禿魯花는 본래 몽골에서 유목군장에게 귀부한 군소족장들이 복속을 담보하기 위해 보냈던 質子를 말한다. 그들은 군장을 호위하는 친위대인 怯薛의 구성원으로 조직되기도 하였으므로 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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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9
2009
한국어
서울
49 p. : 삽도 ; 26 cm.
단면인쇄임
지도교수: 이진한
참고문헌 : p. 4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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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禿魯花는 본래 몽골에서 유목군장에게 귀부한 군소족장들이 복속을 담보하기 위해 보냈던 質子를 말한다. 그들은 군장을 호위하는 친위대인 怯薛의 구성원으로 조직되기도 하였으므로 人...
禿魯花는 본래 몽골에서 유목군장에게 귀부한 군소족장들이 복속을 담보하기 위해 보냈던 質子를 말한다. 그들은 군장을 호위하는 친위대인 怯薛의 구성원으로 조직되기도 하였으므로 人質과 宿衛라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몽골제국에도 그대로 답습되었고 정복전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복속지역에 대해 요구하는 여섯 가지 의무조항인 六事의 하나로 구현되었다.
高麗는 몽골의 침입을 받는 동안 수차례에 걸쳐서 항복의 증표로 독로화를 보내도록 강요받았다. 그 결과 1271년에 世子가 독로화로 파송되어 元 公主와 혼인함으로써 皇帝의 駙馬가 되었고, 1279년에는 당시 宰樞를 비롯한 고위관직자의 자제들이 독로화로 파송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원은 고려왕실에 대한 구속력은 물론이고 고려관료들에 대한 견제책마저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 고려와 몽골의 관계가 아직 안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독로화는 복속을 담보하기 위한 인질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忠烈王 중기 이후 독로화는 양국관계의 안정을 바탕으로 본래 목적인 인질의 의미가 점차 퇴색되고 인질을 유지 운영하는 방식인 숙위 중심으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이는 독로화의 파송에 대하여 각종 문헌에서 인질을 의미하는 ‘禿魯花’나 ‘入質’이라는 표현을 더 이상 쓰지 않고 ‘宿衛’나 ‘入侍’ 등으로 기록한 점을 통해 확인된다. 또한 고려에서는 인질을 의미하는 몽골어인 ‘禿魯花’를 가리켜 ‘弓箭陪’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충렬왕 중기 이후부터는 사료 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다. 즉 몽골이 고려를 침입하였을 때에 독로화는 파송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나, 양국관계가 원만해진 상태에서는 이미 확보된 독로화를 유지 갱신하기 위한 운영방식으로 숙위가 보다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질의 의미로 쓰인 ‘禿魯花’라는 말은 차츰 사용되지 않았고 대신에 ‘宿衛’라는 말로 전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麗元關係의 변화와도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원은 고려의 지배층에게 각종 지위를 규정해주는 방식을 통해 제국의 지배질서체계로 편입시키려고 하였다. 고려국왕의 경우 冊封과 印信을 내려주어 제국 내에서의 권위가 설정되었고, 고려관료들에게는 官階와 官職을 수여하는 방식으로 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충렬왕 중기 이후부터 고려국왕의 지위가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고려관료들이 관계와 관직을 받는 빈도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양국관계의 변화를 확인함으로써 독로화의 성격이 변화하게 되는 계기를 엿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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