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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자료를 통해 본 웅진도읍기 한강유역 영유설 재고 = Investigating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e Han River region in the Ungjin Baekje period through the archaeological mate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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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4886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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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A positive assessment of literary records which mention Hanseong from the period of King Dongsung onwards has led to the theory that the Han River region was retained by the Baekje state into the Ungjin period. This represents a break from the previous views which approached these records with more caution. Due to sparse nature of the literary evidence, there exists much debate regarding the interpretation of events from the Ungjin Baekje period.
    This article aims to critically re‐evaluate the 'Han River region retainment theory' using archaeological material from the Mongchon Earthen Wall Fortress and the fortress sites of Mt. Acha. Analysis reveals that there is no archaeological basis for this theory. It is argued that the Han River region was controlled by Goguryeo from 475 AD, when it captured Hanseong, until 551 AD, when the region was reclaimed by Baekje forces.
    Following the successful capture of Hanseong, as represented by Mongcheon Earthen Wall Fortress, the Goguryo army continued its campaign of southern territorial expansion, with the aim of consolidating power in the wider Han River region. The intensification of Baekje attempts to recapture Hanseong, however, led the Goguryeo forces stationed in Mongcheon Earthen Wall Fortress and other areas south of the Han River to retreat north at around 500 AD. The result of this was the construction of fortifications along Mt. Acha and other areas north of the river. This area, centred around the banks of the Jungyang, may have represented 'South Pyeongyang'.
    The interpretation presented in the current research has been based on the well established chronology of artefacts and 'Gyeongja' (520 AD) inscribed pottery recently discovered at Hongryeonbong Fortress No. 2. The need to further develop this chronology in order to obtain a higher resolution of dating is also acknowledged.
    번역하기

    A positive assessment of literary records which mention Hanseong from the period of King Dongsung onwards has led to the theory that the Han River region was retained by the Baekje state into the Ungjin period. This represents a break from the previou...

    A positive assessment of literary records which mention Hanseong from the period of King Dongsung onwards has led to the theory that the Han River region was retained by the Baekje state into the Ungjin period. This represents a break from the previous views which approached these records with more caution. Due to sparse nature of the literary evidence, there exists much debate regarding the interpretation of events from the Ungjin Baekje period.
    This article aims to critically re‐evaluate the 'Han River region retainment theory' using archaeological material from the Mongchon Earthen Wall Fortress and the fortress sites of Mt. Acha. Analysis reveals that there is no archaeological basis for this theory. It is argued that the Han River region was controlled by Goguryeo from 475 AD, when it captured Hanseong, until 551 AD, when the region was reclaimed by Baekje forces.
    Following the successful capture of Hanseong, as represented by Mongcheon Earthen Wall Fortress, the Goguryo army continued its campaign of southern territorial expansion, with the aim of consolidating power in the wider Han River region. The intensification of Baekje attempts to recapture Hanseong, however, led the Goguryeo forces stationed in Mongcheon Earthen Wall Fortress and other areas south of the Han River to retreat north at around 500 AD. The result of this was the construction of fortifications along Mt. Acha and other areas north of the river. This area, centred around the banks of the Jungyang, may have represented 'South Pyeongyang'.
    The interpretation presented in the current research has been based on the well established chronology of artefacts and 'Gyeongja' (520 AD) inscribed pottery recently discovered at Hongryeonbong Fortress No. 2. The need to further develop this chronology in order to obtain a higher resolution of dating is also acknowled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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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웅진도읍기에 백제가 한강유역을 지배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부정론과 지명이동설 등이 중론이었으나 최근에는 동성왕대 이후 한성 관련 기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웅진기 백제의 한강유역 영유설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영유설에는 관련된 문헌사료의 영성함에 기인한 크고 작은 논점의 차이가 상존해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의적인 해석이 불가피한 면이 있다.
    이 글에서는 한강유역의 고고자료, 특히 몽촌토성과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에 대한 최근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영유설의 입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그 결과 영유설을 지지할만한 근거가 없음을 확인하였으며, 비록 시간에 따른 변화가 있기는 하였지만 475년 고구려의 한성함락 이후부터 551년 백제의 한성수복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한강 하류유역은 고구려에 의해 영유되었음을 추론하였다.
    한성 공함 직후 고구려는 한성으로 비정되는 몽촌토성을 거점으로 하여 남진을 계속하였으며, 한강유역에 대한 영역화를 시도하였다. 이후 백제의 한강유역 수복 노력이 강화되면서 500년을 전후 한 시점에 몽촌토성을 비롯한 한강 이남의 고구려 군은 한강 이북으로 철수하여 한강 북안과 아차산 일원에 방어용 보루를 구축하였다. 이때 한강북안의 거점은 중랑천 변으로 추정되며, 일대가 남평양(또는 한성)으로 비정될 수 있음도 추론해 보았다.
    이러한 추론은 최근 홍련봉 2보루에서 출토된 경자(520년)명 토기와 유물에 대한 편년관 등 비교적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고고자료의 편년이 아무리 정치하다고 하여도 수년간을 단위로 하는 상황을 해석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며, 이러한 점은 향후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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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진도읍기에 백제가 한강유역을 지배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부정론과 지명이동설 등이 중론이었으나 최근에는 동성왕대 이후 한성 관련 기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

    웅진도읍기에 백제가 한강유역을 지배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부정론과 지명이동설 등이 중론이었으나 최근에는 동성왕대 이후 한성 관련 기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웅진기 백제의 한강유역 영유설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영유설에는 관련된 문헌사료의 영성함에 기인한 크고 작은 논점의 차이가 상존해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의적인 해석이 불가피한 면이 있다.
    이 글에서는 한강유역의 고고자료, 특히 몽촌토성과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에 대한 최근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영유설의 입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그 결과 영유설을 지지할만한 근거가 없음을 확인하였으며, 비록 시간에 따른 변화가 있기는 하였지만 475년 고구려의 한성함락 이후부터 551년 백제의 한성수복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한강 하류유역은 고구려에 의해 영유되었음을 추론하였다.
    한성 공함 직후 고구려는 한성으로 비정되는 몽촌토성을 거점으로 하여 남진을 계속하였으며, 한강유역에 대한 영역화를 시도하였다. 이후 백제의 한강유역 수복 노력이 강화되면서 500년을 전후 한 시점에 몽촌토성을 비롯한 한강 이남의 고구려 군은 한강 이북으로 철수하여 한강 북안과 아차산 일원에 방어용 보루를 구축하였다. 이때 한강북안의 거점은 중랑천 변으로 추정되며, 일대가 남평양(또는 한성)으로 비정될 수 있음도 추론해 보았다.
    이러한 추론은 최근 홍련봉 2보루에서 출토된 경자(520년)명 토기와 유물에 대한 편년관 등 비교적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고고자료의 편년이 아무리 정치하다고 하여도 수년간을 단위로 하는 상황을 해석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며, 이러한 점은 향후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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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구의동보고서간행위원회, "한강유역의 고구려 요새" 도서출판 소화 1997

    2 임효재, "축조연대에 대하여" 靑溪史學 16 : 2002

    3 김영심, "웅진·사비시기 百濟의 領域 in : 古代 東亞細亞와 百濟" 서경문화사 2003

    4 서울대학교박물관, "용마산 2보루 발굴조사 약보고"

    5 강진갑, "아차산의 역사와 문화유산" 구리시, 구리문화원 1994

    6 임효재, "아차산성 -시굴조사 보고서-" 서울大學校博物館 2000

    7 임효재, "아차산 제4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서울대학교박물관 2000

    8 임효재, "아차산 시루봉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서울대학교박물관 2002

    9 최종택, "아차산 고구려 보루의 역사적 성격" 서울시사편찬위원회 64 : 87-128, 2004

    10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 "아차산 4보루 성벽발굴조사"

    1 구의동보고서간행위원회, "한강유역의 고구려 요새" 도서출판 소화 1997

    2 임효재, "축조연대에 대하여" 靑溪史學 16 : 2002

    3 김영심, "웅진·사비시기 百濟의 領域 in : 古代 東亞細亞와 百濟" 서경문화사 2003

    4 서울대학교박물관, "용마산 2보루 발굴조사 약보고"

    5 강진갑, "아차산의 역사와 문화유산" 구리시, 구리문화원 1994

    6 임효재, "아차산성 -시굴조사 보고서-" 서울大學校博物館 2000

    7 임효재, "아차산 제4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서울대학교박물관 2000

    8 임효재, "아차산 시루봉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서울대학교박물관 2002

    9 최종택, "아차산 고구려 보루의 역사적 성격" 서울시사편찬위원회 64 : 87-128, 2004

    10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 "아차산 4보루 성벽발굴조사"

    11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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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朝鮮總督府,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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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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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82 0.82 0.89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85 0.87 1.84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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