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측의 신분에 대해선 왕손설과 사족[6두품]설로 크게 나뉘지만, 낭혜화상의 예를 들어, 왕손설이 나온 배경을 추론하였다. 원측이 예전에 왕손이었으나 후에 6두품으로 편제된 모량부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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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Korean
원측 ; 왕손 ; 사족 ; 육두품 ; 경흥 ; 박씨 ; 모량부 ; 낭혜화상 ; Woncheug[圓測] ; royal family[王孫] ; sajog[士族] ; yukdupum[六頭品] ; Gyunghyung[璟興] ; Park[朴氏] ; Moryangbu[牟梁部] ; Nanghyewhasang[朗慧和尙]
KCI등재
학술저널
357-388(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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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원측의 신분에 대해선 왕손설과 사족[6두품]설로 크게 나뉘지만, 낭혜화상의 예를 들어, 왕손설이 나온 배경을 추론하였다. 원측이 예전에 왕손이었으나 후에 6두품으로 편제된 모량부 박씨...
원측의 신분에 대해선 왕손설과 사족[6두품]설로 크게 나뉘지만, 낭혜화상의 예를 들어, 왕손설이 나온 배경을 추론하였다. 원측이 예전에 왕손이었으나 후에 6두품으로 편제된 모량부 박씨의 후손일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왕손설과 사족설을 모두 받아들였다. 원측의 3세 출가와 15세의 유학은 단석산신선사의 미륵신앙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모량부 박씨의 불교적 분위기와 원측의 구법의지가 반영되었다.
신문왕대 원측의 귀국요청이 있었지만 귀국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그의 출신 부인 모량부의 탄압뿐만 아니라 그의 일체성불설과 반대입장에 있었던 오성각별설의 백제 출신의 승려 경흥의 반대를 상정해 보았다. 원측에게 승직을 주지 않았다는 기록은 그의 제자인 도증의 와전이었다. 경흥은 원측과 달리 현장-규기로 이어지는 유식계열이었고 신라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오성각별설을 주장하고 있었다. 경흥은 자기와 반대 입장에 있었던 원측의 귀국을 바라지 않았으며, 뒤에 원측의 제자인 도증이 귀국했을 때도 모량리 익선아간의 사건을 빌미로 도증에게 승직을 제수하지 말것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다. 경흥은 도증 이후 편찬된 『무량수경연의술문찬』에서 규기의 저술을 34회나 인용하였지만 원측의 저술은 한 번도 인용하지 않았다. 경흥은 자신과 반대 입장에 있던 원측의 저술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Discussing abut the social rank of Woncheug(612~695), some said that he came from royal family[王孫] and others said he came from sajog[士族, yukdupum六頭品]. According to Nanghyewhasangbi[朗慧和尙碑], Nanghyewhsang's ancestors had been a ...
Discussing abut the social rank of Woncheug(612~695), some said that he came from royal family[王孫] and others said he came from sajog[士族, yukdupum六頭品]. According to Nanghyewhasangbi[朗慧和尙碑], Nanghyewhsang's ancestors had been a jingol[眞骨] at one time but he was demoted from jingol to yukdupum. Terefore, Woncheug's ancestors were originally from the royal lineage but Woncheug's family became sajog rank later on. His family name was Park. He belonged to Moryangbu[牟梁部]. Owing to Moryangbu's Buddhistic tradition and his will he entered the Buddhist priesthood and went to abroad for study in China.
Although King Sinmun(r. 681~692) and King Hyoso(r. 692~702) wanted him to come back, Woncheug didn't return home. In fact he attained an advanced age. Also Monk Gyunghyung[璟興] objeted him. Both monks were on the opposite side. Woncheug insisted that all people could attained Buddhahood but Gyunghyung insisted that all could not.
목차 (Table of Contents)
1990년대 이후 고구려 문자자료의 출토현황과 연구동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