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 文 抄 錄 指頭畵는 작화의 도구로 붓을 사용하는 것 대신에 손의 일부, 즉 손가락, 손톱, 손등, 손바닥 등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을 뜻한다. 때로는 손가락의 사용과 함께 나뭇가지나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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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7
학위논문(석사) -- 고려대학교 대학원 , 문화재학협동과정 미술사학전공 , 2007. 2
2007
한국어
서울
vi, 175 p. : 삽도 ; 26 cm.
지도교수: 변영섭
부록수록
참고문헌 : p. 12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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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 文 抄 錄 指頭畵는 작화의 도구로 붓을 사용하는 것 대신에 손의 일부, 즉 손가락, 손톱, 손등, 손바닥 등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을 뜻한다. 때로는 손가락의 사용과 함께 나뭇가지나 바...
國 文 抄 錄
指頭畵는 작화의 도구로 붓을 사용하는 것 대신에 손의 일부, 즉 손가락, 손톱, 손등, 손바닥 등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을 뜻한다. 때로는 손가락의 사용과 함께 나뭇가지나 바늘 등의 도구를 사용하기도 하며 색채를 사용할 때는 붓의 사용을 겸하기도 하지만 지두화라는 용어가 指示하듯, 손의 사용은 작화의 과정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한다.
기록상 붓 외의 도구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의 창작행위는 唐末의 逸品화가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붓 외의 도구 중에서도 신체의 일부를 사용한 그림이 ‘지두화’라는 용어로 규정되어 하나의 회화장르로 자리 잡게 된 것은 明末淸初에 이르러서 이다. 지두화의 유행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이는 高其佩(1662-1734)로 그는 주로 손의 일부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이후 고기패의 창작방식에 호응하는 화가들이 그 뒤를 따르면서 지두화의 제작이 지속되었다. 고기패 이후 지두화의 제작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따라 전개되는데, 고기패와 같은 八旗畵家들에 의해 제작된 지두화가 하나의 흐름을 차지하였으며 또 다른 흐름은 소위 揚州畵派라고 일컬어지는 화가들이 중심이 된 것이었다. 이들의 지두화는 약 18세기 전반기부터 대청회화교류를 통해 조선화단에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
조선에서는 명말청초에 정립된 지두화가 전래되기 이전인 17세기경의 기록을 통해 붓 외의 도구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모필에 기반을 둔 전통 속에서 그 흐름은 미약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작품을 통해 확인하기도 어렵다.
조선화단에서 명말청초에 정립된 지두화의 개념이 공유되는 시기는 18세기 중엽부터 이다. 지두화의 유입초기에 해당하는 18세기 중엽에는 沈師正(1707-1769), 許佖(1709~1761), 姜世晃(1713-1791), 金允謙(1711-1775)과 같은 문인화가들을 중심으로 지두화의 제작이 이루어 졌다. 당시에 지두화법을 시도한 문인화가들은 元末四大家나 明代 吳派 계열의 남종문인화, 明末 董其昌의 화풍, 그리고 당시에 유입되었던 畵譜類에 자주 등장하는 남종 문인화 양식을 기반으로 개인의 화풍을 확립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남종화 양식은 浙派의 영향을 간직한 指頭人物畵나 指頭山水畵, 그리고 양주화파류의 指頭翎毛花卉圖 양식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와 같은 양식상의 차이 속에서 지두화를 수용하기 시작한 화가들은 새롭게 전래된 청대 지두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모티프나 구도를 총괄하는 화풍 전반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기법적인 측면에 무게를 두고 지두화를 인식하게 되었다. 요컨대 18세기 중엽 지두화의 제작은 당시 조선화단에서 추구되고 있었던 소재와 구도를 유지하면서 여기에 지두화법이 개입되는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그 결과 유입초기 제작된 지두화는 청대 지두화의 양식 중 기법을 제외하면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유입초기의 지두화에 대한 인식과 제작양상은 이후 조선후기 지두화의 전개과정에서 기본적인 틀로 작용하게 된다.
18세기 후반에는 북학파 문사들의 연행을 통해 청대 지두화의 유입이 가속화 된다. 북경 사행원들은 고기패와 朱倫瀚(1680-1760)등 청초 지두화가들의 영향아래 지두화를 즐겼던 孫鎬(1733-1789), 魁倫, 張道渥과 같은 청대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의 지두화를 증여받았는데 이는 당시 조선화단에서 제작된 지두화에 대한 문사들의 관심을 증대시켰으며, 19세기 전반까지 지속된 청대 지두화 유입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이러한 화단의 흐름 속에서 18세기 후반의 지두화는 직업화가와 중인화가 등 다양한 계층을 통해 제작되면서 하나의 회화기법으로 일반화 되어갔다.
19세기 초반, 조선의 지두화는 尹濟弘(1764-1844이후)을 통해 괄목할 만한 변화를 맞이한다. 그의 지두화는 유입초기부터 독특한 變容의 과정을 겪었던 조선후기 지두화의 양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윤제홍 지두화의 특징은 독특한 지두화법과 指書의 적극적인 활용, 그리고 대담하고 이색적인 구도로 大別된다. 특히 그가 구사한 지두화법은 강렬한 먹과 날카로운 지두선의 표현적 효과에 집중하는 청대 지두화법과는 달리, 물기가 많은 선염의 효과를 구불거리는 지두선과 융합시켜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담박하며 맑은 느낌을 준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指書와 대담한 생략과 변형을 위주로 한 구도는 화면 안에서 경물과 글씨의 물리적 경계를 사라지게 만들어 윤제홍만의 조형언어로 자리 잡게 된다. 이와 같은 윤제홍의 지두화는 윤제홍 개인의 양식인 동시에 19세기 초 한국적인 지두화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19세기 중엽의 지두화는 조선화단에서 1세기가 넘게 이어져 온 지두화에 대한 인식과 金正喜(1768-1856)의 회화관이 조응하면서 사의적인 기법으로서의 지두화에 대한 인식이 보다 강화되었다. 더불어 당시 화단에서 墨蘭畵를 중심으로 널리 유행하였던 양주화파 화가들의 지두화 양식이 許鍊(1809-1893)과 같은 화가들을 통해 수용되어 지두화의 제작에 반영되었다.
19세기 중엽이후 지두화는 사의성이 강한 남종화의 기법이라는 전대 지두화의 성격을 탈피하여 다소간의 문기를 드러내면서도 사회적으로 인기 있는 주제와 결합하는 양상을 보인다. 楊基薰(1843-?)이 지속적으로 그린 지두영모화훼도류의 병풍은 지두화가 기능적이고 장식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기법중의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수요층의 기대에 부흥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변하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지두화법은 오랜 기간 동안 문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에 좀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매개채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寫意性만을 표방하고자 한 이들에게 붓이 아닌 손을 이용한 그림이라는 ‘기이함’을 강조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화가들이 기존의 조형관과 회화제작의 흐름 속에서 지두화법이라는 이색적인 요소를 受容하여 變容해가는 과정을 살피고, 이를 통해 특정한 화법이 조선시대 회화작품의 제작에 미친 영향의 일면을 살 필 수 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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