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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奎報 散文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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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1276646

    • 저자
    • 발행사항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 2008

    • 학위논문사항
    • 발행연도

      2008

    • 작성언어

      한국어

    • 발행국(도시)

      서울

    • 형태사항

      iii, 182 p. : 삽도 ; 26 cm.

    •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정우봉
      참고문헌 : p. 175-182

    • 소장기관
      •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기관정보
      • 고려대학교 세종학술정보원 소장기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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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본고는 무신집권기의 산문 작가 중 李奎報(1168~1241)의 산문 작품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산문사적 의의를 구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본고가 무신집권기의 다양한 작가군 중 이규보에 집중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규보는 53권(󰡔全集󰡕 41권, 󰡔後集󰡕 12권)의 방대한 문집을 남겼는데, 산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집󰡕이 23권, 󰡔후집󰡕이 2권이다. 현전하는 무신집권기의 작품이 극히 소수임을 감안할 때, 이규보의 산문 작품은 이 시기의 창작 경향과 성과를 파악할 수 있는 잣대가 되기에 충분할 것으로 사료된다.
    둘째, 이규보가 창작한 산문 작품은 그 수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說ㆍ論ㆍ辨ㆍ跋ㆍ書ㆍ序ㆍ傳ㆍ碑誌ㆍ祭文ㆍ箴ㆍ銘 등 다양한 산문 양식을 창작하였다. 이를 통해 이규보 산문뿐만 아니라 무신집권기의 산문사적 의의를 구명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
    셋째, 이규보의 산문은 이후 전개되는 도학자들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양한 사상적 함의를 담고 있으며, 호응을 통해 작품의 내적 유기성을 提高하였으며, 반어를 통해 울적한 심회를 발현하는 등 수준 높은 작품이 많다. 따라서 이규보는 산문사의 초기 작가로서의 위상뿐만 아니라 한국산문사의 대표 작가로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작가로 판단된다.
    이규보는 기본적으로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경계를 추구한 작가였다. 그가 구름의 品德을 기리고 그것을 배우려는 자유로운 정신 자세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을 깨트려 기발한 발상으로 문학화하는 진전된 모습을 보인다. 특히 그의 논설류는 이러한 특징을 오롯이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안주하거나 하나에 머무르는 것을 싫어하여 다양한 세계를 탐색하고 이를 그의 산문에 담고자 하였다. 衆體를 구비하는 것이 진정한 시인의 경지라고 하였던 것처럼 그는 논설류ㆍ증서류ㆍ서신류ㆍ비지류ㆍ애제류ㆍ잡기류 등 모든 체식을 망라할 정도로 다양하게 창작하였고, 왕성한 창작 능력을 발휘하여 공적 산문에서부터 사적 산문으로 그 영역을 확대ㆍ심화하였다. 물론 성리학적 체계를 수용한 고려 후기 작가들과 사상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직접적 영향 관계를 해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그의 산문이 고려 후기의 산문적 성과의 교두보 또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그는 철저하게 문인을 자처한 작가였다. 패러디는 여러 가지의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기법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패러디에서도 문인에 대한 자부가 역력하게 투사되어 있다. 특히 젊은 날 그의 문재 과시에 관련된 일화는 단적으로 이를 증명해 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산문을 통해 문인의 자부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의 특장이 문학이었으며, 그는 문학을 통해 세상을 경륜하고 나라를 빛내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다양한 독서는 문학의 제재로 활용하는 효용론의 측면이 강하였고, 각종 역사서의 탐독은 옛날의 역사에서 옳고 그름과 잘잘못을 간취함으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대비책으로 삼았다. 때문에 신분은 미천하지만 청렴하고 정직한 盧克淸을 입전하였고, 건물기에서는 여행객의 편의를 제공한 김해의 이름없는 아전을 칭송하였으며, 貪臣을 준엄하게 꾸짖던 崔洪烈의 일화를 說로 남겨 만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다. 게다가 강을 건너는 것처럼 사소한 일에도 뇌물이 횡행하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하며, 집을 수리하거나 정원에 풀을 베는 것에서도 경세하고자 하는 포부와 희망을 담아 그의 관인 의식을 발현하였다.
    이규보는 제재의 취택에 있어서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자질구레하고 시시콜콜한 생활 속 제제는 모두 그의 문학적 因子들이었다. 이[蝨], 詩魔, 술병, 다리가 부러진 책상, 쥐, 집수리, 정원 풀매기, 관상가, 土靈, 뇌물, 이별, 여행 등 일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을 그는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그가 畫論에서 주장한 핍진성, 그것은 외모를 흡사하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담고 있는 근원을 제대로 간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식은 일상의 제재들을 활용한 산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관념을 보편적 관념으로 확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類比를 통해 그의 논지를 전개하거나 의미를 무한 확장하여 자신의 추구나 지향점을 대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긴장으로만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이완된 지점에서 여유를 부리기도 하며, 이러한 점은 그의 산문에서 해학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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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무신집권기의 산문 작가 중 李奎報(1168~1241)의 산문 작품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산문사적 의의를 구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본고가 무신집권기의 다양한 작가군 중 이규보에 ...

    본고는 무신집권기의 산문 작가 중 李奎報(1168~1241)의 산문 작품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산문사적 의의를 구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본고가 무신집권기의 다양한 작가군 중 이규보에 집중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규보는 53권(󰡔全集󰡕 41권, 󰡔後集󰡕 12권)의 방대한 문집을 남겼는데, 산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집󰡕이 23권, 󰡔후집󰡕이 2권이다. 현전하는 무신집권기의 작품이 극히 소수임을 감안할 때, 이규보의 산문 작품은 이 시기의 창작 경향과 성과를 파악할 수 있는 잣대가 되기에 충분할 것으로 사료된다.
    둘째, 이규보가 창작한 산문 작품은 그 수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說ㆍ論ㆍ辨ㆍ跋ㆍ書ㆍ序ㆍ傳ㆍ碑誌ㆍ祭文ㆍ箴ㆍ銘 등 다양한 산문 양식을 창작하였다. 이를 통해 이규보 산문뿐만 아니라 무신집권기의 산문사적 의의를 구명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
    셋째, 이규보의 산문은 이후 전개되는 도학자들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양한 사상적 함의를 담고 있으며, 호응을 통해 작품의 내적 유기성을 提高하였으며, 반어를 통해 울적한 심회를 발현하는 등 수준 높은 작품이 많다. 따라서 이규보는 산문사의 초기 작가로서의 위상뿐만 아니라 한국산문사의 대표 작가로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작가로 판단된다.
    이규보는 기본적으로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경계를 추구한 작가였다. 그가 구름의 品德을 기리고 그것을 배우려는 자유로운 정신 자세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을 깨트려 기발한 발상으로 문학화하는 진전된 모습을 보인다. 특히 그의 논설류는 이러한 특징을 오롯이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안주하거나 하나에 머무르는 것을 싫어하여 다양한 세계를 탐색하고 이를 그의 산문에 담고자 하였다. 衆體를 구비하는 것이 진정한 시인의 경지라고 하였던 것처럼 그는 논설류ㆍ증서류ㆍ서신류ㆍ비지류ㆍ애제류ㆍ잡기류 등 모든 체식을 망라할 정도로 다양하게 창작하였고, 왕성한 창작 능력을 발휘하여 공적 산문에서부터 사적 산문으로 그 영역을 확대ㆍ심화하였다. 물론 성리학적 체계를 수용한 고려 후기 작가들과 사상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직접적 영향 관계를 해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그의 산문이 고려 후기의 산문적 성과의 교두보 또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그는 철저하게 문인을 자처한 작가였다. 패러디는 여러 가지의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기법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패러디에서도 문인에 대한 자부가 역력하게 투사되어 있다. 특히 젊은 날 그의 문재 과시에 관련된 일화는 단적으로 이를 증명해 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산문을 통해 문인의 자부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의 특장이 문학이었으며, 그는 문학을 통해 세상을 경륜하고 나라를 빛내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다양한 독서는 문학의 제재로 활용하는 효용론의 측면이 강하였고, 각종 역사서의 탐독은 옛날의 역사에서 옳고 그름과 잘잘못을 간취함으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대비책으로 삼았다. 때문에 신분은 미천하지만 청렴하고 정직한 盧克淸을 입전하였고, 건물기에서는 여행객의 편의를 제공한 김해의 이름없는 아전을 칭송하였으며, 貪臣을 준엄하게 꾸짖던 崔洪烈의 일화를 說로 남겨 만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다. 게다가 강을 건너는 것처럼 사소한 일에도 뇌물이 횡행하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하며, 집을 수리하거나 정원에 풀을 베는 것에서도 경세하고자 하는 포부와 희망을 담아 그의 관인 의식을 발현하였다.
    이규보는 제재의 취택에 있어서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자질구레하고 시시콜콜한 생활 속 제제는 모두 그의 문학적 因子들이었다. 이[蝨], 詩魔, 술병, 다리가 부러진 책상, 쥐, 집수리, 정원 풀매기, 관상가, 土靈, 뇌물, 이별, 여행 등 일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을 그는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그가 畫論에서 주장한 핍진성, 그것은 외모를 흡사하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담고 있는 근원을 제대로 간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식은 일상의 제재들을 활용한 산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관념을 보편적 관념으로 확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類比를 통해 그의 논지를 전개하거나 의미를 무한 확장하여 자신의 추구나 지향점을 대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긴장으로만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이완된 지점에서 여유를 부리기도 하며, 이러한 점은 그의 산문에서 해학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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