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동일성”을 수단으로 하여 타자들의 “타자성”을 절대정신의 왕국 아래로 포섭시키는 헤겔『정신현상학』의 전체 구조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구성되었다.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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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2006
학위논문 (석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 신학과 조직신학 , 2006
2006
한국어
231.71 판사항(21)
서울
v, 272p.; 30cm
각주 수록
참고문헌 : p.268-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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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동일성”을 수단으로 하여 타자들의 “타자성”을 절대정신의 왕국 아래로 포섭시키는 헤겔『정신현상학』의 전체 구조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구성되었다. 헤겔『정신현상학』에서 “정신(Geist)”은 변증법적 운동을 통하여 세 단계를 거치면서 마지막 종착지인 “절대지”의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이 세 단계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정신은 “단순한 존재의 상태(an-sich)”를 의미하는 “즉자존재”로부터, “생성 변화의 상태(für-sich)”를 의미하는 “대자존재”로, 그리고 “대자존재”로부터 “완성된 상태(an-und-für-sich)”를 의미하는 “즉자-대자존재”로 이행한다. 이 변증법적 과정을 주관정신의 관점에서 다시 고쳐 쓰면 다음과 같이 된다. 변증법의 초기 단계에서 “의식”은 “그 자체로 있다.”(Ansichsein) “의식”은 감각-지각-오성을 거치면서 자기를 의식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 자기의식 단계에서 의식은 “의식하는 자아”와 “의식되는 자아”로 구분된다. 헤겔은 이렇게 양쪽으로 분리된 의식을 “불행한 의식”이라고 부른다. 이때 의식은 불행한 모습으로 양쪽으로 분열되어 “대상적으로 있으면서 자기를 의식한다.”(Fürsichsein) 이렇게 양쪽으로 분열된 불행한 의식은 “이성(Vernunft)”의 계기에서 “의식되는 자아”가 “의식하는 자아”로 복귀하면서 하나로 종합된다.(An-und-für-sichsein) 이 헤겔 변증법으로부터 필자는 “신뢰의 해석학,” “의혹의 해석학,” “회복의 해석학”과 같은 세 가지 해석학 모델들을 연구가설을 위해 끌어냈다. 첫 번째로, “신뢰의 해석학”은 전통과의 대화에서 전통에 대한 “신뢰”와 “동의”를 특성으로 한다는 점에서 헤겔 변증법의 “즉자존재”에 대응된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의혹의 해석학”은 전통에 대한 “의혹,” “비판,” “단절”을 특성으로 한다는 점에서 “대자존재”에 대응된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회복의 해석학”은 이렇게 단절된 전통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전통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특성으로 한다는 점에서 “즉자-대자존재”에 대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학의 세 가지 모델들은 헤겔 변증법과 같은 방식으로 지양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모델들은 “신뢰”(긍정)-“의혹”(부정)-“회복”(종합)-“절대지”와 같은 방식으로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갈등을 일으킬 때가 더 많다. 왜냐하면 해석학은 “타자들의 타자성”을 자아의 “동일성” 안으로 포섭시키는 헤겔의 정신 현상학에 철저하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신뢰”와 “의혹” 사이에 탈근대의 사상적 배경인 “언어의 다양성과 역사의 모호성”을 삽입하였고 “회복”과 “절대지” 사이에 레비나스의 “타자의 해석학”을 삽입하였으며, “절대지”를 예수의 “하나님 나라”로 변경시켰다. 이 논문은 모두 여덟 개의 장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I 장의 서론과 VIII 장의 결론을 뺀 나머지 장들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전개된다.
제 II 장에서는 “신뢰,” “의혹,” “회복,” “사랑”과 같은 네 가지 해석학 모델들의 대략적인 윤곽이 그려진다. 멜 깁슨의 “그리스도 수난”이란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에서 “해석들의 갈등”이 발생한다. 한 영화를 보고 관객들의 반응이 각각 다르듯이, 그리스도교 전통을 해석하는 방법에도 각각 다른 해석학 모델들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관객들의 반응에서 “해석들의 갈등”이 발생할 때, 이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해석학적 대화가 요청된다. 관객들의 갈등의 정도와 대화의 기능에 따라서, “신뢰의 해석학,” “의혹의 해석학,” “회복의 해석학,” “사랑의 해석학”과 같은 네 가지 해석학 모델들은 각각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 이 해석학 모델들은 또한 그리스도교 전통을 해석하는 것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제 III 장에서는 “신뢰의 해석학”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신뢰의 해석학”에서 전통과의 대화는 “이해와 설명의 변증법”을 통하여 진행된다. 한쪽 극단에는 “이해(Verstehen)”를 옹호하는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해석학이 있고 다른 한쪽 극단에는 “설명(Erklären)”을 옹호하는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이 있다. 이 양쪽 극단의 싸움은 이해와 설명의 독특성 때문에 종결되지 않을 것 같지만, 결국 서로 화해에 이르게 된다. 리쾨르가 주장하듯이, “설명의 인식론”은 “이해의 존재론” 안에서 소외의 기호가 아니라 지양되어야 할 변증법의 기호이다. 이해는 설명을 소외의 기호로 간주함으로써 “비판적 반성”의 계기를 상실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설명은 이해를 무시함으로써 “방법주의”나 “과학주의”로 퇴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대화가 진행될 때, “이해”는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어느 한 시점에서 대화가 중단되고 논증이 발생한다. “논증”은 대화를 계속 진행시키기 위해 설명을 요구한다. “설명”은 대화에서 “이해”의 영역을 넘어설 때 “방법주의”나 “과학주의”로 퇴행하기 쉽다. 따라서 “설명”은 항상 “이해”의 넓은 영역 안에 있을 때 가장 잘 기능할 수 있다. “논증”과 “설명”은 대화를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합리적인 대화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이해”와 “설명”은 서로 싸워야할 적이 아니라, 진정한 대화를 위해 서로 경계하면서 협력할 수 있는 동반자이다.
제 IV 장에서는 “언어의 다양성”에 의해 심화되는 “역사의 모호성”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이것은 탈근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기서는 리쾨르의 우회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리쾨르가 우회로를 취한 기호론과 구조주의는 “언어의 다양성”을 심화시키고, 후기 구조주의는 “언어의 다양성”을 수단으로 하여 “역사의 모호성”을 심화시킨다. 근대성의 사고를 대표하는 데카르트, 칸트, 헤겔, 심지어 후설까지도 인식 밖에 있는 실재가 “언어”의 매개 없이 인식 안에 직접적으로 현존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세기로 오면서, 한편으로는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해석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기호론을 포함한 구조주의 및 후기 구조주의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러한 주장에 저항했다. 이들이 공동적으로 공유하는 전략은 “의식”과 “실재”가 언어에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는 언어가 의식과 실재에 더욱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들의 공동의 전략을 “언어학적 전환”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언어학적 전환은 근대의 “실재론”과 “관념론”의 도구적 언어관을 붕괴시켰다. “언어 체계 안에는 오로지 차이들만이 있다”라는 소쉬르 언어학의 모토에서 기호론과 구조주의는 “체계,” 즉 “랑그”를 중요시하고 후기 구조주의는 “차이들,” 즉 “파롤”과 “담론”을 중요시한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해서, 소쉬르의 기호론, 슈클로프스키의 러시아 형식주의, 블라디미르 프로프의 민담 형태론, 레비스트로스의 구조 인류학은 모두 “체계로서의 언어”에 집중함으로써 “언어의 다양성”을 연구 주제로 하는 반면, 롤랑 바르트의 사회 기호론,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미셸 푸코의 미시 물리학은 “담론으로서의 언어”에 집중함으로써 “역사의 모호성”을 연구 주제로 한다. 기호론과 구조주의가 밝혀낸 “언어의 다양성”은 후기 구조주의의 담론 분석에서 연구가설의 토대로 작용하며 “역사의 모호성”을 더욱 심화시킨다.
제 V 장에서는 “철저한 의혹의 해석학”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여기서는 전통과의 대화가 완전히 중단되며 역사에 대한 철저한 의혹이 시작된다. 구조주의와 프로이드의 무의식을 통과하는 “우회로”를 통하여 의혹의 해석학을 단순히 자아비판에만 제한시키는 리쾨르의 “순진한 의혹의 해석학”은 여기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리쾨르는 의혹의 해석학을 더욱 철저하게 밀고 나갔어야 했다. 또한 비판적 대화를 지향하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도 여기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타당성 요구”를 통하여 대화적 합의에 도달하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아우슈비츠와 같은 엄청난 사건이 자아와 세계 사이의 “부조리”를 심화시킬 때,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조리의 상황에서 역사의 모호성에 의해 상처받은 타자들은 결코 하버마스의 타당성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대화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때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프로이드,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카뮈가 리쾨르의 “순진한 의혹”과 하버마스의 “타당성 요구”를 비웃으며 “철저한 의혹의 해석학”을 수행하기 위해 연구 무대로 등장한다. 이들은 리쾨르보다 더욱 “철저한” 의혹의 해석학을 수행한다. 여기서는 리쾨르가 의존하는 헤겔적인 “화해의 변증법”이 철회된다. 여기서는 어떤 대화도 없고 어떤 타협도 없다. 오로지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의 역사에 대한 “의혹”과 그 의혹에서 나오는 슬픔의 상징만이 있다.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문관”은 세계의 부조리를 침묵으로 승인하는 신을 정의의 법정에 세우고 신의 불의를 심문한다. 욥이 욥의 하나님을 심문하듯이, 부조리한 사막의 한가운데서 도스토예프스키, 마르크스, 니체, 카뮈와 같은 의혹의 대가들은 정의의 법정에서 아우슈비츠와 같은 역사의 부조리에 침묵하는 신을 가혹하게 심문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니체와 마르크스가 수행한 철저한 의혹의 해석학 안에 타자들의 타자성을 억압한 흔적이 또 다시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 무시무시한 의혹 안에는 어떤 탈출구도 없는가?
제 VI 장에서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과 몰트만의 십자가의 신학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레비나스와 몰트만은 양자 모두 역사의 지배자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박탈당한 타자들의 타자성을 치유한다. 여기서도 역시 대화는 중단된 상태에 있다. 두 대화자들 중 어느 한쪽이 큰 상처를 입었다. 이 상처가 치유되기 전까지는 어떤 회복도 없으며 어떤 화해도 없다. 레비나스와 몰트만은 대화의 중단 가운에서 “타자의 해석학”을 통하여 상처받은 한쪽의 대화 상대자를 치유하고 회복시킨다. 레비나스는 자아의 만족을 위해 타자성을 희생시키는 모든 서구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거부하고 그 대안으로 “얼굴의 철학”을 제시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데카르트, 칸트, 헤겔, 후설은 모두 “타자성(l'altérité)”을 희생시키고 자아의 만족을 공모하는 주체 철학자들이다. 서구의 역사를 중단시키는 홀로코스트가 발생한 것도 바로 이런 자아중심적인 주체 철학에 그 원인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하이데거는 자아와 타자 사이에 “존재(Sein)”를 상정한 후 존재와의 만남을 위해 타자의 공적영역을 “잡담, 호기심, 애매성”과 같은 비본래적 빠져있음으로 간단히 처리해버린다. 레비나스는 이런 하이데거의 존재 철학도 거부한다. 레비나스가 추구하는 “얼굴의 철학”의 본질은 “외면성(l'extériorité)”이란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 “타자의 얼굴”은 자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 밖에 있으며 자아는 타자를 인식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를 무차별적으로 자아 아래로 포섭시키는 인식론과 타자와 자아 사이에 “존재”를 상정한 후 그 존재의 질서 안에 타자를 포섭시키는 존재론은 무엇이 되었든 폭력이다. 타자의 얼굴은 자아 밖에 있는 “외면성”이며 타자와 자아 사이에는 어떤 접촉점도 없다. 타자는 오직 언어를 통하여서만 자아에게 말을 걸어오며 자아는 여기에 응답할 윤리적 책임이 있다. 이 타자의 얼굴은 타자들의 타자성을 억압하는 자아의 권력에 저항하며 고아와 과부의 무력한 권리를 변호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타자의 얼굴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얼굴을 상기시킨다. 예수의 십자가는 의혹의 역사에 의해 타자성을 강제로 박탈당한 모든 타자들의 상처를 치유한다. 이 치유를 통하여 타자들의 “저항”이 과연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제 VII 장에서는 “사랑의 해석학”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여기서는 리쾨르가 “텍스트 해석학”을 수행하기 위해 연구 무대의 한가운데로 등장한다. 리쾨르의 텍스트 해석학은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기획투사를 통하여 열어 밝혀지는 “가능성의 세계”를 받아들여 “텍스트의 세계”로 변형시킨다. 여기서 성서 텍스트를 통하여 열어 밝혀지는 “가능성의 세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세계이다. 또한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그것을 선포한 예수와 그의 삶을 직접적으로 지시한다. 지배자들과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역사와 전통에 의해 타자성을 박탈당한 타자들의 상처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삶을 내용으로 하는 “사랑의 해석학”에 의해 완전하게 “회복”된다. 포이에르바하,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드, 카뮈와 같은 의혹의 대가들은 예수의 삶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앞에서 더 이상 정의의 이름으로 신의 불의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한다. 사실상 이들이 제기한 소송의 대상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교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을 때 언제든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중요한 논점을 시사해준다. 여기서 모든 소송은 예수가 삶으로 보여준 “사랑의 해석학”에 의해 중단된다. 예수의 사랑의 삶과 그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의혹의 대가들이 제기한 의혹을 침묵시킨다. 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병자들, 하나님 없는 자들, 역사의 희생자들, 어린 아이들과 여인들 등의 잃어버린 역사가 “회복”된다. 예수의 사랑을 통하여 억압자는 억압의 행위를 중단함으로써, 그리고 피억압자는 억압의 상태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양자 모두 해방된다. 따라서 예수의 사랑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에서는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화해”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