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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기 원주 지방의 역사와 문화 = The Political and Cultural Activity of Wonju(原州)'s local Elite during the early Kor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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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4032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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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e ultimate goal of community history research is to discover the local identity and pride by emphasizing their independently-developed history and culture. The community history does not simply oppose to the state it seeks for a balance between the Central government's partial control and its own autonomy. The same case applies to Wonju's politics and culture during the early Koryo period.
      There were more than five hundred local districts called Gun(郡) or Hyon(縣) during the early periods of Koryo. Nevertheless, only one fifths of them had their local governors sent from the Central government. Therefore one governor from the Central government ruled approximately four or five of other neighboring districts as well. The districts with their own governor are called Ju-hyon(主縣), whereas those without their governor are called Sok-hyon(屬縣). Wonju, in this case, was one of the Ju-hyons.
      The community elite class in Wonju is divided into three groups. The first group came from the central noble family and they assisted the governor sent from the Central government to the community. Meanwhile, the second group was from the local noble family, and they also assisted the governor. The former group of people was called Sok-gwan(屬官), and the latter was called hyang-ri(鄕吏). Finally, the third group of the elite class, called Gwan-ban(官班), came from local noble family and they could give their opinion and advice to the governor.
      The Gwan-ban class in Wonju had a wide sphere of influence. Some from this class became the officials of the Central government, while others became the local officials. They acted as cultural patrons who worked as cultural mediators between Silla's culture and Koryo's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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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ultimate goal of community history research is to discover the local identity and pride by emphasizing their independently-developed history and culture. The community history does not simply oppose to the state it seeks for a balance between the ...

      The ultimate goal of community history research is to discover the local identity and pride by emphasizing their independently-developed history and culture. The community history does not simply oppose to the state it seeks for a balance between the Central government's partial control and its own autonomy. The same case applies to Wonju's politics and culture during the early Koryo period.
      There were more than five hundred local districts called Gun(郡) or Hyon(縣) during the early periods of Koryo. Nevertheless, only one fifths of them had their local governors sent from the Central government. Therefore one governor from the Central government ruled approximately four or five of other neighboring districts as well. The districts with their own governor are called Ju-hyon(主縣), whereas those without their governor are called Sok-hyon(屬縣). Wonju, in this case, was one of the Ju-hyons.
      The community elite class in Wonju is divided into three groups. The first group came from the central noble family and they assisted the governor sent from the Central government to the community. Meanwhile, the second group was from the local noble family, and they also assisted the governor. The former group of people was called Sok-gwan(屬官), and the latter was called hyang-ri(鄕吏). Finally, the third group of the elite class, called Gwan-ban(官班), came from local noble family and they could give their opinion and advice to the governor.
      The Gwan-ban class in Wonju had a wide sphere of influence. Some from this class became the officials of the Central government, while others became the local officials. They acted as cultural patrons who worked as cultural mediators between Silla's culture and Koryo's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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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지방사 연구의 목표는 해당 지방과 다른 지방, 특히 각 왕조의 서울 지방과 비교하여 해당 지역사회의 역사적 정체성과 자존감을 찾는 것이다. 지방사는 곧 국가사이기 때문에 국가와 지방이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해당 왕조 국가의 지방 정책에서 도성 집중적 정책이 강할 때, 지방이 독자성을 강조할 뿐이다. 국가와 지방의 관계는 국가의 지방 ‘지배’와 지방의 ‘자율’ 운영 사이의 균형과 편중에서 찾아야 한다. 이번 글은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고려 초기 원주지방의 정치와 문화를 다룬 것이다.
      고려 초기 국가는 전국을 110여 곳으로 나누는 광역 지방 통치 구조를 마련하였다. 군현 수는 500여개였지만, 110곳에만 외관을 파견한 것이다. 외관이 파견된 군현을 주현(主縣)이라 하는데, 각 주현은 4~8곳의 속현을 관할하였다. 이러한 한 명의 외관으로 여러 속현까지 관할하는 광역 지방지배방식으로 국가의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한 것이 고려 지방지배의 특징인데, 이러한 고려국가의 지방 통치정책으로 말미암아 지방의 자율 운영 폭이 조선시대보다 넓을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현의 읍사에는 외관을 중심으로, 외관과 속관, 향리 조직이 하나있고, 외관 중심의 지배조직과 함께 관반층의 자율성이 강한 토관사(土官司) 조직이 별도로 있었다. 중앙의 지배와 지방의 자율을 동시에 허용한 통치 구조였다.
      한편 고려 국가는 110여곳의 주현이 10여곳의 계수관 지역에 속하게 하였지만, 계수관과 주현의 관계는 지배의 상하관계는 아니었다. 단지 국가의 주요 관리 범죄인 사형죄를 처리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였을 뿐이다. 그 외의 경제 활동, 사회 활동, 문화 활동은 주현(主縣)의 자율성에 맡겨 두었다.
      이러한 구조였기 때문에 원주의 지방 세력 역시, 개경의 관직으로 진출하거나 지방의 향리로 복무하거나 아니면, 지방의 관반층으로 사는 등 자유로운 선택이 보장되어 있었다. 실제 이 시기 원주의 대표적인 가문이었던 원주 원씨의 예를 보면, 개경에 진출한 사람들도 있고, 원주의 향리직에 종사하던 사람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관직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살다가 불교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자율성 속에서 문화 활동도 중앙 문화와 지방 문화를 모두 경험하는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원주 철불이 대표적인 예이다. 원주 철불의 조성 및 후원 세력은 중앙의 예술 경향을 따르려는 사람들도 있고, 지역적 성격이 강한 예술을 하려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원주 철불 문화는 신라 중앙 문화가 토착 문화를 만나 지방화하고, 그것이 다시 고려로 이행하여 시대적, 지역적 특징이 강한 문화라고 판단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지방사 연구에서 강조되어야 할 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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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사 연구의 목표는 해당 지방과 다른 지방, 특히 각 왕조의 서울 지방과 비교하여 해당 지역사회의 역사적 정체성과 자존감을 찾는 것이다. 지방사는 곧 국가사이기 때문에 국가와 지방...

      지방사 연구의 목표는 해당 지방과 다른 지방, 특히 각 왕조의 서울 지방과 비교하여 해당 지역사회의 역사적 정체성과 자존감을 찾는 것이다. 지방사는 곧 국가사이기 때문에 국가와 지방이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해당 왕조 국가의 지방 정책에서 도성 집중적 정책이 강할 때, 지방이 독자성을 강조할 뿐이다. 국가와 지방의 관계는 국가의 지방 ‘지배’와 지방의 ‘자율’ 운영 사이의 균형과 편중에서 찾아야 한다. 이번 글은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고려 초기 원주지방의 정치와 문화를 다룬 것이다.
      고려 초기 국가는 전국을 110여 곳으로 나누는 광역 지방 통치 구조를 마련하였다. 군현 수는 500여개였지만, 110곳에만 외관을 파견한 것이다. 외관이 파견된 군현을 주현(主縣)이라 하는데, 각 주현은 4~8곳의 속현을 관할하였다. 이러한 한 명의 외관으로 여러 속현까지 관할하는 광역 지방지배방식으로 국가의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한 것이 고려 지방지배의 특징인데, 이러한 고려국가의 지방 통치정책으로 말미암아 지방의 자율 운영 폭이 조선시대보다 넓을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현의 읍사에는 외관을 중심으로, 외관과 속관, 향리 조직이 하나있고, 외관 중심의 지배조직과 함께 관반층의 자율성이 강한 토관사(土官司) 조직이 별도로 있었다. 중앙의 지배와 지방의 자율을 동시에 허용한 통치 구조였다.
      한편 고려 국가는 110여곳의 주현이 10여곳의 계수관 지역에 속하게 하였지만, 계수관과 주현의 관계는 지배의 상하관계는 아니었다. 단지 국가의 주요 관리 범죄인 사형죄를 처리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였을 뿐이다. 그 외의 경제 활동, 사회 활동, 문화 활동은 주현(主縣)의 자율성에 맡겨 두었다.
      이러한 구조였기 때문에 원주의 지방 세력 역시, 개경의 관직으로 진출하거나 지방의 향리로 복무하거나 아니면, 지방의 관반층으로 사는 등 자유로운 선택이 보장되어 있었다. 실제 이 시기 원주의 대표적인 가문이었던 원주 원씨의 예를 보면, 개경에 진출한 사람들도 있고, 원주의 향리직에 종사하던 사람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관직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살다가 불교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자율성 속에서 문화 활동도 중앙 문화와 지방 문화를 모두 경험하는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원주 철불이 대표적인 예이다. 원주 철불의 조성 및 후원 세력은 중앙의 예술 경향을 따르려는 사람들도 있고, 지역적 성격이 강한 예술을 하려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원주 철불 문화는 신라 중앙 문화가 토착 문화를 만나 지방화하고, 그것이 다시 고려로 이행하여 시대적, 지역적 특징이 강한 문화라고 판단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지방사 연구에서 강조되어야 할 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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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金光洙, "羅末麗初의 豪族과 官班" 1979

      2 李仁在, "羅末麗初 北原京의 政治勢力 再編과 佛敎界의 動向" 31 : 2003

      3 崔聖銀, "羅末麗初 中部地域 鐵佛의 樣式系譜" 1996

      4 한국사연구회, "한국지방사연구의 현황과 과제" 2000

      5 삼국통일신라, "한국의 고대 조각과 미의식" 1989

      6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7 하현강, "지방통치구조의 정비와 그 구조" 국사편찬위원회 1993

      8 김갑동, "지방세력과 지방제도" 1990

      9 하일식, "신라통일기 왕실직할지와 군현제" 97 : 1997

      10 李仁在, "법천리고분군을 통해 본 삼국시대 원주와 마한백제와의 관계" 126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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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崔聖銀, "羅末麗初 中部地域 鐵佛의 樣式系譜" 1996

      4 한국사연구회, "한국지방사연구의 현황과 과제" 2000

      5 삼국통일신라, "한국의 고대 조각과 미의식" 1989

      6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7 하현강, "지방통치구조의 정비와 그 구조" 국사편찬위원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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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하일식, "신라통일기 왕실직할지와 군현제" 97 : 1997

      10 李仁在, "법천리고분군을 통해 본 삼국시대 원주와 마한백제와의 관계" 126 : 2004

      11 김광수, "나말여초 호족과 관반" 1979

      12 최성은, "나말여초 중부지역 석불조각에 대한 고찰 - 궁예 태봉 지역 미술에 대한 시고" 44 : 2002

      13 김광수, "고려태조의 삼한공신 사학지 7" 1973

      14 하현강, "고려초기의 지방통치 고려지방제도의 연구 1988 한국중세사연구" 1975

      15 김갑동, "고려초기의 관계제와 공신제 나말여초의 호족과 사회변동연구" 1990

      16 하일식, "고려초기 지방사회의 주관과 관반 (官班)" 34 : 1999

      17 이수건, "고려전기 지배세력의 성관분석 한국중세사회사연구" 1984

      18 홍연진, "고려전기 도제의 성립과 그 성격" 1993

      19 홍연진, "고려전기 도제의 성립과 그 성격" 1993

      20 윤경진, "고려전기 계수관의 설정원리와 그 변화" 96 : 2003

      21 박종기, "고려시대의 지방관원들 - 속관을 중심으로" 24 : 1997

      22 박진훈, "고려시대 감옥의 설치와 운영체계" 47 : 2003

      23 구산우, "고려시기 계수관의 지방행정 기능과 위상" 43 : 2002

      24 박종진, "고려시기 계수관의 기능과 위상" 한국역사연구회 (56) : 173-201, 2005

      25 김갑동, "고려 초기 관계의 성립과 그 의의 역사학보 117" 1988

      26 이인재, "고려 중후기 지방제 개혁과 감무" 1990

      27 武田幸男, "高麗李朝の邑吏田" 1966

      28 北村秀人, "高麗末李朝初期の鄕吏" 1976

      29 李佑成, "高麗朝의 吏에 대하여" 1964

      30 이혜옥, "高麗時代의 鄕役" 1985

      31 박경자, "高麗時代의 鄕吏 硏究" 1986

      32 茶谷十六, "高麗時代の長吏について" 1965

      33 金鍾國, "高麗時代の鄕吏について"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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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尹京鎭, "高麗前期 鄕吏制의 구조와 戶長의 직제" 20 : 1997

      39 조영제, "高麗前期 鄕吏制度에 대한 일고찰" 1982

      40 深谷敏鐵, "高麗初期の鄕吏について" 1964

      41 崔聖銀, "高麗初期 廣州鐵佛硏究"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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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李勛相, "高麗中期 鄕吏制度의 변화에 대한 일고찰"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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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羅恪淳, "高麗 鄕吏의 신분적 특성과 그 변화" 1992

      48 羅恪淳, "高麗 鄕吏의 신분변화" 1990

      49 朴京子, "高麗 鄕吏의 경제적 기반" 1992

      50 朴京子, "高麗 鄕吏制度의 成立" 1974

      51 尹京鎭, "高麗 郡縣制의 운영원리와 主縣-屬縣 領屬關係의 성격" 10 : 2001

      52 姜恩景, "高麗 後期 戶長層의 變動硏究" 1997

      53 홍승기, "高麗 後期 事審官 제도의 운용과 鄕吏의 중앙 진출" 1989

      54 金光洙, "高麗 官班體制의 變化와 兩班戶籍 整理" 1984

      55 具山祐, "高麗 前期 鄕村支配體制硏究" 1995

      56 조영제, "高麗 初期 鄕吏職의 由來에 대한 小考- 鄕吏職名의 變化를 中心으로" 1980

      57 李慶喜, "高麗 初期 尙州牧의 군현편성과 屬邑통치의 실태 -若木郡內 鄕吏조직의 운영 실태를 중심으로" 1995

      58 윤경진, "高麗 初期 在地官班의 정치적 위상과 지방사회 운영" 2004

      59 崔仁善, "韓國鐵佛硏究" 1998

      60 金元龍, "韓國 古美術의 理解" 1980

      61 武田幸男, "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の硏究"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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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李載, "朝鮮前期 土豪의 實態와 性格" 68 : 1996

      64 李成茂, "朝鮮初期의 鄕吏" 1970

      65 李載, "朝鮮初期의 土官" 1984

      66 김혜완, "普願寺 鐵佛의 조상 - 고려초 原州鐵佛과 관련하여" 14 : 2000

      67 吉田光男, "十五世紀朝鮮の土官制- 李朝初期地方支配體制の一斷面" 1981

      68 李仁在, "1291년 카단(哈丹)의 치악성 침입과 원충갑의 항전" 7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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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01 등재 등재후보로 하락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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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44 0.44 0.4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38 0.38 0.811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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