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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평양 천도 기획 시점과 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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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학계에서는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창건하고 백제의 침략을 방비하여 6개성을 신축했던 광개토왕의 재위 초반 행적을 평양 천도의 예비 작업으로서 이해한다. 그리고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왕이 평양 천도를 실행하고 이를 기반으로 남진 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광개토왕은 재위 후기에 이르러서 국내성을 증수하고, 관심을 국동으로 옮겨 7개성을 신축한 후 평양민을 이주시켜 동부여를 정복했다. 이를 보면 광개토왕대부터 평양 천도를 계획했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 광개토왕은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실현하기 위해 위무사해를 도모하며,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왜 등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일시 평양을 중시하였을 뿐, 후반기에는 오히려 요동과 국동 지역에 국정 운영의 비중을 두었다.
    결국 평양 천도가 광개토왕대부터 준비되었다고 하는 통설을 재고해야 한다면 새로운 천도의 기획 시점을 확보해야한다. 이에 필자는 서상 기사 3건이 연속 기록된 장수왕 2년(414)을 천도의 기획 시점으로 보고자 한다. 『삼국사기』의 서상기사는 해당 시기의 정치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왕경에는 2건의 구징(이조 군집, 오척 대설)이 있었던 반면, 새로운 천도지가 될 평양 일대(사천지원)에는 흰노루가 포획되는 서상이 있었다. 더구나 흰노루의 포획자는 장수왕이었다. 왕경에는 구징이 거듭 나타나는 와중에 장수왕이 평양 일대에서 흰노루를 포획했다는 것은 왕이 천도를 주도했고, 이를 천도의 계기로 삼겠다는 왕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백제 온조왕이 왕도에서 연이은 3건의 구징을 계기로 이듬해 천도를 단행한 양상과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남진 정책의 실행이나 북위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천도 이후 48년이 지난 이후에야 본격적인 남진이 이루어진 점과 천도 당시 북위는 소국에 불과했던 점에서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러한 외적 요인보다는 광개토왕대 영토 확장이 있었고, 뒤를 이은 장수왕대 영속적인 지배력의 확보와 정치적 안정이라는 내적인 요인으로 천도가 비롯되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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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계에서는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창건하고 백제의 침략을 방비하여 6개성을 신축했던 광개토왕의 재위 초반 행적을 평양 천도의 예비 작업으로서 이해한다. 그리고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왕...

    학계에서는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창건하고 백제의 침략을 방비하여 6개성을 신축했던 광개토왕의 재위 초반 행적을 평양 천도의 예비 작업으로서 이해한다. 그리고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왕이 평양 천도를 실행하고 이를 기반으로 남진 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광개토왕은 재위 후기에 이르러서 국내성을 증수하고, 관심을 국동으로 옮겨 7개성을 신축한 후 평양민을 이주시켜 동부여를 정복했다. 이를 보면 광개토왕대부터 평양 천도를 계획했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 광개토왕은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실현하기 위해 위무사해를 도모하며,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왜 등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일시 평양을 중시하였을 뿐, 후반기에는 오히려 요동과 국동 지역에 국정 운영의 비중을 두었다.
    결국 평양 천도가 광개토왕대부터 준비되었다고 하는 통설을 재고해야 한다면 새로운 천도의 기획 시점을 확보해야한다. 이에 필자는 서상 기사 3건이 연속 기록된 장수왕 2년(414)을 천도의 기획 시점으로 보고자 한다. 『삼국사기』의 서상기사는 해당 시기의 정치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왕경에는 2건의 구징(이조 군집, 오척 대설)이 있었던 반면, 새로운 천도지가 될 평양 일대(사천지원)에는 흰노루가 포획되는 서상이 있었다. 더구나 흰노루의 포획자는 장수왕이었다. 왕경에는 구징이 거듭 나타나는 와중에 장수왕이 평양 일대에서 흰노루를 포획했다는 것은 왕이 천도를 주도했고, 이를 천도의 계기로 삼겠다는 왕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백제 온조왕이 왕도에서 연이은 3건의 구징을 계기로 이듬해 천도를 단행한 양상과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남진 정책의 실행이나 북위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천도 이후 48년이 지난 이후에야 본격적인 남진이 이루어진 점과 천도 당시 북위는 소국에 불과했던 점에서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러한 외적 요인보다는 광개토왕대 영토 확장이 있었고, 뒤를 이은 장수왕대 영속적인 지배력의 확보와 정치적 안정이라는 내적인 요인으로 천도가 비롯되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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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廣開土王의 威武四海와 平壤
    • Ⅲ. 長壽王의 平壤遷都에 따른 南進
    • Ⅳ. 맺음말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廣開土王의 威武四海와 平壤
    • Ⅲ. 長壽王의 平壤遷都에 따른 南進
    • Ⅳ.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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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津田左右吉, 11 : 1964

    2 손영종, "제5장 겨레와 강토를 통일하기 위한 고구려의 투쟁, In 고구려사 1" 고구려사 1990

    3 장창은, "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신서원 2008

    4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09

    5 김기섭, "부여족의 분산과 이동, In 부여사와 그 주변" 동북아역사재단 2008

    6 이성제,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사에서 보이는 몇 가지 쟁점, In 부여사와 그 주변" 동북아 역사재단 기획연구 2008

    7 박시형,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8 김덕성, "고구려의 평양천도와 그 력사적 의의, In 북한의 최근 고구려사 연구1" 고구려 연구재단 2004

    9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10 채희국, "고구려력사연구-고구려 건국과 삼국통일을 위한 투장, 성곽" 1985

    1 津田左右吉, 11 : 1964

    2 손영종, "제5장 겨레와 강토를 통일하기 위한 고구려의 투쟁, In 고구려사 1" 고구려사 1990

    3 장창은, "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신서원 2008

    4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09

    5 김기섭, "부여족의 분산과 이동, In 부여사와 그 주변" 동북아역사재단 2008

    6 이성제,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사에서 보이는 몇 가지 쟁점, In 부여사와 그 주변" 동북아 역사재단 기획연구 2008

    7 박시형,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8 김덕성, "고구려의 평양천도와 그 력사적 의의, In 북한의 최근 고구려사 연구1" 고구려 연구재단 2004

    9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10 채희국, "고구려력사연구-고구려 건국과 삼국통일을 위한 투장, 성곽" 1985

    11 임기환, "고구려 평양 도성의 정치적 성격" 한국사연구회 (137) : 1-3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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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이성제, "高句麗의 西方政策硏究-北朝와의 對立과 共存의 관계를 중심으로-"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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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 1 : 1966

    17 김미경, "高句麗의 浪∙帶方地域進出과 그 支配形態" 17 : 1996

    18 공석구, "高句麗에 流入된 中國系人物의 動向" 고구려발해학회 18 (18): 469-49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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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道學,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전쟁 기사의 분석, In 廣開土好太王碑硏究100年" 학연문화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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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21-07-02 학회명변경 영문명 : Institute of KoguryoBalhae -> Association of Koguryo Balhae KCI등재
    2019-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2-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8-02-14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고구려연구 -> 고구려발해연구
    외국어명 : The Koguryo Yonku -> The KoguryoBalhae Yon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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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2-13 학회명변경 한글명 : 고구려연구회 -> 고구려발해학회
    영문명 : Institute of Koguryo Studies -> Institute of KoguryoBal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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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6-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5-05-30 학회명변경 영문명 : 미등록 -> Institute of Koguryo Studies KCI등재후보
    2005-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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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8 0.78 0.93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 0.93 2.013 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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