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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사의 시대별 가람배치 변화와 조선후기 후원자 = Changes in the Architecture and of Patrons of the Geumsan Buddhist Temple in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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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6489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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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is study set out to examine changes to the Geumsan Buddhist temple from its construction and to its heyday over a thousand years by reviewing changes to its architecture. It did not shed light on all the details of its changes over such a long period, but it reviewed Jinpyo and Hyedeok, who were the most important patrons of the reconstruction of the temple in the latter half of the Joseon dynasty. In the initial days of the Geumsan Buddhist Temple, designed by Jinpyo Yulsa, there was a north-south axis along the Bangdeung steps. Its overall form was different from that of today, as it was arranged in a manner typical for the Unified Silla with its Jungpun, Geumdang, Gangdang, Jongru, Gyeongru, and Hoirang.
    The heyday of the temple began with the reconstruction project overseen by Hyedeok Wangsang during the Goryeo era. It was at that time that the basic three-building form was established. There is a tendency to interpret the three buildings of the temple in connection with the Maitreya faith, but multiple Buddhist buildings were common among royal Buddhist temples in the Goryeo. Since the Geumsan Buddhist Temple maintained a status equal to the royal Buddhist temples of Goryeo, it could afford to have multiple buildings dedicated to Buddhism. Of these three buildings, Bongcheonwon, which withdraws the scriptures at royal Buddhist temples, and the Bangdeung steps, which offer a space for Gugye ceremonies, provide a good explanation for the high status of the temple.
    One can get a rough image of aspects of the Geumsan Buddhist Temple based on the records of Mugyeong Jasu in the early 18th century. The temple consisted of more buildings in painting by Sochi Heoryeon in the 19th century than in Mugyeong Jasu's records, which indicate that there were constant efforts to restore the Buddhist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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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study set out to examine changes to the Geumsan Buddhist temple from its construction and to its heyday over a thousand years by reviewing changes to its architecture. It did not shed light on all the details of its changes over such a long perio...

    This study set out to examine changes to the Geumsan Buddhist temple from its construction and to its heyday over a thousand years by reviewing changes to its architecture. It did not shed light on all the details of its changes over such a long period, but it reviewed Jinpyo and Hyedeok, who were the most important patrons of the reconstruction of the temple in the latter half of the Joseon dynasty. In the initial days of the Geumsan Buddhist Temple, designed by Jinpyo Yulsa, there was a north-south axis along the Bangdeung steps. Its overall form was different from that of today, as it was arranged in a manner typical for the Unified Silla with its Jungpun, Geumdang, Gangdang, Jongru, Gyeongru, and Hoirang.
    The heyday of the temple began with the reconstruction project overseen by Hyedeok Wangsang during the Goryeo era. It was at that time that the basic three-building form was established. There is a tendency to interpret the three buildings of the temple in connection with the Maitreya faith, but multiple Buddhist buildings were common among royal Buddhist temples in the Goryeo. Since the Geumsan Buddhist Temple maintained a status equal to the royal Buddhist temples of Goryeo, it could afford to have multiple buildings dedicated to Buddhism. Of these three buildings, Bongcheonwon, which withdraws the scriptures at royal Buddhist temples, and the Bangdeung steps, which offer a space for Gugye ceremonies, provide a good explanation for the high status of the temple.
    One can get a rough image of aspects of the Geumsan Buddhist Temple based on the records of Mugyeong Jasu in the early 18th century. The temple consisted of more buildings in painting by Sochi Heoryeon in the 19th century than in Mugyeong Jasu's records, which indicate that there were constant efforts to restore the Buddhist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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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본고는 금산사의 가람배치 변화와 조선후기 후원자에 대한 검토를 통해 창건기와 전성기를 걸쳐 오늘날까지 금산사 천년의 가람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긴 시간을 세부적으로 모두 조명한 것은 아니지만 금산사에서 가장 중요한 후원자이자 중창자인 진표, 혜덕, 조선후기 후원 세력까지 모두 검토할 수 있었으며, 이들이 만들었던 금산사의 대략적인 모습을 밝혀낼 수 있다는데 의의가 있다.
    진표 율사가 창건한 금산사의 초창기 모습은 방등계단을 중심으로 남-북 축선을 이루고 있으며, 대체적인 형식이 지금과 다른 중문, 금당, 강당, 종루, 경루, 회랑을 갖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사원 가람배치의 형태로 추정하였다.
    금산사의 전성기 가람은 고려시대 혜덕 왕사의 중창으로 시작하였으며 3원 가람의 기본형태가 이때 이루어진다. 금산사의 3원 가람과 관련하여 미륵신앙과 결부하여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다원 가람은 고려 왕실사찰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금산사 역시 고려시대 왕실사찰에 버금가는 지위를 유지했기 때문에 충분히 다원 가람을 형성할 수 있다. 또한 이미 금산사는 초창기부터 미륵신앙을 중심으로 사찰을 조영했기 때문에 고려시대 다시 미륵도량의 의미를 가람에 투영하여 일신할 이유가 없다. 금산사의 3원 가람 중 왕실사찰에서 등장하고 있는 경전을 인출하는 봉천원이나 수계의식 공간인 방등계단은 금산사의 높은 사격을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조선후기 금산사는 18세기 초반 무경자수의 기록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추정할 수 있었으며 19세기 소치 허련의 금산사도는 무경자수의 기록보다 더 많은 건물이 등장하고 있어 끊임없는 복원불사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대체적인 한국의 사찰건축 흐름과 일맥상통 하는 것이다. 가람의 확장은 일제강점기에 잠시 단절되어 주요 전각의 중수정도로 명맥이 이어지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복원불사를 추진하여 전성기 대사구역에 버금가는 면모로 일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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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금산사의 가람배치 변화와 조선후기 후원자에 대한 검토를 통해 창건기와 전성기를 걸쳐 오늘날까지 금산사 천년의 가람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긴 시간을 세부적으로 모두...

    본고는 금산사의 가람배치 변화와 조선후기 후원자에 대한 검토를 통해 창건기와 전성기를 걸쳐 오늘날까지 금산사 천년의 가람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긴 시간을 세부적으로 모두 조명한 것은 아니지만 금산사에서 가장 중요한 후원자이자 중창자인 진표, 혜덕, 조선후기 후원 세력까지 모두 검토할 수 있었으며, 이들이 만들었던 금산사의 대략적인 모습을 밝혀낼 수 있다는데 의의가 있다.
    진표 율사가 창건한 금산사의 초창기 모습은 방등계단을 중심으로 남-북 축선을 이루고 있으며, 대체적인 형식이 지금과 다른 중문, 금당, 강당, 종루, 경루, 회랑을 갖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사원 가람배치의 형태로 추정하였다.
    금산사의 전성기 가람은 고려시대 혜덕 왕사의 중창으로 시작하였으며 3원 가람의 기본형태가 이때 이루어진다. 금산사의 3원 가람과 관련하여 미륵신앙과 결부하여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다원 가람은 고려 왕실사찰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금산사 역시 고려시대 왕실사찰에 버금가는 지위를 유지했기 때문에 충분히 다원 가람을 형성할 수 있다. 또한 이미 금산사는 초창기부터 미륵신앙을 중심으로 사찰을 조영했기 때문에 고려시대 다시 미륵도량의 의미를 가람에 투영하여 일신할 이유가 없다. 금산사의 3원 가람 중 왕실사찰에서 등장하고 있는 경전을 인출하는 봉천원이나 수계의식 공간인 방등계단은 금산사의 높은 사격을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조선후기 금산사는 18세기 초반 무경자수의 기록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추정할 수 있었으며 19세기 소치 허련의 금산사도는 무경자수의 기록보다 더 많은 건물이 등장하고 있어 끊임없는 복원불사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대체적인 한국의 사찰건축 흐름과 일맥상통 하는 것이다. 가람의 확장은 일제강점기에 잠시 단절되어 주요 전각의 중수정도로 명맥이 이어지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복원불사를 추진하여 전성기 대사구역에 버금가는 면모로 일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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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상영, "雷黙 處英의 생애와 불교사적 위상" 한국불교연구원 (48) : 114-, 2018

    2 이분희, "金山寺 五層石塔 舍利莊嚴具 考察 - 탑 안에 봉안된 불상을 중심으로" 동악미술사학회 (15) : 118-, 2013

    3 엄기표,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학연문화사 2007

    4 홍윤식, "한국의 가람" 민족사 2000

    5 장충식, "한국불교미술연구" 시공사 2004

    6 이경화, "중국 당 道宣의 戒壇과 金山寺 戒壇" 호남사학회 (35) : 48-, 2009

    7 오세덕, "조선후기 중층불전(重層佛殿)에 관한 연구" 석당학술원 (56) : 245-246, 2013

    8 김봉열, "조선시대 사찰건축의 불전구성과 배치형식 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1989

    9 황인규, "조선시대 금산사의 역사적 전개와 사격" 불교문화연구원 73 : 151-, 2015

    10 이왕기, "백제 사찰건축의 조형과 기술" 주류성 2006

    1 김상영, "雷黙 處英의 생애와 불교사적 위상" 한국불교연구원 (48) : 114-, 2018

    2 이분희, "金山寺 五層石塔 舍利莊嚴具 考察 - 탑 안에 봉안된 불상을 중심으로" 동악미술사학회 (15) : 118-, 2013

    3 엄기표,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학연문화사 2007

    4 홍윤식, "한국의 가람" 민족사 2000

    5 장충식, "한국불교미술연구" 시공사 2004

    6 이경화, "중국 당 道宣의 戒壇과 金山寺 戒壇" 호남사학회 (35) : 48-, 2009

    7 오세덕, "조선후기 중층불전(重層佛殿)에 관한 연구" 석당학술원 (56) : 245-246, 2013

    8 김봉열, "조선시대 사찰건축의 불전구성과 배치형식 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1989

    9 황인규, "조선시대 금산사의 역사적 전개와 사격" 불교문화연구원 73 : 151-, 2015

    10 이왕기, "백제 사찰건축의 조형과 기술" 주류성 2006

    11 문화재청, "김제 금산사 대장전 정밀실측보고서" 2011

    12 오광석, "금산사 가람 조영에 내재된 미륵신앙의 유토피아 개념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28 (28): 269-276, 2012

    13 박광연, "관단 사원과 계단(戒壇) - 고려전기 금산사의 교단에서의 위상 -" 한국불교학회 (88) : 15-16, 2018

    14 "高麗史"

    15 鄭寅國, "韓國建築樣式論" 일지사 1991

    16 高裕燮, "韓國塔婆의 硏究" 동화출판공사 1981

    17 鄭英喆, "金山寺의 立地 및 配置 解釋에 關한 硏究" 611-623, 1999

    18 洪潤植, "金山寺의 伽藍과 彌勒信仰" 9 : 31-55, 1986

    19 "金山寺誌" 亞細亞文化社 1982

    20 "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

    21 고수영, "金山寺 方等戒壇 硏究" 韓國敎員大學校 大學院 1999

    22 "金山事蹟"

    23 "谿谷集"

    24 安瑛培, "視知覺的 分析에 의한 金山寺伽藍配置에 관한 考察" 8 (8): 71-79, 1992

    25 "華藏寺靜覺國師碑銘"

    26 "牧隱集"

    27 "無竟集文稿"

    28 "東文選"

    29 "東國李相國集"

    30 오경후, "朝鮮 中後期 金山寺와 禪敎兼修 傾向" 불교문화연구원 72 : 204-, 2015

    31 尹汝聖, "新羅 眞表의 佛敎信仰과 金山寺" 十一․ 二合 : 42-43, 1989

    32 "寶鏡寺圓眞國師碑銘"

    33 "天寶山檜巖寺修造記"

    34 "大宋僧史略"

    35 강우방, "佛國寺 建築의 佛敎的 象徵構造" (18) : 191-, 1997

    36 朴漢圭, "人文的 因子에 의한 金山寺의 建築解釋에 관한 硏究" 3 (3): 23-30, 1987

    37 "三國遺事"

    38 "三國史記"

    39 李康根, "17世紀 佛殿의 莊嚴에 관한 硏究" 東國大學校大學院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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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6 학회명변경 영문명 : Institute for Buddhist Culture -> Buddhist Culture Research Institute KCI등재
    2022-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9-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23 학회명변경 영문명 : The Korean Buddhist Research Institute -> Institute for Buddhist Culture KCI등재
    2012-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8-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KCI등재후보
    2006-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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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3 0.73 0.69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3 0.55 1.313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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