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문"은 우리나라 초학용 한자교재로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다. 주흥사의 "천자문"이 전해진 이래 조선시대 서당 교육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 한자교육 입문서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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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 2008
학위논문(석사) -- 고려대학교 대학원 , 국어국문학과 한문학전공 , 2008.2
2008
한국어
서울
110 p. : 삽도 ; 26 cm.
지도교수: 정우봉
참고문헌 : p. 9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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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천자문"은 우리나라 초학용 한자교재로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다. 주흥사의 "천자문"이 전해진 이래 조선시대 서당 교육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 한자교육 입문서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 하고 ...
"천자문"은 우리나라 초학용 한자교재로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다. 주흥사의 "천자문"이 전해진 이래 조선시대 서당 교육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 한자교육 입문서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다. 하지만 주흥사의 "천자문"은 중국에서 편찬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실정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과 제시되는 한자의 배열이 학습하기에 어렵다고 하여 한자교육 입문서로서 비판을 받아왔다. 崔世珍의 "훈몽자회"와 정약용의 "아학편"은 이러한 비판에 대한 개선책으로서 지어진 것이었다. 일제 시대에 들어와서는 주흥사의 "천자문"을 계승하면서, 우리의 실정에 맞는 ‘우리식 천자문’이 저술되었는데, 그 계열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주흥사 천자문’ 계열이다. ‘주흥사 천자문’은 다시 세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한글 석음이 붙은 ‘광주 천자문’류, 초학자들에게 글씨 교육이라는 실용적 목적에서 널리 활용된 ‘석봉 천자문’류, 석음을 훨씬 상세하게 하고 한문으로 주해한 ‘주해 천자문’류이다.
둘째, ‘분류 천자문’ 계열이다. ‘분류 천자문’은 일정한 어휘 범주들을 분류하여 편찬한 것인데, 김기홍의 "부별천자문", 이승희의 "정몽류어", 김태린의 "동몽수독천자문" 등이 있다.
셋째, ‘역사 천자문’ 계열이다. ‘역사 천자문’은 우리나라 역사를 소재로 하여 1,000개의 글자로 구성되었으며, 일제 시대를 중심으로 하여 간행되었는데, 그 이유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심형진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한 것으로 간주되는 "조선역사천자문", 이 책을 바로잡아 일부를 개작한 것으로 알려진 엄수동의 "동몽독본", 안동 김씨 동파의 후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어진 김호직의 "동천자" 등이 있다. 일제 시대 때 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는 윤희구의 "천자동사", 김균의 "대동천자문"이 있다. 이 ‘역사 천자문’은 ‘우리식 천자문’ 중에서 가장 시대적 색채가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사상 천자문’ 계열이다. 이는 어떤 철학적 이념이나 가치 체계와 관련된 한자를 천자문이라는 형식을 빌려 그러한 이념과 사상을 가르치려고 만든 것으로, 남건의 "성리 천자문"이 대표적이다. 이 네 가지 계열은 주흥사 "천자문"을 내용상, 형식상에서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변화하는 교육 환경에 맞게 변화해 갔다는 데 의의가 있다.
"동천자"의 내용 분석에 앞서 김호직의 가계와 생애를 살펴보았다. 김호직은 1874년, 외세가 동점해 오던 시대에 태어나 을미사변, 경술국치, 광복, 6.25를 겪었다. 그야말로 민족적 시련기를 관통해서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행동 성향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으며, 불의를 참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가계의 영향이 컸다. 특히 불의를 참지 못하는 것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해 왔을 때는 그의 작은아버지 김상종과 친아버지 김회종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여 그들을 응징하고 있는 모습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생애는 수학기(22세;1895년), 의병활동,국토유람기(23세~36세;1896~1909), 은둔,피난기(37세~80세;1910~1953)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는 향산 이만도에게 나가 배웠으며, 을미사변이 일어났을 때 의성 지역의 의병장이었던 그의 작은아버지와 의병활동을 전개하였고, 1896년 황산, 금성 전투에서 패한 후 남쪽으로는 제주도, 북쪽으로는 금강산 일대를 두루 여행하여 삶의 방향성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문경으로 들어가 두문불출 하였던 것이다.
"동천자"를 저술한 배경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내적 요인으로는 일제 시대 하에서 ‘집안 후손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의식’이며 외적 요인으로는 ‘서당을 중심으로 한 "천자문" 교육’, ‘우리식 천자문의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동천자"의 ‘동’의 의미가 ‘동파’라는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통해 ‘집안 후손들의 교육에 대한 책임의식’을 읽을 수 있으며, 1,000자를 4자 250구로 나누는 "천자문"의 형식을 차용하여 초학자들에게 형식상의 생소함을 불식시키고, 그 안에 우리의 역사를 담아내어 내용상의 혁신을 추구했던 것은 당시 서당의 초학용 교재가 천자문이었으며, 우리식 천자문이 다수 지어졌다는 외적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저술 배경을 가지는 "동천자"의 주요 특징적 면모는 ‘반외세,저항 정신 고취’, ‘절의 정신 강조’, ‘영남 남인의 입장 대변’, ‘한자의 석음과 자세한 주해 제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저술 당시에 일제라는 외세가 침략을 해 온 상황이었기 때문에 반외세적 내용과 더불어 우리의 저항 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사건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으며, 아울러 국난 타개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