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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5世紀 前後 國際情勢와 高句麗 平壤遷都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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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8257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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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이 연구의 목적은 5세기 전후 국제정세를 검토하여 平壤遷都의 배경을 살피는 데 있다. 高句麗는 故國原王의 평양지역 진출 이후에 이 지역을 직접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百濟가 漢山으로 移都를 단행하고, 近肖古王 이후 北進 의지를 드러내어 양국은 지속적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양국의 대결은 도성방어체제 및 평양지역의 확보를 위한 측면에서 불가피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한 확고한 영역화를 이루는 한 방안으로 천도를 고려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중국 華北지역의 정세와 맞물려, 廣開土王代에 천도가 결정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중국 화북지역의 정세변화는 특히 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前秦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고구려는 肥水戰鬪 이후 後燕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후연은 395년 參合陂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龍城으로 퇴각하였고, 그 세력권 또한 遼西ㆍ遼東 일대로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양국은 요동에서의 세력권 확보를 위해 대결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후연에게 주요 軍鎭을 함락당하는 사건을 경험함으로써, 國內城 수도방위체계의 취약성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396년에 이미 40만이라는 대단위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던 역량을 가졌으며, 후연의 수도 中山을 함락시켰던 北魏의 위협에도 대응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이러한 북위의 위협은 북연의 등장 이후 더 강해졌다. 후연의 잔존세력으로 이루어진 북연은 이미 성립 초기부터 멸망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북위는 423년 무렵 護東夷校尉府를 요서에 진수시킴으로써, 東夷監護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표출하였다. 따라서 고구려로서는 이러한 북위의 동방정책에 대응하면서, 지속적인 국가발전을 도모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장수왕은 북연이 존재하여 일종의 완충지대로 기능했으며, 북위가 화북통일을 완수하기 이전인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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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구의 목적은 5세기 전후 국제정세를 검토하여 平壤遷都의 배경을 살피는 데 있다. 高句麗는 故國原王의 평양지역 진출 이후에 이 지역을 직접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百濟가 漢山...

    이 연구의 목적은 5세기 전후 국제정세를 검토하여 平壤遷都의 배경을 살피는 데 있다. 高句麗는 故國原王의 평양지역 진출 이후에 이 지역을 직접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百濟가 漢山으로 移都를 단행하고, 近肖古王 이후 北進 의지를 드러내어 양국은 지속적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양국의 대결은 도성방어체제 및 평양지역의 확보를 위한 측면에서 불가피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한 확고한 영역화를 이루는 한 방안으로 천도를 고려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중국 華北지역의 정세와 맞물려, 廣開土王代에 천도가 결정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중국 화북지역의 정세변화는 특히 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前秦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고구려는 肥水戰鬪 이후 後燕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후연은 395년 參合陂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龍城으로 퇴각하였고, 그 세력권 또한 遼西ㆍ遼東 일대로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양국은 요동에서의 세력권 확보를 위해 대결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후연에게 주요 軍鎭을 함락당하는 사건을 경험함으로써, 國內城 수도방위체계의 취약성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396년에 이미 40만이라는 대단위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던 역량을 가졌으며, 후연의 수도 中山을 함락시켰던 北魏의 위협에도 대응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이러한 북위의 위협은 북연의 등장 이후 더 강해졌다. 후연의 잔존세력으로 이루어진 북연은 이미 성립 초기부터 멸망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북위는 423년 무렵 護東夷校尉府를 요서에 진수시킴으로써, 東夷監護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표출하였다. 따라서 고구려로서는 이러한 북위의 동방정책에 대응하면서, 지속적인 국가발전을 도모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장수왕은 북연이 존재하여 일종의 완충지대로 기능했으며, 북위가 화북통일을 완수하기 이전인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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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view the international landscape of around the 5th century in order to study the transfer of capital to Pyongyang(平壤) by Koguryo(高句麗). Koguryo set out to rule Pyongyang in a direct manner since King-Gogukwoen(故國原王) had occupied the district. However, as Baekje(百濟) transferred its capital to Hansan(漢山) and King-Geunchogo(近肖古王) showed its will to expand his nation's sphere of influence toward northern area of Han River, Koguryo and Baekje had no choice but to confront each other continuously. The two nations' rivalry was inevitable in terms of fortifying their capital defense systems and occupying Pyongyang district. Therefore, in order to guarantee the security of its rule to Pyonyang, Koguryo decided to transfer its capital during the period of King-Gwanggaeto(廣開土王)'s reign, and this was fueled by political landscape in Huab?i(華北), China.
    The change in political situation in Huab?i around A.D. 400 had significant effects on the transfer of capital. Koguryo had a friendly relationship with Qianqin(前秦), but its border contacted with that of Houy?n(後燕) after Feishu?-battle(肥水戰鬪). Houy?n suffered an overwhelming defeat in C?nhepi-battle(參合陂戰鬪) in 395, and so it withdrew to Longcheng(龍城) having its sphere of influence shrunk around west and east areas of Liaohe(遼河). As a result, Koguryo and Houy?n became in rivalry to secure their sphere of influence in Liaod?ng. The former suffered the loss of major military bases by the latter, and it yet again recognized its vulnerability of capital defense system. In addition, Koguryo had to have a deterrent to the threat from B?iwei(北魏), which had already been able to mobilize a 400,000-strong troop and conquerred Zh?ngsh?n(中山), the capital of Houy?n.
    Since the emergence of B?iy?n(北燕), the threat from B?iwei became stronger as the collapse of B?iy?n, which was established by the remaining groups of Houy?n, was predictable since its beginning. In 423, B?iwei launched an military outpost in Liaox?(遼西) to show its active will to check up its eastern neighboring nations. Therefore, Koguryo thought that it should react to the eastward expansion policy by B?iwei and push for a persistent national development. As a result, in 427, when B?iy?n served as a buffer state before the reunification of Huab?i by B?iwei, King - Changsu(長壽王) transferred the capital to Pyong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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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view the international landscape of around the 5th century in order to study the transfer of capital to Pyongyang(平壤) by Koguryo(高句麗). Koguryo set out to rule Pyongyang in a direct manner since King-Gogukwoen...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view the international landscape of around the 5th century in order to study the transfer of capital to Pyongyang(平壤) by Koguryo(高句麗). Koguryo set out to rule Pyongyang in a direct manner since King-Gogukwoen(故國原王) had occupied the district. However, as Baekje(百濟) transferred its capital to Hansan(漢山) and King-Geunchogo(近肖古王) showed its will to expand his nation's sphere of influence toward northern area of Han River, Koguryo and Baekje had no choice but to confront each other continuously. The two nations' rivalry was inevitable in terms of fortifying their capital defense systems and occupying Pyongyang district. Therefore, in order to guarantee the security of its rule to Pyonyang, Koguryo decided to transfer its capital during the period of King-Gwanggaeto(廣開土王)'s reign, and this was fueled by political landscape in Huab?i(華北), China.
    The change in political situation in Huab?i around A.D. 400 had significant effects on the transfer of capital. Koguryo had a friendly relationship with Qianqin(前秦), but its border contacted with that of Houy?n(後燕) after Feishu?-battle(肥水戰鬪). Houy?n suffered an overwhelming defeat in C?nhepi-battle(參合陂戰鬪) in 395, and so it withdrew to Longcheng(龍城) having its sphere of influence shrunk around west and east areas of Liaohe(遼河). As a result, Koguryo and Houy?n became in rivalry to secure their sphere of influence in Liaod?ng. The former suffered the loss of major military bases by the latter, and it yet again recognized its vulnerability of capital defense system. In addition, Koguryo had to have a deterrent to the threat from B?iwei(北魏), which had already been able to mobilize a 400,000-strong troop and conquerred Zh?ngsh?n(中山), the capital of Houy?n.
    Since the emergence of B?iy?n(北燕), the threat from B?iwei became stronger as the collapse of B?iy?n, which was established by the remaining groups of Houy?n, was predictable since its beginning. In 423, B?iwei launched an military outpost in Liaox?(遼西) to show its active will to check up its eastern neighboring nations. Therefore, Koguryo thought that it should react to the eastward expansion policy by B?iwei and push for a persistent national development. As a result, in 427, when B?iy?n served as a buffer state before the reunification of Huab?i by B?iwei, King - Changsu(長壽王) transferred the capital to Pyong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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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平壤지역 영역화와 對百濟관계
    • Ⅲ. 對中國관계의 전개와 平壤遷都의 단행
    • Ⅳ. 맺음말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平壤지역 영역화와 對百濟관계
    • Ⅲ. 對中國관계의 전개와 平壤遷都의 단행
    • Ⅳ.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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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권오중, "遼東郡 中部都尉와 高句麗의 新城, in 고구려의 국제관계" 고구려연구재단 2005

    2 權五重, "樂浪郡硏究-中國 古代邊郡에 대한 事例的 檢討" 一潮閣 1992

    3 송기호, "발해의 천도와 그 배경" 한국고대사학회 36 : 113-138, 2004

    4 윤용구, "고대중국의 동이관(東夷觀)과 고구려 -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중심으로" 한국역사연구회 (55) : 61-100, 2005

    5 이종욱, "고구려의 역사" 김영사 2005

    6 박진숙, "고구려의 국제관계" 고구려연구재단 2005

    7 張傚晶, "고구려왕의 平壤移居와 왕권강화, in 龜泉元裕漢敎授定年條紀念論叢" 15 : 2000

    8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9 盧泰敦,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10 손영종, "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7

    1 권오중, "遼東郡 中部都尉와 高句麗의 新城, in 고구려의 국제관계" 고구려연구재단 2005

    2 權五重, "樂浪郡硏究-中國 古代邊郡에 대한 事例的 檢討" 一潮閣 1992

    3 송기호, "발해의 천도와 그 배경" 한국고대사학회 36 : 113-138, 2004

    4 윤용구, "고대중국의 동이관(東夷觀)과 고구려 -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중심으로" 한국역사연구회 (55) : 61-100, 2005

    5 이종욱, "고구려의 역사" 김영사 2005

    6 박진숙, "고구려의 국제관계" 고구려연구재단 2005

    7 張傚晶, "고구려왕의 平壤移居와 왕권강화, in 龜泉元裕漢敎授定年條紀念論叢" 15 : 2000

    8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9 盧泰敦,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10 손영종, "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7

    11 임기환, "고구려 평양 도성의 정치적 성격" 한국사연구회 (137) : 1-32, 2007

    12 林起煥,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2004

    13 이성제, "고구려 장수왕의 대북위교섭과 그 정치적 의미 -북연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대북위관계의 전개" 역사학회 (181) : 1-35, 2004

    14 李周鉉, "魏晋南北朝의 東夷校尉 한중관계 2000년-于湖 全海宗 先生 九旬紀念韓中關係史 論叢" 2008

    15 孔錫龜, "高句麗領城擴張史硏究" 서경문화사 1998

    16 李成制, "高句麗의 西方政策 硏究-北朝와의 對立과 共存의 관계를 중심으로" 국학자료원 2005

    17 李成制, "高句麗의 西方政策 硏究-北朝와의 對立과 共存의 관계를 중심으로" 국학자료원 2005

    18 文銀順, "高句麗의 平壤遷都 硏究" 韓國學中央硏究院 2007

    19 申東河, "高句麗의 寺院 造成과 그 意味" 19 : 1988

    20 黃甲元, "高句麗長壽王高璉傳略" 1996 (1996): 1996

    21 濱田耕策, "高句麗長壽王という時代-父王廣開土王の治積を繼いで" 199 : 2005

    22 朴性鳳, "高句麗發展의 方向性 問題, in 東國大學校開校80周年條紀念論叢" 동국대학교 1981

    23 余昊奎, "高句麗城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24 余昊奎, "高句麗城I-鴨綠江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25 武田幸男, "高句麗史と東アジア-「廣開土王碑」硏究序說" 岩波書店 1989

    26 田中俊明, "高句麗の平壤遷都" 190 : 2004

    27 三崎良章, "高句麗の對北魏外交, in 早稻田大學大學院硏究紀要 別冊9" 1982

    28 徐永大, "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王權 및 中央集權的 支配體制의 强化過程과 關聯하여" 2 : 1981

    29 閔德植, "高句麗 平壤城의 築城過程에 대한 硏究" 39 : 1992

    30 김병남, "高句麗 平壤 遷都의 原因에 대하여" 19 : 1997

    31 琴京淑, "高句麗 國內城 遷都의 歷史的 意味" 15 : 2003

    32 여호규, "高句麗 國內 遷都의 시기와 배경" 한국고대사학회 (38) : 37-84, 2005

    33 朴性鳳, "高句麗 南進經營史의 硏究" 백산자료원 1995

    34 朴性鳳, "韓國史上 南進·北進의 性格問題-高句麗의 南進發展史序說" 9 : 1979

    35 韓國古代社會硏究會, "韓國古代金石文" 財團法人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36 尹明喆, "長壽王의 南進政策과 東亞地中海의 力學關係, in 高句麗 南進經營史의 硏究" 백산자료원 1995

    37 余昊奎, "百濟의 遼西進出說 再檢討-4세기 후반 扶餘系 人物의 동향과 관련하여" 91 : 2001

    38 李道學, "百濟 漢城時期의 都城制에 관한 검토" 9 : 1992

    39 金起燮, "百濟 漢城時代 統治體制 硏究-近肖古王代를 중심으로"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1997

    40 金起燮, "百濟 前期의 漢城에 대한 再檢討" 55 : 1995

    41 姜仁求, "百濟 初期 都城 問題 新考" 81 : 1993

    42 朴性鳳, "發展期 高句麗의 南進過程-특히 西安平 樂浪攻取의 南進的 性格을 내세우며-, in 美原趙永植博士華甲紀念論文集" 미원조영식박사화갑기념 논문집편찬위원회 1981

    43 여호규, "漢城時期 百濟의 都城制와 防禦體系" 백제연구소 36 : 1-23, 2002

    44 趙法鍾, "廣開土王陵碑文에 나타난 守墓制硏究-守墓人의 編制와 性格을 중심으로" 8 : 1995

    45 江畑武, "古代の日本と朝鮮" 學生社 1974

    46 三崎良章, "北魏の對外政策と高句麗" 102 : 1982

    47 池培善, "北燕에 대하여(Ⅲ)-溤弘 재위시와 對高句麗관계를 중심으로" 32 : 1990

    48 朴漢濟, "中國中世胡漢體制硏究" 一潮閣 1988

    49 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 11 : 1981

    50 "三國史記 三國遺事 晋書 魏書 宋書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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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7-07 학회명변경 영문명 : The Korean Ancient Historical Association -> The Society for Ancient Korean History KCI등재
    2008-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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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69 1.69 1.8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64 1.57 3.463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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