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거는 우덕순의 도움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진척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특히 그의 안중근의거 이후와 해방공간의 활동 연구는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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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운용 (안중근평화연구원)
2014
Korean
Woo Deok-sun ; Ahn Jung-geun ; Boguga ; Daejonggyo ; Kim Jwa-jin ; Daehan kumin Party ; Bunyo Sinmun newspaper ; 우덕순 ; 안중근 ; 안중근의거 ; 김좌진 ; 대종교 ; 안중근선생기념사업회 ; 부녀신문 ; 대한국민당
KCI등재
학술저널
131-180(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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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안중근의거는 우덕순의 도움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진척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특히 그의 안중근의거 이후와 해방공간의 활동 연구는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
안중근의거는 우덕순의 도움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진척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특히 그의 안중근의거 이후와 해방공간의 활동 연구는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이글은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우덕순은 1879년 평범한 부모 밑에서 『통감』 등 기본적인 한학을 익혔다. 그는 1906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하기 전에 상동청년회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는 그가 민족문제에 눈을 뜬 계기가 되었다. 그의 러시아 망명은 을사늑약에 따른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과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현실적 이유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우덕순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안중근이다. 안중근과 만난 시점은 1908년 봄 무렵으로 이범윤 진영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국내진공작전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헤이그 특사파견을 위한 모금에 참여하였고 교육운동에도 진력하였다. 그리고 그는 안중근과 함께 동의회와 블라디보스토크 공립협회에도 참여하였다.
국내진공적전 때 일제에 잡힌 우덕순은 다행히 탈옥에 성공하여 국내에 잠시 머물다가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대동공보사의 수금원과 한인상업회사의 발기인으로 민족운동을 지속하였다.
1909년 10월 이토 처단 의지를 다지고 있었던 우덕순은 안중근의 이토 제거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였다. 물론 이는 안중근과 역사와 민족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안중근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덕순은 안중근과 같이 재판을 제2의 투쟁으로 여겼다. 하지만 우덕순은 안중근만큼 일제의 침략이론을 적극적이고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1913년에 출옥한 우덕순은 1917년까지 주로 국내에서 정대호・김좌진 등과 교류하면서 민족운동을 모색하였다. 1918년 정대호의 동지로 정보수집에 진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3년 김좌진과는 같은 대종교 신도로서 대종교의 표면단체인 만몽산업회에 동참하였고, 배정자 제거계획에 참여하는 등 민족운동에 집중하였다. 아울러 이토 처단의 결의를 담은 자신의 보구가를 한인시회에 널리 유행시킨 그는 청구신보의 간행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그는 러시아 민족운동가들이 하얼빈에 오면 반드시 만나야 할 인물로 대표적인 한인민족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우덕순이 하얼빈 조선인민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점에서 친일시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배일사상이 농후하다”라는 그에 대한 일제의 평가, 그의 민족운동 경력, 동삼성한인협력회와 열사 안중근선생 기념사업협회를 주도한 점, 해방 후 민족운동가들의 지탄을 받지 않았다는 점 등에서 친일로 변절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1945년 해방공간에서 그는 안중근 추모사업을 주도하였고 1946년 『부녀신문』을 창간하여 편집 및 발행인을 맡았으며, 같은 해 평화보육원 건립에 참여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수립 이후 그는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대한국민당과 민족진영강화위원회의 핵심으로 활동하였다. 대한국민당이 대한민국의 수호와 반공을 강령으로 하였다는 점, 민족진영강화위원회가 좌익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 우덕순은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였다는 점 등에서 그의 정치적 지향점을 읽을 수 있다. 그는 6ㆍ25 때 ...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clarify the activities of Woo Deok-sun(禹德淳) i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after liberation from Japan in this paper. The results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Woo Deok-sun was born in 1879, the same ye...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clarify the activities of Woo Deok-sun(禹德淳) i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after liberation from Japan in this paper. The results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Woo Deok-sun was born in 1879, the same year as Ahn Jung-geun, into an average family. He received a basic education in the Chinese classics, including the “Tonggam”(通鑑). In 1906, after being active in the Sangdong Youth Association, he sought political asylum in Vladivostok. This opened his eyes to Korean national problems.
It seems that his decision to defect to Russia was both in order to escape from economic difficulties and out of fervor for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fter the signing of the Treaty of Protection in 1905.
Ahn Jung-geun had a major impact on the life of Woo Deok-sun. He met Ahn around the spring of 1908, when both were active in Lee Beom-yun’s group. He took part in fundraising activities to support the secret mission to the Hague in 1907, and was very activity in educational activities.
Furthermore, Woo and Ahn together participated in the Donguihoi and the Gongnip Hoieui in Vladivostok. Most importantly, they worked together in forward military operations on Korean territory against the Japanese. This can be seen as one reason why Ahn Jung-geun chose Woo Deok-sun as his comrade in arms.
During forward operations in Korea, Woo Deok-sun was captured by the Japanese, but was luckily able to escape prison. He stayed for a while in occupied Korea, before returning to Khabarovsk. Afterwards, he continued his work as a fighter for Korean independence, as the founder of the Daedonggongbosa(大東共報社) and Hanin Trading Company(韓人商業會社).
In early September 1909, when Ito Hirobumi’s visit to Manchuria was confirmed, Woo Deok-sun became determined to kill Ito. It was at this time that Ahn Jung-geun(安重根) suggested to Woo a great and meritorious deed. Since he shared with Ahn Jung-geun the same historical and nationalist consciousness, Woo naturally agreed wholeheartedly to his proposition.
Ahn Jung-geun succeeded in his valorous deed, but it can be seen that Woo Deok-sun’s assistance played a decisive role. Like Ahn Jung-geun, Woo Deok-sun saw his trial in court as a second struggle. But unlike Ahn Jung-geun, He was unable to refute Japan’s policy of imperial expansion logically and convincingly.
In 1913 Woo was released from prison, and for 5 years he mainly roamed within Korea, seeking unsuccessfully to involve himself in the nationalist movement. At this time, he worked together with Jeong Dae-ho and Kim Jwa-jin. As a comrade of Jeong Dae-ho, Woo worked hard to gather intelligence. Moreover, Woo was a believer in Daejonggyo (大倧敎), as was Kim Jwa-jin(金佐鎭), and he worked together in the Daejonggyo front group, the Manmong Industrial Association (滿蒙産業會), as well as collaborating in the plans to do away with pro-Japanese Koreans.
His song “Boguga(報仇歌)”, that tells of his resolve to kill Ito Hirobumi, became widely known in Korean society, and he actively assisted in the publication of the Cheonggu Sinbo (靑邱新報). The fact that Woo Deok-sun was seen as a person who all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living in Russia had to meet when visiting Harbin shows that Woo was a central figure in the struggle for Korea‘s sovereignty.
However, while active as the leader of the Harbin Korean Association (哈爾濱朝鮮人民會), Woo received funds from the Japanese Consulate-General resident in Harbin, and this earned him the label of pro-Japanese collaborator.
But taking together the Japanese assessment of him as “rapidly anti-Japanese”, his experience as an independence activist, his leadership activities in the Dongsamseong Korean Association(東三省韓人協力會) and the Memorial Society for Heroic Marty Ahn Jung-geun, and the fact that after Liberation he was not rejected by other independence fighters, it cannot ...
참고문헌 (Reference)
1 "해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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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일본외교사료관,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在西比利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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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체제기 조선인 해군군속의 일본 지역 동원 현황 - 구일본해군 조선인군속 관련 자료(2009)의 데이터 분석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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