서북지역 개신교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서북지역 신흥중간 계급의 개신교 수용은 자신들의 사회적 처지와 이해를 대변해줄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과정과 맞물려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북지역 개신교 형성의 주도층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곧 서북지역 개신교의 성격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서북지역 개신교 세력이 공산주의와 대립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즉 서북지역 개신교 신자들은 일찍부터 신흥중간 계급이라 불릴만할 상인층과 민족자본가층·중농(中農) 이상의 농민층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해방이후 북한에서 우파적 성격을 가진 조직으로 정치적 성향을 드러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사와 마사히코의 지적처럼 “북한에서 개신교 신자들의 사회계층은 부르주아에 가깝고” 북의 체제가 새로운 계급으로 규정한 “노동자·농민에는 개신교의 뿌리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북한에서의 토지개혁이 소작인과 빈농에게 인기정책이었던 반면에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자신들을 탄압하는 정책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북한에서 이들 서북지역 개신교 세력은 어떤 정치적 위치에 있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1946년 현재 북한인구 925만 7천명을 기준으로 할 때 당시의 북한 개신교 인구는 약2~3%밖에 되지 않았지만, 개신교 교회는 북한내의 지식층이 집결된 곳이었고 단순한 수치 이상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집단이었다. 실제로 해방이후 남한에서도 비록 개신교인들의 활발한 정치참여가 이루어졌지만, 개신교 정당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발견되지 않는 반면 북한에서는 서북지역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사회민주당, 기독교자유당과 같은 기독교정당이 두차례나 시도되었다. 이런 사실에서 서북개신교의 정치적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개신교 정당은 아니었지만 개신교인들이 확고하게 주도한 조선민주당은 북한내에서 우익민족주의자와 반공주의자들의 피난처 역할을 하였는데 1946년 1월초부터 신탁통치문제를 둘러싸고 우파민족주자들이 공산당의 대립상황 가운데 조만식 등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축출을 당하게 되면서 이때 축출된 조선민주당의 간부들이 월남하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월남한 서북지역 개신교는 북한내에서도 정치적 활동이 활발했던 조직이었으며 그 개개인중에는 매우 지도자적인 인물들이 많았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배경을 놓고 볼 때 월남한 서북지역 개신교가 이후 한국사회에서 반공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구축하는데 매우 조직적이고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서북지역이 가지고 있는 정치·사회적인 배경과 관련하여 개신교 성장에 보다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1894년에 있었던 청일전쟁이다. 청일전쟁으로 황폐화된 서북지역 사람들은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던 선교사들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종교적으로 위안을 받고자 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자세에도 인간적인 신뢰를 가지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청일전쟁으로 하여금 선교의 무대가 도시에서 지방 곳곳까지 넓혀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 서북지역 개신교 성장의 가장 큰 요인은 서북지역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비서북지역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던 조선인 사역자들의 헌신과 그들이 배포한 로스역 성서이다. 로스역은 종래(從來)에 문체와 번역의 이유로 비서북지역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본 고는 이러한 로스역에 비하(卑下)는 언더우드를 중심으로한 다수의 내한선교사들과 ABS가 조장한 거대담론이라 평가한다. 오히려 이런 잘못된 거대담론에 따라 로스역을 소홀히 대했던 ABS 중심의 비서북지역은 로스역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후원했던 BFBS의 사역이 집중되었던 서북지역과 비교할 때 개신교 성장의 기회를 놓쳤고, 반면에 서북지역의 개신교는 놀라운 성장을 실현했다. 여기서 로스역 성서과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가 로스역 성서를 배포했던 조선인 권서를 대하는 ABS와 BFBS의 상반된 태도이인데, ABS는 로스역 성서뿐만 아니라 조선인 권서 역시 신뢰하지 못할 존재로 비하하는 반면 BFBS는 조선인 권서들의 활동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기에 비서북지역과 서북지역 개신교 성장의 차이는 로스역 성서와 조선인 권서를 바라보는 ABS와 BFBS의 차이와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연구가, 특히 권서의 활동과 관련하여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되겠다. 다시말해 위의 연구에서 소개한 서북지역에서 개신교 성장의 원인은 꼭 서북지역만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특징은 아니었다. 가령 위 연구에서 비중있게 다룬 조선인 사역자와 성경배포만 두고 살펴보더라도 이것은 한국 개신교 선교지 전역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상도 대구 선교와 관련하여 아담스의 선교사역을 살펴보더라도 그는 1897년 대구에 도착하자마자 노방전도와 함께 쪽 복음을 팔고 사랑방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시장으로 나가서는 성경 700권을 팔았다. 하지만 이런 사역에는 아담스 혼자만의 노력이 아닌 조선인 사역자 김기원(일명 김재수)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후에도 김기원은 아담스와 함께 경상도 선교를 함께했고, 1902년 3월에는 안동 지역에서 한 달 이상 장날을 따라다니며 1천 권 이상의 신앙서적을 팔고 설교했다. 이후 안동 지역의 기독교 선교는 빠른 속도로 진행이 되었는데 그 선교 상황을 살펴보면, 1903년에 7개 마을에 기독교인 총 12명이 있었고, 1904년에 12개 마을에 예배처소 6곳과 학습교인 7명 및 신입교인 33, 1905년에는 20개 마을에 예배처소 8곳과 학습교인 19명 및 신입교인 79명, 1906년에는 기독교인이 약 200명, 1907년에는 약 600명, 1908년에는 약 1,000명으로 늘어났다. 중요한 것은 이런 선교의 확장이 아직 안동 선교부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후 안동지역에서는 일반 교인들과 조선인 권서들의 협력 속에서 1913년 이래로 5년 동안 약 65,000권의 성경이 팔렸고, 이와 함께 여러 마음에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임희국의 지적처럼 안동 지역의 교회는 서북지역 개신교와 같이 성경개신교로 정착이 되었다. 그런데 성경개신교라는 표현은 사실 사경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한국 전지역 교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서북지역에서 개신교 선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중에 하나였던 성경배포와 조선인 사역자와 관련된 부분은 비단 서북지역만의 특징이라 할 수는 없다. 다만 이 논문에서는 서북지역이 비서북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초기 로스역 성서 발행때부터 시작하여 성경배포에 더욱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는 점과 조선인 사역자 역시 상대적인 측면에서 초기부터 선교사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활약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여기서 서북지역 개신교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조선인 권서들이 특히 서북지역에서 더욱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원인으로 보부상과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고려조와 조선조로부터 정치·사회적으로 차별받던 서북지역의 배경과 관련하여 이미 살펴보았듯이 서북지역은 일찍부터 상업문화가 큰 비중을 차지했고 새로운 신흥중간 계급을 형성하기까지 했다. 이런 배경에서 조선 후기 정치적인 조직력과 백성들의 환대를 받았던 보부상과 권서의 관계는 밝히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할 중요한 연구이다. 간단히 외관상으로 볼 때 조선인들이 보부상과 권서를 동일한 상인으로 여겼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고 만약 조선인들이 권서를 보부상으로 간주했다면 이들이 권서들을 함부로 대했을 리가 없으며 권서의 한마디 한마디를 쉽게 무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권서는 조선에서 보부상의 옷을 입고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대화할수 있었으며 마침내 그들의 복음짐까지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부상과 권서는 단순히 외관상으로만 유사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권서들 중에는 말 그대로 ‘보상’이나 ‘부상’을 하면서 성경과 개신교 서적을 팔며 전도했던 인물들이 상당히 있었다. 이런 사례들을 종합해보면 권서와 보부상의 관계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러기에 이 논문 수확중 하나는 아직 미진하나 권서와 보부상의 활동을 연계하여 살펴보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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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서론 1
    • A. 문제제기: 서북지역 개신교 연구의 중요성 1
    • B. 연구범위 2
    • Ⅱ. 서북지역과 비서북지역 개신교 선교결과 비교 4
    • A. 통계학적 비교 4
    • Ⅰ. 서론 1
    • A. 문제제기: 서북지역 개신교 연구의 중요성 1
    • B. 연구범위 2
    • Ⅱ. 서북지역과 비서북지역 개신교 선교결과 비교 4
    • A. 통계학적 비교 4
    • B. 초기 내한 선교사의 기록에 나타난 비교 14
    • Ⅲ. 서북지역 선교의 정치·사회적인 배경 21
    • A. 서북지역에 대한 차별과 소외 21
    • 1. 차별과 소외의 원인 21
    • 2. 차별과 소외의 결과로 나타난 반정부적 성격 25
    • 3. 차별과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28
    • B. 청일전쟁 31
    • Ⅳ. 서북지역 개신교 성장 원인 36
    • A. 개신교에 대한 특별한 기대(정치사회적 배경과 연관하여) 36
    • 1. 새로운 변혁을 위한 개신교 수용 36
    • 2. 피난처로서의 개신교에 대한 기대 39
    • B. 서북지역의 적극적인 로스역 수용 45
    • 1. 로스역 성서와 서북지역 45
    • 2. 영국성서공회에 의한 적극적인 로스역 수용 48
    • C. 서북지역의 조선인 권서의 활동 57
    • 1. 권서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성 57
    • 2. 권서와 서북지역의 보부상 59
    • 3. 서북지역의 적극적인 조선인 사역자 활용 66
    • Ⅴ. 서북지역 개신교 선교의 발전과정 72
    • A. 1884년 이전 72
    • B. 1884년부터 1907년까지 75
    • C. 1907년 이후 80
    • Ⅵ. 결론 84
    • A. 요약 84
    • B. 제언: 서북지역 개신교 발전을 통해 살펴본 21세기 한국교회의 모습 89
    • 참고문헌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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