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조선후기 화원화가 華山館 李命基(1756-1802년 이후)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한 고찰이다. 이명기는 1756년(영조 12) 화원 李宗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아버지 이종수와 장인 金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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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明知大學校 大學院, 2007
학위논문(석사) -- 明知大學校 大學院 , 미술사학과 한국회화사 전공 , 2008.2
2007
한국어
653.11 판사항(5)
서울
ⅲ, 126 p. ; 26 cm
지도교수: 李泰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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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이 논문은 조선후기 화원화가 華山館 李命基(1756-1802년 이후)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한 고찰이다. 이명기는 1756년(영조 12) 화원 李宗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아버지 이종수와 장인 金應...
이 논문은 조선후기 화원화가 華山館 李命基(1756-1802년 이후)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한 고찰이다. 이명기는 1756년(영조 12) 화원 李宗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아버지 이종수와 장인 金應煥을 통해 화가수업을 받은 이명기는 초상화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1791년(정조 15)과 1796년(정조 20) 두 차례나 어진제작의 주관화사로 참여하였다. 1793년 여름부터는 경상도 영천의 長水道驛에 察訪으로 근무를 하였다. 이명기에 대한 기록은 1802년(순조 2) 『日省錄』기사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있어, 1802년 이후 사망하였음이 짐작된다.
이명기 회화의 결정이라 할 수 있는 초상화는 이전시기 활약했던 선배화원의 화풍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구축하였다. 이명기의 초상화법은 이전시기에 비해 선묘의 표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 대신 색의 중첩과 선염처리를 통해 안면의 굴곡과 의복의 입체감을 살렸다. 바닥의 화문석은 세로결과 문양의 사선에 따라 의자다리와 족좌대를 평행배치하였고, 그 좌우에 엷은 먹으로 인물의 그림자를 표현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서양화법을 수용하면서 특징이다. 이처럼 이명기의 초상화는 역대 초상화의 장점을 소화하여, 더욱 사실감 넘치도록 대상인물을 표현함으로써, 조선시대 초상화의 최정점에 자리잡았다. 이후 이명기의 초상화법은 18세기 후반-19세기 초 초상화법의 정형이 되었고, 후배 화원의 모범이 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초상화법은 쇠퇴의 길을 걷는다. 사실적인 입체감 표현보다는 선의 사용이 강조된 고식을 따른다. 이명기의 초상화법은 더 이상 발전, 계승하지 못한 셈이다.
이명기는 초상화 외에도 산수인물화에 기량을 발휘했다. 이명기의 산수인물화는 현전작품을 통해 살펴볼 때 唐詩나 故事를 화제로 한 고사인물화에 집중하였음이 확인된다. 그의 산수인물화는 당시 일종의 시대양식처럼 18세기 후반-19세기 화원들과 마찬가지로 계승되었던 金弘道의 화풍을 따랐다. 암벽과 바위 처리에 사용한 변형된 하엽준 표현, 수목의 가지표현 등에서 이런 특징들이 두드러지는데 완벽히 익히지는 못한 듯 그 고졸함이 흉내만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화산관’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1793년 찰방 부임을 기점으로, 가는 세필의 필법이 힘차고 굵은 먹선의 절제된 필선으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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