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의 목적은 5세기 전후 국제정세를 검토하여 平壤遷都의 배경을 살피는 데 있다. 高句麗는 故國原王의 평양지역 진출 이후에 이 지역을 직접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百濟가 漢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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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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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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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5세기 전후 국제정세를 검토하여 平壤遷都의 배경을 살피는 데 있다. 高句麗는 故國原王의 평양지역 진출 이후에 이 지역을 직접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百濟가 漢山으로 移都를 단행하고, 近肖古王 이후 北進 의지를 드러내어 양국은 지속적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양국의 대결은 도성방어체제 및 평양지역의 확보를 위한 측면에서 불가피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한 확고한 영역화를 이루는 한 방안으로 천도를 고려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중국 華北지역의 정세와 맞물려, 廣開土王代에 천도가 결정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중국 화북지역의 정세변화는 특히 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前秦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고구려는 肥水戰鬪 이후 後燕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후연은 395년 參合陂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龍城으로 퇴각하였고, 그 세력권 또한 遼西ㆍ遼東 일대로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양국은 요동에서의 세력권 확보를 위해 대결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후연에게 주요 軍鎭을 함락당하는 사건을 경험함으로써, 國內城 수도방위체계의 취약성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396년에 이미 40만이라는 대단위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던 역량을 가졌으며, 후연의 수도 中山을 함락시켰던 北魏의 위협에도 대응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이러한 북위의 위협은 북연의 등장 이후 더 강해졌다. 후연의 잔존세력으로 이루어진 북연은 이미 성립 초기부터 멸망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북위는 423년 무렵 護東夷校尉府를 요서에 진수시킴으로써, 東夷監護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표출하였다. 따라서 고구려로서는 이러한 북위의 동방정책에 대응하면서, 지속적인 국가발전을 도모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장수왕은 북연이 존재하여 일종의 완충지대로 기능했으며, 북위가 화북통일을 완수하기 이전인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view the international landscape of around the 5th century in order to study the transfer of capital to Pyongyang(平壤) by Koguryo(高句麗). Koguryo set out to rule Pyongyang in a direct manner since King-Gogukwoen...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view the international landscape of around the 5th century in order to study the transfer of capital to Pyongyang(平壤) by Koguryo(高句麗). Koguryo set out to rule Pyongyang in a direct manner since King-Gogukwoen(故國原王) had occupied the district. However, as Baekje(百濟) transferred its capital to Hansan(漢山) and King-Geunchogo(近肖古王) showed its will to expand his nation's sphere of influence toward northern area of Han River, Koguryo and Baekje had no choice but to confront each other continuously. The two nations' rivalry was inevitable in terms of fortifying their capital defense systems and occupying Pyongyang district. Therefore, in order to guarantee the security of its rule to Pyonyang, Koguryo decided to transfer its capital during the period of King-Gwanggaeto(廣開土王)'s reign, and this was fueled by political landscape in Huab?i(華北), China.
The change in political situation in Huab?i around A.D. 400 had significant effects on the transfer of capital. Koguryo had a friendly relationship with Qianqin(前秦), but its border contacted with that of Houy?n(後燕) after Feishu?-battle(肥水戰鬪). Houy?n suffered an overwhelming defeat in C?nhepi-battle(參合陂戰鬪) in 395, and so it withdrew to Longcheng(龍城) having its sphere of influence shrunk around west and east areas of Liaohe(遼河). As a result, Koguryo and Houy?n became in rivalry to secure their sphere of influence in Liaod?ng. The former suffered the loss of major military bases by the latter, and it yet again recognized its vulnerability of capital defense system. In addition, Koguryo had to have a deterrent to the threat from B?iwei(北魏), which had already been able to mobilize a 400,000-strong troop and conquerred Zh?ngsh?n(中山), the capital of Houy?n.
Since the emergence of B?iy?n(北燕), the threat from B?iwei became stronger as the collapse of B?iy?n, which was established by the remaining groups of Houy?n, was predictable since its beginning. In 423, B?iwei launched an military outpost in Liaox?(遼西) to show its active will to check up its eastern neighboring nations. Therefore, Koguryo thought that it should react to the eastward expansion policy by B?iwei and push for a persistent national development. As a result, in 427, when B?iy?n served as a buffer state before the reunification of Huab?i by B?iwei, King - Changsu(長壽王) transferred the capital to Pyongyang.
목차 (Table of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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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 2008-07-07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The Korean Ancient Historical Association -> The Society for Ancient Korean History | ![]() |
| 2008-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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